
993년 거란의 80만 대군이 고려를 침공했을 때, 고려 조정은 공황 상태에 빠졌습니다. 어떤 이들은 항복을 주장했고, 어떤 이들은 서경 이북의 땅을 떼어주자고 했습니다. 이때 한 사람이 나섰습니다. "국토를 떼어 적에게 준다는 것은 만세의 치욕입니다." 그가 바로 서희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한 자루의 칼도 들지 않고 적진에 들어가, 말만으로 거란군을 물리치고 오히려 영토까지 얻어냈습니다.

동아시아 정세를 꿰뚫어본 안목
서희(942~998)를 이해하려면 먼저 당시 동아시아 국제 정세를 봐야 합니다. 916년 건국된 거란은 938년 국호를 '요'로 바꾸며 최전성기를 맞고 있었습니다. 960년 건국된 송나라와 중원의 패권을 다투며 대치 중이었습니다. 그 사이에 고려가 있었습니다.
고려 태조 왕건은 명확한 친송·반거란 정책을 펼쳤습니다. 발해를 멸망시키고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한 거란의 친선 요구를 거절했습니다. 거란 사신 30명을 섬에 유배 보내고, 함께 온 낙타 50필을 굶겨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이것이 942년의 일이었는데, 바로 그해 서희가 태어났습니다.
서희는 좋은 가문 출신이었습니다. 아버지 서필은 광종 대의 대표적 재상이었습니다. 하지만 가문만이 아니었습니다. 19세에 과거에 급제했고, "차례를 뛰어넘어 승진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실력도 뛰어났습니다.
서희의 외교 능력이 처음 드러난 것은 972년, 31세 때였습니다. 내의성 시랑의 벼슬로 송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었을 때입니다. 당시 송 태조는 그동안 고려가 외교적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며 불만을 표했습니다. 서희는 "여진과 거란이 육로를 막고 있어 사절을 보내지 못했다"고 설명했습니다. 그의 예의바른 태도와 뛰어난 언변에 송 태조는 마음을 열었고, 서희에게 검교병부상서(지금의 국방부 장관급)라는 벼슬을 내렸습니다.
이 경험을 통해 서희는 송과 거란이 대치하고 있는 동아시아 국제 정세를 직접 체감했습니다. 이것이 훗날 소손녕과의 담판에서 결정적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80만 대군 앞에서 갈라진 고려 조정
993년 거란이 침공했습니다. 거란 장수 소손녕은 봉산군을 함락시킨 후 공문을 보냈습니다. "80만의 군사가 도착했다. 만일 강변까지 나와서 항복하지 않으면 섬멸할 것이니, 국왕과 신하들은 빨리 우리 군영 앞에 와서 항복하라."
단순한 허세가 아니었습니다. 거란은 압록강 일대의 여진족과 정안국을 멸망시켰고, 송나라도 거란과의 전투에서 대패했습니다. 거란은 명실상부 동아시아 최강자였습니다.
성종은 박양유를 상군사, 서희를 중군사, 최량을 하군사로 임명해 방어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소손녕이 다시 공문을 보냈습니다. "우리나라는 천하를 통일하고 있다. 아직 우리에게 귀순치 않는 나라는 기어코 소탕할 것이니 속히 투항하라."
성종은 이몽전을 보내 화의를 청했습니다. 제1차 협상이었습니다. 하지만 소손녕은 "너희 나라가 백성을 돌보지 않으므로 천벌을 주러 왔다. 항복하라"고만 했습니다. 성과 없는 회담이었습니다.
이몽전이 돌아오자 고려 조정은 두 파로 갈라졌습니다. 무조건 항복하자는 투항론과, 서경 이북의 땅을 떼어주고 화의하자는 할지론이었습니다. 성종은 할지론 쪽으로 기울었습니다. 서경 창고의 쌀을 백성들에게 나눠주고, 남은 쌀은 거란군이 쓸까봐 대동강에 버리라고 명령했습니다.
이때 서희가 나섰습니다. "지금 거란의 병세만을 보고 경솔하게 서경 이북의 땅을 떼어주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삼각산 이북 또한 모두 고구려의 옛 강토인데, 그들이 한없는 욕심으로 끝없이 강요한다면 다 내어주어야 하겠습니까? 국토를 떼어 적에게 준다는 것은 만세의 치욕입니다. 바라건대 저희들로 하여금 적과 일전을 겨루게 한 뒤 그때 가서 다시 화친을 논의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적진으로 들어간 서희
그런데 흥미로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소손녕의 협박에도 불구하고 고려군이 안융진 전투에서 승리한 것입니다. 산악 지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유목민족인 거란군이 어려움을 겪었던 것 같습니다. 소손녕은 더 이상 진격하지 않고 다시 항복만 독촉했습니다.
고려는 합문사인 장영을 보냈지만, 소손녕은 "더 높은 직급의 대신을 보내라"며 거절했습니다. 제2차 회담도 시작도 못하고 끝났습니다.
성종이 중신들을 둘러보며 물었습니다. "누가 거란 영문으로 가서 언변으로써 적병을 물리치고 만대의 공을 세우겠는가?"
아무도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장영이 살아서 돌아오긴 했지만, 대신을 죽이려는 함정일지도 모르는 자리였습니다. 이때 서희가 자원했습니다. "제가 비록 불민하나 어찌 감히 왕명을 받들지 않겠습니까?"
성종은 예성강까지 나가 서희의 손을 잡고 전송했습니다. 제3차 회담이 시작되었습니다.
첫 번째 승부: 예식 문제
서희가 소손녕의 진영에 도착하자, 소손녕이 말했습니다. "나는 대국의 귀인이니 그대가 나에게 뜰에서 절을 해야 한다."
거란군이 가득한 적진이었습니다. 자신의 목숨은 물론 나라의 운명이 달린 자리였습니다. 하지만 서희는 침착하게 대답했습니다. "신하가 임금에게 대할 때는 절하는 것이 예법이나, 양국의 대신들이 대면하는 자리에서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소손녕이 계속 고집을 부리자 서희는 노한 기색을 보이며 숙소로 들어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소손녕이 대등한 예식을 수락했습니다. 첫 번째 기싸움은 서희의 승리였습니다.
왜 서희가 이렇게 강경하게 나갈 수 있었을까요? 그는 거란이 전면전보다 화의를 원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송과 대치 중인 상황에서 고려와의 전면전은 거란에게도 부담이었습니다. 안융진 전투 패배로 산악 전투에 자신감을 잃은 것도 읽어냈습니다.
두 번째 승부: 고구려 계승 논쟁
본격적인 담판이 시작되었습니다. 소손녕이 먼저 물었습니다. "당신네 나라는 옛 신라 땅에서 건국하였다. 고구려의 옛 땅은 우리나라에 소속되었는데, 어째서 당신들이 침범하였는가?"
광종이 여진의 땅을 빼앗아 성을 쌓은 것을 문제 삼은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질문이 아니었습니다. '누가 고구려의 정당한 계승자인가'라는 매우 중요한 논점이었습니다.
서희는 조목조목 반박했습니다. "그렇지 않다. 우리나라는 바로 고구려의 후예이다. 그러므로 나라 이름을 고려라 부르고, 평양을 국도로 정한 것 아닌가. 오히려 귀국의 동경이 우리 영토 안에 들어와야 하는데 어찌 거꾸로 침범했다고 하는가?"
한치의 틈도 없는 논리였습니다. 소손녕의 말문이 막혔습니다. 고구려 후계론 논쟁은 일단락되었습니다.
세 번째 승부: 거란의 진짜 의도
마침내 소손녕이 침공의 본래 목적을 말했습니다. "우리나라와 국경을 접하고 있으면서 바다 건너에 있는 송나라를 섬기고 있는 까닭에 이번에 정벌하게 된 것이다. 만일 땅을 떼어 바치고 국교를 회복한다면 무사하리라."
드디어 본심이 드러났습니다. 거란이 원하는 것은 고려가 송나라와 손을 끊고 자신들 편에 서는 것이었습니다. 송과의 전면전을 앞두고 배후를 안정시키려는 것이었습니다.
서희의 대답이 탁월했습니다. "압록강 안팎도 우리 땅인데, 지금 여진이 그 중간을 점거하고 있어 육로로 가는 것이 바다를 건너는 것보다 왕래하기가 더 곤란하다. 그러니 국교가 통하지 못하는 것은 여진 탓이다. 만일 여진을 내쫓고 우리의 옛 땅을 회복하여 거기에 성과 보를 쌓고 길을 통하게 한다면 어찌 국교가 통하지 않겠는가."
이것이 서희 외교의 핵심입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을 알았지만, 바로 그 답을 주지 않았습니다. 대신 조건을 내걸었습니다. 국교를 맺으려면 여진을 내쫓고 그 땅을 고려가 차지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소손녕이 이 내용을 거란 황제에게 보고하자, "고려가 이미 화의를 요청했으니 철군하라"는 답이 왔습니다. 그리고 고려가 압록강 동쪽 280여 리의 영토를 개척하는 데 동의한다는 답서도 보내왔습니다.
싸우지 않고 이긴 전쟁
서희는 한 자루의 칼도 들지 않고 거란의 80만 대군을 물리쳤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오히려 영토를 얻어낸 것입니다. 이듬해부터 서희는 직접 군사를 이끌고 여진족을 몰아낸 뒤 강동 6주(흥화진, 용주, 통주, 철주, 귀주, 곽주)에 성을 쌓았습니다. 고구려 멸망 이후 처음으로 국경이 압록강에 이르렀습니다.
물론 그 대가로 거란과 국교를 맺고 일시적으로 사대의 예를 갖췄습니다. 하지만 송과 대치 중인 거란이 고려와 전면전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정확히 읽어냈고, 산악 전투에서 자신감을 잃은 거란군의 상황을 파악했으며, 논리 정연한 언변과 당당한 태도로 협상을 이끌어낸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역사상 가장 성공한 외교로 평가받는 이유입니다.
외교관의 삶
서희는 소손녕과의 담판 이후 평장사를 거쳐 종1품 태보내사령에 임명되었습니다. 996년 병을 얻어 개국사에서 오랫동안 요양했을 때, 성종이 직접 문병을 와 의복과 말을 하사하고 개국사에는 곡식 1천 석을 내렸습니다.
서희는 998년 57세의 나이로 개국사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거란과의 담판으로부터 불과 5년 후였습니다.
서희의 업적은 단순히 영토를 넓힌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는 외교가 무력만큼, 때로는 무력보다 더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줬습니다. 국제 정세에 대한 정확한 이해, 상대방의 의도를 꿰뚫어보는 통찰력, 논리적인 언변, 그리고 목숨을 건 자리에서도 굽히지 않는 자존심이 결합될 때 외교가 얼마나 강력한지를 증명한 것입니다.
오늘날 외교안보연구원에 서희의 동상이 서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우리 역사상 가장 유능했던 외교관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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