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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전

최만리, 한글 창제를 반대한 집현전의 수장

by 정보정보열매 2025. 10.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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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만리, 한글 창제를 반대한 집현전의 수장

 

한글을 반대한 인물? 그 이면의 진실

최만리(崔萬理, ?~1445). 이름만 들어도 '한글 창제 반대'라는 이미지가 떠오르는 인물입니다. 하지만 그의 삶을 들여다보면, 단순히 부정적으로만 평가할 수 없는 복잡한 면모가 드러납니다.

명문가 출신의 엘리트 학자

최만리는 '해동공자'로 불린 최충의 13대손으로, 대대로 이어진 명문가 출신이었습니다. 1419년 문과에 급제한 그는 세종 2년(1420) 집현전이 설치되면서 그곳에서 약 25년간 근무했습니다. 박사에서 시작해 집현전 실질적 수장인 부제학까지 오른 것은 물론, 청백리로도 선정될 만큼 성공적인 관료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최만리

1444년, 운명을 바꾼 상소

세종 26년(1444) 2월 20일, 최만리는 집현전 동료들과 함께 한글 창제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습니다. 이른바 '갑자 상소'입니다.

그들이 제기한 반대 이유는 크게 여섯 가지였습니다:

  1. 사대 원칙 위배 - 중국을 섬기는 조선이 독자 문자를 만드는 것은 부끄러운 일
  2. 오랑캐와 같아지는 것 - 몽골, 여진 등 오랑캐들이나 독자 문자를 쓴다
  3. 실용성 의문 - 이두로도 충분한데 굳이 새 문자가 필요한가
  4. 형옥의 공평성은 문자가 아닌 관리의 자질 문제
  5. 성급한 추진
  6. 세자(문종)의 학문에 방해

최만리는 한글을 "야비하고 상스러운 무익한 글자"라고 표현하며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세종의 분노와 최만리의 말년

세종의 반응은 매우 거셌습니다. "너희가 운서를 아는가? 내가 바로잡지 않으면 누가 바로잡겠는가?"라며 최만리 일행을 의금부에 하옥시켰습니다. 하루 만에 풀려나긴 했지만, 이것이 최만리 관료 생활의 끝이었습니다. 그는 다시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고, 이듬해(1445) 세상을 떠났습니다.

시대적 한계인가, 개인의 과오인가?

최만리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요?

당시 조선을 지배한 기본 사상은 성리학이었고, 그 핵심 외교 원칙은 '사대'였습니다. 중세 유럽에서 기독교 원리를 부정할 수 없었듯, 조선에서 사대 원칙을 공개적으로 거스를 수 있는 지식인은 거의 없었습니다. 실제로 한글 창제 이후에도 오랫동안 조선의 양반들은 한글을 천시하며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세조는 20여 년 뒤 최만리를 "작은 잘못이 하나라도 있으면 반드시 간언한" 훌륭한 신하로 평가했습니다. 그에게 한글 창제는 여섯 가지나 되는 문제점이 있는 중대한 잘못이었고, 신하로서 간언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최만리의 한계는 개인의 한계이기보다는 그 시대의 보편적 한계에 가까웠습니다. 그 한계를 뛰어넘어 500년 후의 미래를 내다본 유일한 사람이 바로 세종대왕이었습니다.


참고: 서울시 중구에 있는 만리동(萬里洞)은 최만리가 살았던 곳에서 유래한 지명입니다(한자는 다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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