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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전

"나는 단종의 신하입니다" - 끝까지 굽히지 않은 박팽년

by 정보정보열매 2025. 10.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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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단종의 신하입니다" - 끝까지 굽히지 않은 박팽년

 

"저는 상왕의 신하이지, 어찌 나으리의 신하가 되겠습니까."

옥중에서 세조가 회유했지만, 박팽년(1417-1456)은 끝까지 세조를 '나으리'라고만 불렀습니다. 왕이 아닌 그저 '나으리'. 세조를 인정할 수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세조가 화를 내며 말했습니다.

"네가 충청도 관찰사 때 이미 신하라고 쓰지 않았느냐?"

박팽년이 답했습니다.

"1년 동안 장계와 문서에 스스로 신하라고 쓴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사람을 시켜 확인해보니 과연 '신(臣)'이라는 글자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박팽년

모든 것을 갖춘 천재 - 집대성

박팽년은 세종 시대를 대표하는 학자였습니다. 17세에 생원, 19세에 문과 급제. 일찍부터 집현전에 발탁되어 왕의 총애를 받았습니다.

집현전에는 쟁쟁한 인물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 성삼문: 문체는 호방하나 시에는 재주가 짧음
  • 하위지: 대책과 소장에 능하나 시를 알지 못함
  • 유성원: 타고난 재주는 있으나 견문이 넓지 못함
  • 이개: 맑고 영리하며 시도 뛰어나나...

하지만 모든 사람이 박팽년을 추앙했습니다. 시, 경학, 문장, 필법 - 모든 면에서 가장 탁월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에게 붙은 칭호가 '집대성(集大成)' - 모든 것을 갖추었다는 뜻이었습니다.

고지식한 충성심

박팽년의 성품을 보여주는 일화가 있습니다.

명나라 천순 황제가 오랑캐에게 포로로 잡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날부터 박팽년은 침실에서 자지 않고 밖에서 짚자리를 깔고 잤습니다.

누군가 이유를 묻자 그가 답했습니다.

"천자가 오랑캐 나라에 잡혀 있으니 내가 비록 배신(陪臣, 속국의 신하)이기는 하나, 차마 마음 편하게 자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고지식해 보이지만, 이런 충절심이 있었기에 훗날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었습니다.

문종의 부탁

문종은 병환이 나자 어느 날 밤 집현전 학사들을 불렀습니다. 무릎에 어린 단종을 앉히고 등을 어루만지며 말했습니다.

"내가 이 아이를 경들에게 부탁한다."

문종은 어탑에서 내려와 직접 술을 따라 권했습니다. 성삼문, 박팽년, 신숙주 등은 모두 취해 쓰러졌습니다.

문종은 내시에게 명해 방문 위의 인방나무를 뜯어 들것을 만들게 하고, 학사들을 메고 나가 입직청에 눕혔습니다. 그날 밤 눈이 많이 왔습니다.

다음날 아침 술이 깨니 좋은 향기가 방 안에 가득했고, 온몸에는 담비털 갖옷이 덮여 있었습니다. 문종이 손수 덮어준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눈물을 흘리며 임금의 은혜에 보답하기로 맹세했습니다.

하지만 박팽년과 성삼문은 목숨으로 단종을 지켰지만, 신숙주는 세조의 편이 되었습니다.

세조를 인정하지 않다

1455년 세조가 왕위를 빼앗자, 박팽년은 경회루 연못에 몸을 던져 죽으려 했습니다. 성삼문이 말렸습니다.

"아직 상왕이 계시니, 우리가 살아서 뒷일을 도모해야 합니다."

박팽년은 울분을 참고 따랐습니다.

얼마 후 박팽년은 충청도 관찰사가 되어 지방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조정에 보고할 때 '신(臣)'이라 쓰지 않고 '아무 관직의 아무개'라고만 적었습니다.

세조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놀랍게도 조정에서는 이를 눈치 채지 못했습니다.

단종 복위 모의

1456년, 박팽년은 형조참판으로 중앙에 복귀했습니다. 그리고 성삼문, 유응부, 하위지, 이개 등과 함께 단종 복위를 계획했습니다.

명나라 사신이 오는 날, 창덕궁에서 연회가 열릴 예정이었습니다. 그날 거사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세조가 별운검을 그만두게 했고, 세자도 병으로 나오지 못했습니다. 유응부는 거사를 강행하려 했지만, 박팽년과 성삼문이 말렸습니다.

"만약 세자가 경복궁에서 군사를 일으킨다면 성패를 알 수 없습니다. 다른 날을 기다리는 것이 낫습니다."

거사는 연기되었습니다. 그것이 화근이었습니다.

김질이 자신의 장인 정창손에게 달려가 고발했습니다. 세조는 박팽년 등 모의자들을 모두 잡아들였습니다.

"나는 단종의 신하"

옥중에서 세조가 회유했습니다.

"네가 마음을 바꿔 나를 섬긴다면 목숨은 구할 수 있을 것이다."

박팽년은 아무 말 없이 웃고는 그저 '나으리'라고만 불렀습니다.

세조가 화를 냈습니다.

"네가 일전에 이미 신하라고 한 바 있지 않느냐!"

박팽년이 답했습니다.

"저는 상왕의 신하이지, 어찌 나으리의 신하가 되겠습니까. 충청도 관찰사 1년 동안 장계와 문서에 스스로 신하라고 쓴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확인해보니 과연 '신'이라는 글자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세조의 신하가 아니므로 그는 반역자가 아니었습니다. 죽기 전 그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나를 난신(亂臣)이라 하지 말라."

님 향한 일편단심

옥중에서 세조가 술을 따르며 태종의 '하여가'를 읊었습니다. 박팽년이 답했습니다.

가마귀 눈비 마자 희는 듯 검노매라 야광명월(夜光明月)이 밤인들 어두오랴 님 향한 일편 단심이야 변할 줄이 이시랴

그리고 또 다른 시를 지었습니다.

"금이 아름다운 물에서 난다고 물마다 금이 나는 것은 아니며, 옥이 곤강에서 나온다고 산마다 옥이 나는 것이 아니며, 아무리 여자가 지아비를 따른다 해도 임마다 좇을 수는 없는 것이다."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것은 당연하지만, 분별없이 여러 임금을 섬길 수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세조도 인정했습니다.

"당대의 난신이요, 후세의 충신이다."

여종의 헌신

박팽년이 죽을 때 아들 박순의 아내 이씨가 임신 중이었습니다. 조정은 아들을 낳으면 죽이라고 명령했습니다.

박팽년의 여종도 임신 중이었습니다. 여종이 이씨에게 말했습니다.

"마님께서 딸을 낳으시면 다행이겠으나, 아들을 낳는다면 쇤네가 낳은 아기로 죽음을 대신하겠습니다."

이씨가 아들을 낳았습니다. 딸을 낳은 여종이 아기를 맞바꾸고 박비(朴婢)라고 이름 지어 길렀습니다.

박비가 장성한 후 경상감사로 온 이모부 이극균을 만났습니다. 이극균은 눈물을 흘리며 자수를 권했고, 성종이 특별히 용서해 이름을 박일산으로 고쳤습니다.

실학자 이덕무는 이를 기록하며 썼습니다.

"평소 긴 수염을 늘어뜨리며 대장부로 자처하다가도 어려움에 다다라서는 이 여종만도 못한 자가 그 얼마나 많았던가?"


집대성에서 충신으로

17세에 등과한 천재. 모든 것을 갖춘 학자. 21년의 관료 생활 동안 조선 초기를 대표하는 인물로 풍미했던 박팽년.

하지만 그가 역사에 남긴 가장 큰 유산은 학문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단종의 신하"라는 한마디였습니다.

충청도 관찰사 1년 동안 단 한 번도 '신(臣)'이라고 쓰지 않았던 그 고집. 세조 앞에서 '나으리'라고만 부르며 끝까지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그 당당함.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변할 줄이 이시랴"

가마귀가 눈비를 맞아 희게 보여도 결국은 검은 것처럼, 야광명월이 밤에도 어둡지 않은 것처럼, 그의 충성심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1691년 숙종 때 복관되고, 1758년 영조 때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습니다. 억울한 죽음을 당한 지 235년 만이었습니다.

명분과 의리, 도덕성을 몸소 실천한 최고의 충신. 집대성이라 불린 천재보다 '단종의 신하'로 기억되는 것을 그는 더 영광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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