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 황족에서 대한제국 왕비로"
1919년, 도쿄에서 한 결혼식이 열렸습니다. 신랑은 조선의 왕자 영친왕 이은, 신부는 일본 황족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였습니다. 한복과 기모노가 뒤섞인 이상한 결혼식이었습니다.
신부는 결혼 후 이름을 바꿨습니다. 이방자. 이씨 가문으로 시집온 방자라는 뜻입니다. 일본 황족이 조선 왕실로 시집온 겁니다.
하지만 이건 사랑의 결혼이 아니었습니다. 일제가 강제로 맺어준 정략결혼이었습니다. 조선 왕실을 일본에 묶어두려는 계산이었죠.
이방자는 62년을 한국 남자의 아내로 살았습니다. 광복 후에도, 남편이 죽은 후에도 한국에 남았습니다. "나는 조선 사람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일본 황족이 어떻게 한국인이 됐을까요? 오늘은 이방자 여사의 파란만장한 삶을 따라갑니다.

이방자는 누구인가
이방자는 1901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났습니다. 본명은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입니다.
아버지는 일본 황족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 왕입니다. 천황의 친척이었죠. 어머니도 일본 귀족 출신입니다. 화려한 황족 집안의 딸이었습니다.
어린 시절은 풍요로웠습니다. 도쿄 한복판 대저택에서 자랐습니다. 시녀들이 시중들었고, 최고의 교육을 받았습니다. 프랑스어, 영어, 음악, 미술을 배웠습니다.
명랑한 성격이었다고 합니다. 말괄량이 같았고, 호기심이 많았고, 적극적이었습니다. 황족답지 않게 활발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첫사랑도 있었습니다. 일본 귀족 집안의 청년과 사랑에 빠졌습니다. 결혼을 약속했습니다. 하지만 그 꿈은 산산조각 났습니다.
일제가 다른 신랑을 정해놨습니다. 조선의 왕자 영친왕. 얼굴도 본 적 없는 남자와 결혼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영친왕과의 정략결혼
영친왕 이은은 고종의 아들입니다. 순종의 이복동생이죠.
1907년, 열 살 때 일본으로 끌려갔습니다. 일제가 "유학 보내준다"며 인질로 잡아간 겁니다. 다시는 조선 땅을 밟지 못했습니다.
도쿄에서 자랐습니다. 일본식 교육을 받았고, 일본군 장교가 됐습니다. 일본어가 더 편했고, 조선어는 서툴렀습니다. 정체성이 흔들렸습니다.
첫사랑이 있었습니다. 조선 출신 여성 김옥련을 사랑했습니다. 결혼하고 싶어 했습니다. 하지만 일제가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일본 황족과 결혼하라고 강요했습니다. "조선 왕실과 일본 황실을 결합시켜 내선일체를 실현한다"는 명분이었습니다. 거부할 수 없었습니다.
1919년 1월 25일, 결혼식이 열렸습니다. 도쿄에서였습니다. 조선 왕실 전통도 일본 황실 전통도 아닌, 어정쩡한 의식이었습니다.
이방자는 18세, 영친왕은 22세였습니다. 서로 사랑하지 않았지만 부부가 됐습니다. 일제의 정략결혼 희생자였습니다.
조선 왕비가 된 일본 공주
결혼 후 이방자는 왕세자비가 됐습니다. 순종에게 아들이 없어서 영친왕이 황태자였으니까요.
하지만 실질적 권한은 없었습니다. 일제가 조선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왕실은 허울뿐이었습니다. 궁궐도 없고, 신하도 없고, 권력도 없었습니다.
도쿄의 저택에서 살았습니다. 일본과 조선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지냈습니다. 조선 왕실 행사가 있으면 참석했지만, 대부분은 도쿄에 머물렀습니다.
아들을 낳았습니다. 1921년 장남 이진, 1931년 차남 이구가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남편은 술에 취해 지냈고, 시댁은 냉대했고, 고국 일본은 멀었습니다.
특히 장남 이진이 죽으면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1922년, 돌도 안 된 아기가 의문사했습니다. 독살설이 돌았습니다. "조선 왕실 혈통을 끊으려는 일제의 음모"라는 소문이었죠.
이방자는 슬픔에 빠졌습니다. 남편과의 사이도 멀어졌습니다. 결혼 생활은 불행했습니다. 그래도 참았습니다. 황족으로서의 의무였으니까요.
광복 그리고 추락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했습니다.
조선은 해방됐지만 이방자에겐 재앙이었습니다. 일본 황족 신분을 잃었고, 조선 왕실도 폐지됐습니다. 하루아침에 일반인이 됐습니다.
재산도 잃었습니다. 궁궐과 토지는 정부가 가져갔습니다. 일본에 있던 재산도 몰수됐습니다. 생활이 어려워졌습니다.
남편 영친왕은 뇌졸중으로 쓰러졌습니다. 1945년 광복 직후였습니다. 반신불수가 됐습니다. 이방자가 간병해야 했습니다.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남편의 조국이니까요. 하지만 쉽지 않았습니다. 이승만 정부가 거부했습니다. "일본 황족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었습니다.
1963년에야 입국 허가가 떨어졌습니다. 18년 만에 한국 땅을 밟았습니다. 영친왕은 63세, 이방자는 62세였습니다. 거의 노인이 되어서야 돌아온 겁니다.
창덕궁 낙선재에 정착했습니다. 작은 건물이었지만 한국에 있다는 게 중요했습니다. "이제 집에 왔다"고 말했습니다.
한국인이 되기로 결심하다
한국에 정착한 후 이방자는 변했습니다.
한국어를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조선말이 서툴렀지만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60대 나이에 배우는 건 어려웠지만 노력했습니다.
한복을 입었습니다. 기모노는 벗어던지고 한복만 입었습니다. "나는 조선 사람의 아내"라고 강조했습니다.
사회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장애인 복지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아들 이구가 지적장애가 있어서 더욱 절실했습니다.
1981년 영친왕이 죽었습니다. 80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62년간의 결혼 생활이 끝났습니다. 사랑으로 시작하지 않았지만, 서로 의지하며 살았습니다.
이방자는 남편을 떠나보낸 후에도 한국에 남았습니다. 일본으로 돌아갈 수도 있었지만 거부했습니다. "내 자리는 여기"라고 했습니다.
장애인 학교 명휘원을 설립했습니다. 사재를 털어서 만들었습니다. 장애 아동들을 직접 돌봤습니다. "못난 어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겸손하게 말했습니다.
한국인으로 생을 마감하다
만년의 이방자는 존경받는 노인이었습니다.
한국 국적을 취득했습니다. 1959년 한국인이 됐습니다. 일본 황족에서 대한민국 국민이 된 겁니다.
정부도 인정했습니다. 문화훈장을 받았고, 각종 행사에 초청받았습니다. "일제 피해자"에서 "한국을 사랑한 외국인"으로 인식이 바뀌었습니다.
회고록을 출간했습니다. "세월의 문 너머"라는 책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담담하게 적었습니다. 베스트셀러가 됐습니다.
1989년 4월 30일, 88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창덕궁 낙선재에서였습니다. 남편 곁에 묻혔습니다. 홍릉에 함께 잠들어 있습니다.
장례식에 수많은 사람이 왔습니다. 장애인들이 눈물 흘리며 배웅했습니다. "어머니 같은 분이었다"고 말했습니다.
일본 황실도 조문했습니다. 이방자는 일본에서도 존경받았습니다. "황족의 의무를 다한 여성"이라고 평가받았습니다.
역사적 평가
이방자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요. 의견이 갈립니다.
긍정적 평가는 이렇습니다. "정략결혼의 희생자였지만 한국인으로 살기로 결심했다. 장애인 복지에 헌신했다. 진정으로 한국을 사랑했다."
부정적 평가도 있습니다. "일제 침략의 상징이다. 조선 왕실을 일본에 묶어두려는 도구였다. 광복 후에도 특권을 누렸다."
중립적 평가는 이렇습니다. "시대의 희생자였다. 개인적으로는 선한 사람이었지만 역사적 맥락을 무시할 수 없다."
중요한 건 이방자 본인의 선택입니다. 일본으로 돌아갈 수도 있었지만 한국에 남았습니다. 왕족 신분이 사라진 후에도, 남편이 죽은 후에도 한국에 있었습니다.
장애인 복지는 실질적 기여입니다. 명휘원은 지금도 운영되고 있습니다. 수많은 장애 아동이 도움을 받았습니다.
완벽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특권도 누렸고, 한계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한 사람이었습니다.
영친왕의 비극
이방자를 이해하려면 남편 영친왕을 알아야 합니다.
영친왕은 조선의 마지막 왕자였습니다. 하지만 왕다운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10세에 일본으로 끌려가서 평생 인질이었습니다.
정체성이 혼란스러웠습니다. 조선 사람인지 일본 사람인지 몰랐습니다. 조선어도 서툴렀고, 조선 문화도 낯설었습니다.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하지 못했습니다. 김옥련을 사랑했지만 일제가 막았습니다. 대신 일본 황족과 정략결혼해야 했습니다.
술로 세월을 보냈습니다. 불행했습니다. 왕자로 태어났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조국은 식민지였고, 자신은 허수아비였습니다.
광복 후에도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18년을 일본에 갇혀 지냈습니다. 조국은 자신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비극적 인생이었습니다.
이방자는 이런 남편을 평생 간병했습니다. 사랑으로 시작한 결혼은 아니었지만, 의무를 다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존경받을 만합니다.
정략결혼의 다른 사례들
역사에는 정략결혼이 많습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오스트리아 공주였지만 프랑스 왕비가 됐습니다. 동맹을 위한 정략결혼이었습니다. 결국 프랑스혁명으로 단두대에서 처형됐습니다.
명성황후는 조선 왕비였습니다. 민씨 집안의 정치적 필요로 고종과 결혼했습니다. 처음엔 사랑 없는 결혼이었지만 나중엔 정치적 동지가 됐습니다.
다이애나 왕세자비는 영국 왕실에 시집갔습니다. 찰스 왕세자는 카밀라를 사랑했지만 다이애나와 결혼해야 했습니다. 불행한 결혼이었고 결국 이혼했습니다.
정략결혼은 개인의 행복보다 정치적 목적을 우선합니다. 당사자들은 희생자입니다. 이방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이방자는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이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려고 노력했습니다.
창덕궁 낙선재
이방자가 살았던 낙선재는 지금도 있습니다.
창덕궁 후원에 있는 작은 건물입니다. 조선 후기에 지어졌습니다. 왕실 여성들이 살던 곳입니다.
이방자는 1963년부터 1989년까지 이곳에서 살았습니다. 26년간 낙선재가 집이었습니다. 조촐하지만 편안한 공간이었습니다.
지금은 관람객에게 개방됩니다. 이방자가 사용하던 물건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한복, 사진, 서적들을 볼 수 있습니다.
낙선재를 방문하면 이방자의 삶이 느껴집니다. 화려한 황족에서 소박한 노인으로 살았던 여성의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매년 추모 행사가 열립니다. 장애인 단체와 후손들이 모여서 이방자를 기립니다. "잊지 않겠다"고 다짐합니다.
자주 묻는 질문
이방자는 고종의 며느리인가요?
엄밀히 말하면 아닙니다. 고종의 아들 영친왕과 결혼했으니 고종의 며느리가 맞지만, 결혼할 때는 이미 고종이 돌아가신 후였습니다.
이방자와 영친왕은 사랑했나요?
처음엔 아니었습니다. 정략결혼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세월이 지나며 서로 의지했습니다. 동지 같은 관계였습니다.
자녀는 몇 명인가요?
두 아들을 낳았습니다. 장남 이진은 돌 전에 죽었고, 차남 이구는 지적장애가 있었습니다.
한국 국적을 언제 취득했나요?
1959년입니다. 한국 입국은 1963년이지만 국적은 그전에 취득했습니다.
일본 황실과 관계는 어땠나요?
광복 후 관계가 단절됐다가 나중에 회복됐습니다. 만년에는 양쪽에서 모두 존경받았습니다.
영친왕의 묘는 어디 있나요?
경기도 남양주 홍릉에 있습니다. 이방자도 함께 묻혀 있습니다.
마무리
이방자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습니다.
일본 황족으로 태어나 조선 왕비가 됐고, 광복 후엔 일반인이 됐습니다. 부와 명예를 잃었지만 품위를 잃지 않았습니다.
사랑하지 않는 남자와 결혼했지만 평생 의무를 다했습니다. 남편이 죽은 후에도 한국에 남아서 장애인을 도왔습니다.
일제 침략의 상징이었지만 광복 후 한국인이 되기로 선택했습니다. "나는 조선 사람의 아내"라고 말했습니다.
완벽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특권도 누렸고, 비판도 받았습니다. 하지만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한 사람이었습니다.
역사는 복잡합니다. 선과 악으로 나눌 수 없습니다. 이방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시대의 희생자였지만, 자신의 인생을 의미 있게 만든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삶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명확합니다. 어떤 상황에 태어나든, 어떤 운명을 만나든, 결국 중요한 건 어떻게 사느냐입니다.
이방자는 당당하게 살았고, 의미 있게 살았고, 사랑받으며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성공한 인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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