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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전

안중근 의사 순국, 이토 히로부미 저격 7개월 만에 뤼순 감옥에서

by 정보정보열매 2025. 11.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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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 순국, 이토 히로부미 저격 7개월 만에 뤼순 감옥에서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총성이 울렸습니다. 일본 초대 총리 이토 히로부미가 쓰러졌습니다. 7개월 후, 총을 쏜 남자는 뤼순 감옥에서 교수형에 처해졌습니다. 안중근, 31세 젊은 나이로 조국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의사의 마지막입니다.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의 총성

안중근은 1879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습니다. 부유한 양반 집안이었지만 나라가 망해가는 걸 보며 자랐습니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조선이 일본의 보호국이 되자 분노했습니다. 독립운동에 뛰어들었습니다.

만주와 연해주를 오가며 의병 활동을 했습니다. 동지들과 함께 단지동맹을 맺었습니다. 왼손 약지 첫 마디를 잘라 태극기에 피로 "대한독립"을 쓰며 맹세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 침략의 주범이었습니다. 을사늑약을 강요한 장본인이고, 초대 통감으로서 조선을 식민지로 만든 인물입니다. 안중근은 "이자를 죽여야 조선이 산다"고 생각했습니다.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하얼빈역.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재무대신을 만나기 위해 도착했습니다. 기차에서 내려 환영 인파를 향해 걸었습니다. 그때 안중근이 나타났습니다. 브라우닝 권총을 꺼냈습니다. 3발을 쏘았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쓰러졌습니다. 수행원들도 부상당했습니다. 안중근은 도망가지 않았습니다. "코레아 우라!(대한만세!)"를 외치며 체포당했습니다. 30분 후 이토 히로부미는 죽었습니다. 안중근의 저격은 성공했습니다.

안중근

뤼순 감옥, 재판과 사형

안중근은 중국 뤼순(여순) 감옥에 수감되었습니다. 일본은 신속히 재판을 진행했습니다. "테러리스트를 빨리 처형해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1910년 2월 7일 첫 공판이 열렸습니다.

일본 검사는 안중근을 "살인범"으로 몰았습니다. 하지만 안중근은 당당했습니다. "나는 대한의군 참모중장이다. 이토를 죽인 건 범죄가 아니라 전쟁이다." 15개 죄목을 나열하며 이토가 왜 죽어야 했는지 논리적으로 설명했습니다.

재판정에서 안중근의 태도는 의연했습니다. 변호인도 감탄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결론은 정해져 있었습니다. 일본 법원이 일본 총리를 죽인 조선인을 무죄 선고할 리 없었습니다.

1910년 2월 14일, 사형 선고가 내려졌습니다. 재판은 불과 6일 만에 끝났습니다. 안중근은 상소했지만 기각되었습니다. 집행일은 3월 26일로 정해졌습니다.

1910년 3월 26일, 순국

감옥에서 안중근은 『동양평화론』을 집필했습니다. 죽기 전 자신의 사상을 남기고 싶었습니다. "일본, 중국, 한국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동양"을 꿈꿨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을 적으로만 본 게 아니라 미래의 동반자로 본 겁니다.

유묵도 많이 남겼습니다. "위국헌신 군인본분(나라를 위해 몸 바치는 것이 군인의 본분)", "일일부독서 구중생형극(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는다)" 같은 글씨를 썼습니다. 붓글씨는 힘차고 당당했습니다. 죽음을 앞둔 사람의 글씨가 아니었습니다.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에게 마지막 편지를 썼습니다. "국가를 위해 이 한 몸 바치는 것이 가장 큰 효도입니다. 어머니, 아들을 자랑스러워하십시오." 어머니는 아들의 의거를 자랑스러워하며 "네가 나라를 위해 죽으니 나도 영광이다"라고 답했습니다.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안중근은 교수형에 처해졌습니다. 31세였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고 전해집니다. 시신은 일본이 비밀리에 처리했고, 어디에 묻혔는지 지금도 모릅니다. 유해를 찾으려는 노력이 계속되고 있지만 아직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영웅인가, 테러리스트인가

일본은 안중근을 "테러리스트"라고 불렀습니다. 한국은 "의사"라고 부릅니다. 의사(義士)는 의로운 선비, 즉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영웅을 뜻합니다.

일본 일부에서는 지금도 안중근을 범죄자로 봅니다. "아무리 이유가 있어도 사람을 죽인 건 범죄"라는 주장입니다. 하지만 한국 입장에서는 침략자를 처단한 독립운동가입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전쟁 범죄자였고, 안중근은 정당한 전투 행위를 한 겁니다.

흥미로운 점은 일본인 중에도 안중근을 존경하는 사람이 있다는 겁니다. 뤼순 감옥 간수 치바 도시치는 안중근에게 감복해 평생 그를 추모했습니다. "저런 인물이 적에게 있다니 일본의 불행"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안중근이 남긴 것

안중근의 의거는 세계에 충격을 주었습니다. "조선인이 일본 총리를 죽였다"는 뉴스는 전 세계로 퍼졌습니다. 조선이 독립을 원한다는 메시지가 국제사회에 전달되었습니다.

독립운동가들에게는 큰 힘이 되었습니다. "안중근이 해냈다. 우리도 할 수 있다." 이후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일본 요인들을 저격하거나 암살을 시도했습니다. 윤봉길, 이봉창 등이 안중근의 뒤를 이었습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안중근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습니다. 최고 등급의 훈장입니다. 서울 남산에는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 있고, 해마다 추모 행사가 열립니다.

안중근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返葬)해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115년이 지났지만 유해는 아직 못 찾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정신은 살아있습니다. 31세 청년이 목숨 바쳐 지킨 조국, 대한민국이 지금 여기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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