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려 말 마지막 충신이 다리 위에서 쓰러졌습니다. 쇠몽둥이에 맞아 머리가 깨졌습니다. 피가 다리를 붉게 물들였습니다. 1392년 4월, 선죽교. 정몽주는 새 왕조 건국을 막으려다 암살당했습니다.
고려의 마지막 희망
정몽주는 1337년 경상도 영천에서 태어났습니다. 가난한 집안이었지만 학문이 뛰어났습니다. 1360년 과거에 급제해 관직에 올랐습니다. 성리학의 대가였고, 청렴한 관료였으며, 뛰어난 외교관이었습니다.
공민왕을 보필하며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일본, 명나라와 외교 협상을 이끌었습니다. 특히 왜구 문제를 해결하는 데 공을 세웠습니다. 고려의 신하 중 가장 능력 있고 청렴한 사람으로 인정받았습니다.
1388년, 전환점이 왔습니다.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으로 권력을 잡았습니다. 우왕을 폐위하고 창왕을 세웠지만 실권은 이성계에게 있었습니다. 많은 신하들이 이성계 편으로 돌아섰습니다. "어차피 고려는 끝났다. 새 시대를 받아들이자."
하지만 정몽주는 달랐습니다. "고려를 지킨다." 이성계의 개혁에 협조하면서도 왕조 교체는 막으려 했습니다. 고려를 개혁해서 살리려는 게 정몽주의 목표였습니다.

이방원과의 대결, 하여가와 단심가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은 아버지가 왕이 되길 원했습니다. 하지만 정몽주가 막고 있었습니다. "정몽주만 없으면 새 왕조를 세울 수 있다." 이방원은 정몽주를 설득하기로 했습니다.
어느 날 이방원이 정몽주를 찾아왔습니다. 술을 마시며 시조를 읊었습니다. 유명한 '하여가(何如歌)'입니다.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져 백년까지 누리리라"
의미는 명확했습니다. "이렇든 저렇든 상관없지 않소? 만수산 칡넝쿨이 서로 얽히듯, 우리도 손잡고 함께 새 시대를 만듭시다. 백년을 함께 누립시다." 조선 건국에 동참하라는 회유였습니다.
정몽주는 잠시 생각하더니 답시조를 지었습니다. '단심가(丹心歌)'입니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내가 죽고 또 죽어 백 번 죽어도, 뼈가 가루가 되고 넋마저 사라져도, 임금(고려 왕)을 향한 한결같은 마음은 변할 수 없습니다." 거절이었습니다. 명확하고 단호한 거절이었습니다.
이방원은 설득이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정몽주는 죽을 때까지 고려를 지킬 것이었습니다.
1392년 4월 4일, 선죽교의 피
이방원은 결심했습니다. 정몽주를 제거하기로. 아버지 이성계도 알고 있었지만 막지 않았습니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1392년 4월 4일 저녁, 정몽주는 궁궐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개경(개성)의 선죽교를 지날 때였습니다. 어둠 속에서 여러 명이 튀어나왔습니다. 이방원이 보낸 자객들이었습니다. 조영규, 이숙번 등이었습니다.
쇠몽둥이가 내려쳤습니다. 정몽주는 피할 틈도 없었습니다. 머리를 맞았습니다. 피가 쏟아졌습니다. 다시 내려쳤습니다. 정몽주는 다리 위에 쓰러졌습니다. 56세였습니다.
피가 돌다리를 붉게 물들였습니다. 600년이 지난 지금도 선죽교 돌에는 검붉은 얼룩이 남아있다고 전해집니다. 실제로는 세월이 지나며 생긴 이끼 자국이지만, 사람들은 정몽주의 피라고 믿습니다.
조선 건국, 정몽주 없는 세상
정몽주가 죽고 4개월 후, 1392년 7월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했습니다. 더 이상 막을 사람이 없었습니다. 고려 472년 역사는 끝났고, 조선이 시작되었습니다.
조선 건국 세력은 정몽주를 역적으로 규정했습니다. "고려를 지키려 한 것은 시대의 흐름을 거스른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백성들은 달리 생각했습니다. "정몽주는 충신이다. 끝까지 임금을 배신하지 않았다."
정몽주의 아들은 조선에서 벼슬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은둔했습니다. 후손들도 대대로 정몽주를 자랑스러워했습니다.
사후 600년, 재평가
조선 초기에는 정몽주를 공식적으로 기리지 못했습니다. 조선 건국을 반대한 사람을 어떻게 떠받들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평가가 바뀌었습니다.
1517년 중종 때, 정몽주가 복권되었습니다. 문묘에 배향되어 유교 성현으로 모셔졌습니다. 조선 왕조도 인정한 겁니다. "정몽주의 충절은 존경받아야 한다."
묘정비문에는 이렇게 적혀있습니다. "나라가 망해도 신하의 절개는 죽지 않는다(國亡節不死)." 조선 건국 세력조차 정몽주의 충성심만큼은 부정할 수 없었던 겁니다.
영남 지역에는 정몽주를 기리는 서원이 많습니다. 특히 경북 영천의 임고서원은 정몽주의 고향에 세워진 서원입니다. 해마다 제사를 지냅니다.
충신인가, 시대착오인가
정몽주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는 논쟁거리입니다.
충신론: 끝까지 주군을 배신하지 않았습니다. 이익을 좇아 편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죽음을 무릅쓰고 신념을 지켰습니다. 조선 유학자들이 정몽주를 존경한 이유입니다.
시대착오론: 고려는 이미 망한 왕조였습니다. 권문세족의 부패, 왕실의 무능으로 백성들은 고통받았습니다. 새 왕조가 필요한 시점이었는데 정몽주는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했다는 비판입니다.
개혁 실패론: 정몽주는 고려를 개혁해서 살리려 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늦었습니다. 왕조를 바꾸지 않고는 개혁이 불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이상주의자였지만 현실주의자는 아니었다는 평가입니다.
정답은 없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정몽주는 자신의 신념을 위해 목숨을 바쳤습니다. 권력도, 부도, 생명도 포기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존경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선죽교는 지금도 북한 개성에 남아있습니다. 남북이 갈라져 직접 가볼 수는 없지만, 정몽주의 정신은 한반도 전역에 살아있습니다. 600년이 지나도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기억합니다. "정몽주, 고려의 마지막 충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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