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다를 건너온 모래(沙)를 걸러 금(金)을 얻었다"
1593년, 선조는 이렇게 말하며 한 일본 장수에게 김해 김씨 성을 하사했습니다. 임진왜란 때 적군 선봉장으로 조선에 왔다가 귀화한 인물, 김충선(1571-1642)의 이야기입니다.

예의지국 조선을 동경한 일본 무장
원래 이름은 사야가(沙也加). 그는 1592년 가토 기요마사 휘하의 선봉장으로 3,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조선에 왔습니다. 그런데 불과 며칠 만에 조선에 귀화를 결정했습니다.
그가 남긴 자전적 가사 <모하당술회가>를 보면 그 이유가 명확합니다.
"넓디넓은 천하에서 어찌하여 오랑캐 문화를 가진 일본에 태어났는가... 예의지국 조선을 한번 구경하고자 선봉장이 되어 왔으나, 맹세코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을 결단했다."
일곱 형제와 친척들을 두고 떠나는 아픔이 있었지만, 그는 조선의 예의와 문물을 사모하는 마음을 꺾지 않았습니다. 자손들을 예의의 나라 사람으로 만들고 싶었던 것입니다.
'사야가'에서 '김충선'으로
경상도 병마절도사 박진에게 귀순한 후, 사야가는 경주와 울산 등지에서 일본군을 막아내는 데 큰 공을 세웠습니다. 원래 적진의 선봉장이었기에 적의 동향을 누구보다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1593년, 도원수 권율과 어사 한준겸의 주청으로 그는 성명을 하사받았습니다. 선조는 "바다를 건너온 모래를 걸러 금을 얻었다"며 김해 김씨로 사성했고, 이름은 '충성스럽고 착하다'는 의미의 **'충선(忠善)'**이 되었습니다.
김충선은 이 은혜에 감격하여 말했습니다.
"자헌계 사성명이 일시에 특강하니, 이 몸 가루 되더라도 이 은혜 갚을 수 없도다."
조총 기술을 전수하다
김충선은 조선의 무기가 정밀하지 못해 적을 격파하기 어렵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알고 있던 조총과 화포 등 일본의 무기 제조 기술을 널리 전수했습니다.
이순신 장군에게 보낸 답서에도 조총과 화포, 화약 제조법에 관한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조선의 전력을 강화하기 위한 그의 노력은 임진왜란 승리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72세까지 나라를 지키다
김충선의 충성은 임진왜란 이후에도 계속되었습니다.
- 1597년 정유재란: 의령 전투에서 왜적을 무찌름
- 1624년 이괄의 난: 54세의 나이로 반란군 부장을 참수
- 1627년 정묘호란: 자원군으로 참전
- 1636년 병자호란: 66세의 노구로 광주 쌍령에서 청나라 병사를 격퇴
22세에 조선에 귀화한 이후 66세까지, 그는 나라에 변고가 생길 때마다 자원하여 전쟁터에 나갔습니다.
후손에게 남긴 가르침
1600년 인동 장씨와 혼인한 김충선은 자손들에게 이렇게 당부했습니다.
"영달을 탐하지 말고 효제, 충신, 예의, 염치를 가풍으로 삼아 자자손손에게 전할 것"
1642년 7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김충선. 그의 위패를 모신 녹동서원은 지금도 대구 달성군에 남아 있습니다.
적국의 선봉장에서 조선의 충신으로
김충선은 조국을 버리고 적국에 귀화한 배신자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진정한 예의와 문화를 찾아 스스로 선택한 삶을 살았던 인물입니다.
"바다를 건너온 모래에서 금을 얻었다"는 선조의 말처럼, 김충선은 조선에 귀화한 수많은 '항왜' 중에서도 가장 빛나는 존재였습니다.
66세까지 전쟁터를 누비며 나라를 지켰고, 조총 기술을 전수하여 조선의 국방력을 높였으며, 자손들에게는 충신과 예의를 강조했던 그의 삶. 진정한 애국자란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주는 역사의 교훈입니다.
귀화 400년이 지난 지금도, 김충선의 후손들은 대한민국에서 그가 강조했던 가치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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