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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전

42세 유생에서 영의정까지, 강직한 대신 이시백

by 정보정보열매 2025. 10.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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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세 유생에서 영의정까지, 강직한 대신 이시백

 

"내가 이 사람을 팔다리처럼 여기니 너도 뒷날 그렇게 대접하라"

1649년, 인조는 세자에게 이렇게 당부하며 한 신하를 가리켰습니다. 바로 이시백(1581-1660). 인조반정의 주역 이귀의 맏아들이자, 두 차례 호란을 수습한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충신입니다.

이시백

42세까지 과거 없이 살다

이시백은 어려서부터 뛰어난 인물이었습니다. 우계 성혼은 8세의 그를 보고 "이 아이는 훗날 측량할 수 없을 만큼 성공할 것"이라 예측했고, 백사 이항복을 스승으로 모셨습니다. 조익, 장유, 최명길과 함께 '사우(四友)'로 불릴 만큼 뛰어난 인물들과 교유했죠.

그런데 놀랍게도 이시백은 42세까지 과거를 보지 않았습니다. 광해군 시대, 그의 집안은 정치적 이유로 침체되어 있었습니다. 1616년 아버지 이귀가 옥사에 연루되어 유배를 가자, 35세의 이시백은 평생 은거할 것을 결심했습니다.

제갈량을 꿈꾸다

유배지에서 아버지 이귀가 시를 지었습니다.

"제갈량이 융중에서 늙는다고 비웃지 마시오, 조용히 세 번 찾아올 날 어찌 없으리"

이시백이 화답했습니다.

"깊은 못에 숨어서도 자주 고개 돌리며, 부질없이 융중에서 꿈 깰 때 생각하네"

은거 중인 제갈량을 자신들에 빗댄 이 시를 본 이귀는 "부자간의 지기(知己)"라며 크게 기뻐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623년, 인조반정이 성공했습니다.

42세의 중년 유생은 하루아침에 정사 2등공신이 되었고, 연양군에 책봉되었습니다. 인생의 완전한 역전이었습니다.

두 차례 호란을 지키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났을 때, 이시백은 수원 방어사로서 가장 먼저 동작나루에 도착해 인조를 강화도로 피난시키는 데 공을 세웠습니다. 다른 군사들은 정오쯤 도착했지만, 그는 날이 새기도 전에 왔습니다.

1636년 병자호란 직전, 이시백은 남한산성 수어사로 임명되었습니다. 7월에 야간훈련을 실시하며 인조에게 보고했습니다.

"참으로 천연의 요새지만 군사 5만 명이 필요하고, 군량이 부족한 것이 걱정입니다."

그의 판단은 정확했습니다. 호란이 일어나 남한산성에서 농성할 때, 조선은 결국 군량 부족으로 항복해야 했습니다.

원칙을 지킨 강직함

1645년, 소현세자가 급서했습니다. 인조는 원손이 아닌 봉림대군(훗날의 효종)을 후사로 삼으려 했고, 국왕의 강압에 모든 대신이 찬성했습니다.

하지만 64세의 이시백만은 달랐습니다.

"원칙을 지켜야 합니다. 원손을 그대로 세워야 합니다."

사람들은 그의 안위를 걱정했지만, 즉위한 효종은 오히려 그를 더욱 신임했습니다. 원칙을 지킨 강직함이 인정받은 것입니다.

청렴한 삶

어느 날 인조가 이시백의 집에 있는 희귀한 중국 꽃을 달라고 사람을 보냈습니다. 이시백은 꽃을 뿌리째 짓뭉개버렸습니다.

"나라의 형세가 조석을 보전할 수 없는데, 현자는 찾지 않고 꽃을 찾습니까? 나는 이 꽃으로 아첨해 나라가 망하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습니다."

이 말을 전해들은 인조의 신임은 더욱 두터워졌습니다.

1652년 사은사로 평양을 지날 때의 일입니다. 화려하게 치장한 기생들이 도열하자, 이시백은 감사를 불러 꾸짖었습니다.

"병자호란 이후 백성들이 얼마나 어려운데 이런 일을 합니까?"

즉시 기생들을 물리친 그가 산해관에 들어가자, 중국 사람들은 "조선의 어진 정승이 온다"며 칭송했습니다.

일곱 번의 판서, 그리고 영의정

이시백은 병조판서를 두 번, 형조·공조·이조판서를 역임하며 총 일곱 번이나 판서를 지냈습니다. 1655년에는 영의정에 올랐습니다.

그는 호남 대동법 실시에 기여했고, 정초청(훗날 금위영으로 발전)을 신설해 국방을 강화했습니다. 조정을 대표해 청나라에도 네 번이나 사신으로 다녀왔습니다.

가난한 선비집 같았던 영의정

1660년 5월, 79세의 이시백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운명할 때 그는 나라 일만 당부했고, 집안 문제는 언급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가 죽자 시장 골목의 백성들까지 통곡했습니다. 일곱 번이나 판서를 지내고 영의정까지 올랐지만, 그의 집은 가난한 선비집 같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실록의 마지막 기록입니다.

"38년 동안 조정에서 벼슬하면서 청렴하고 삼가고 공손하고 검소한 것이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원칙과 청렴으로 시대를 지킨 대신

42세까지 아무 벼슬 없이 지내다가 인조반정으로 인생이 역전된 이시백. 하지만 그는 권력에 취하지 않았습니다.

원칙을 지키고, 청렴하게 살았으며, 나라가 어려울 때마다 앞장섰습니다. 꽃 대신 현자를 구하라 외쳤고, 화려한 연회 대신 백성의 고통을 먼저 생각했습니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라는 격변의 시대. 그 어려운 시기를 강직함과 청렴함으로 지탱한 대신. 이것이 이시백이 우리에게 남긴 유산입니다.

참고: 이시백은 소설 [박씨부인전]의 주인공으로 등장하지만, 실제 부인은 박씨가 아니라 윤씨와 황씨였습니다. 소설은 허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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