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훗날 반드시 이론이 있을 것이다"
1618년 8월 24일, 창덕궁 인정전 앞에서 살벌한 국문이 열렸습니다. 주인공은 허균(許筠, 1569~1618). 역모 혐의를 받던 그는 이날 국문 끝에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의 정치적 동지였던 기자헌은 "형장도 가하지 않고, 사형 문서도 받지 않은 채 단지 진술만으로 사형에 처한 예는 없었다. 훗날 반드시 이론이 있을 것"이라며 의혹을 제기했습니다.
과연 허균은 어떤 인물이었을까요?

명가의 후예, 파격의 아이콘
허균이 속한 집안은 당대 최고 명문이었습니다. 부친 허엽은 동인의 영수였고, 이복형 허성은 이조·병조판서를 역임했으며, 동복형 허봉은 수준급 학자였습니다. 여류문인 허난설헌이 그의 누이였죠. "허씨가 당파의 가문 중 가장 치성하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허균의 삶은 명가의 기대와 달랐습니다.
그가 파격적이었던 이유들:
- 불교에 호의적이어서 여러 승려와 교류
- 신분의 한계로 불운한 서자들과 친밀한 관계 유지
- 기생과 정신적 교감 (부안 기생 매창의 죽음에 애도시를 씀)
그는 "남녀간의 정욕은 하늘이 준 것이며, 남녀유별은 성인의 가르침이다. 성인은 하늘보다 한 등급 아래다. 성인을 따르느라 하늘을 어길 수는 없다"고 말할 정도로 당시로서는 충격적인 사고를 가졌습니다.
정치적 무리수와 파멸
1594년 과거 급제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지만, 기생을 데리고 온다거나 불교를 숭상한다는 이유로 여러 차례 파직과 복직을 반복했습니다.
결정적 전환점은 1613년 '칠서지옥(七庶之獄)'이었습니다. 7명의 서자가 주도한 변란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허균의 제자도 연루되었죠. 화를 피하기 위해 그는 같은 글방 동문이었던 대북세력 실력자 이이첨에게 의탁했습니다.
그리고 정치적 무리수를 두었습니다. 인목대비의 폐비를 주장하고 나선 것입니다. 심지어 영창대군이 선조의 아들이 아니라 민가 사람의 아이라고까지 했습니다. 같은 북인 정온, 남인 이원익, 정치적 동지 기자헌까지 반대했던 사안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여론의 배격을 받았고, 기자헌의 아들 기준격으로부터 역모 혐의로 고발되어 죽음에 이르렀습니다. [광해군일기]는 이것이 이이첨과 한찬남이 허균을 제거하기 위해 모의한 것이라고 기록했습니다.
『홍길동전』과 호민론
허균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최초의 한글 소설 『홍길동전』입니다(최근 저자 논란이 있긴 합니다). 이 작품은 그의 사상을 응축한 결정판으로 평가됩니다.
그의 저서 『성소부부고』에는 그의 사고를 담은 여러 글이 있습니다. 특히 '유재론(遺才論)'과 '호민론(豪民論)'이 유명합니다.
『유재론』에서 그는 서얼이라서, 어머니가 재혼했다는 이유로 인재를 버리는 것을 개탄했습니다. "하늘이 인재를 태어나게 함은 한 시대의 쓰임을 위한 것이므로, 인재를 버리는 것은 하늘을 거역하는 것"이라고 했죠.
『호민론』에서는 백성을 세 부류로 나눴습니다:
- 항민(恒民): 법이나 지키며 윗사람에게 부림당하는 사람들 → 두렵지 않다
- 원민(怨民): 착취당해 탄식하며 윗사람을 탓하는 사람들 → 두렵지 않다
- 호민(豪民): 자취를 숨기고 딴 마음을 품고, 시대 변고 시 소원을 실현하려는 사람들 → 몹시 두려워해야 할 사람
"천하의 두려워할 바는 백성이다"라는 전제 아래, 위정자들에게 백성을 두려워하라고 경고한 것입니다.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
허균의 호 중 하나가 교산(蛟山)입니다. 교(蛟)는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를 뜻합니다. 강릉 사천 앞 야트막한 산 이름에서 따온 호였습니다.
명문가 출신이었지만 신분제를 비판했고, 불교와 서얼을 포용했으며, 백성의 힘을 예견했던 허균. 그는 분명 시대의 이단아였습니다. 하지만 정치적 선택의 실패로 역모 혐의를 받고 49세에 생을 마감했습니다.
『홍길동전』의 이상향처럼 꿈을 꾸었는지 모르지만, 끝내 용이 되지 못하고 이무기로 남은 것은 아닐까요? 그럼에도 그가 남긴 사상은 조선 사회의 모순을 꿰뚫는 날카로운 비판으로 지금도 의미를 갖습니다.
참고: 허균의 부친 허엽의 호 '초당(草堂)'은 강릉 초당두부의 그 초당입니다. 처가가 강릉에 있던 데서 유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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