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야심한 밤 집현전에 불이 켜져 있길래 세종대왕이 들어가 보니, 어느 신하가 책을 읽다가 그대로 책상에 엎어져 잠들어 있었습니다. 세종은 자신이 입고 있던 용포를 벗어 그 신하에게 조용히 덮어주었다고 합니다. 이 유명한 일화의 주인공이 바로 신숙주입니다. 세종은 "당태종에게는 위징이 있고, 나에게는 숙주가 있다"고 할 정도로 신숙주를 신임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신숙주를 세종의 총애를 받은 충신이 아니라 단종을 배신한 변절자로 기억합니다. 과연 신숙주는 어떤 인물이었을까요?
▣ 집현전의 수재, 세종의 총애를 받다
신숙주는 1417년에 태어나 1439년 23세의 나이로 과거에 급제했습니다. 당시 과거 시험의 경쟁률이 약 2,000대 1이었고 급제자의 평균 나이가 35세 전후였던 것을 감안하면, 신숙주가 얼마나 뛰어난 인재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1441년 집현전 부수찬이 된 그는 장서각에 있는 책 읽기를 좋아해 자청하여 숙직을 맡는 일이 많았습니다.
훈민정음을 창제할 때는 성삼문과 함께 유배 중이던 명나라 한림학사 황찬의 도움을 얻으러 요동을 열세 차례나 왕래했습니다. 황찬은 신숙주의 뛰어난 이해력에 감탄했다고 전해집니다. 세종 24년에는 박팽년, 성삼문, 하위지, 이석형 등과 함께 삼각산 진관사에서 사가독서를 했습니다. 당시 신숙주는 26세였고 성삼문은 25세였습니다. 조용한 산사에서 몇 달을 함께 지내며 학문을 토론하던 이들은 깊은 우정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 수양대군과의 특별한 인연
1452년 수양대군이 사은사로 명나라에 갈 때 신숙주는 서장관으로 추천되었고, 이때부터 수양대군과의 유대가 특별하게 맺어졌습니다. 신숙주와 수양대군은 명나라 사신으로 중국에 다녀오기도 했고 종종 만나 시국이나 외교 문제를 상의하곤 했습니다. 성삼문이 수양대군을 원수처럼 생각했던 것과 달리, 신숙주는 그와 친분이 두터웠습니다.
1453년 계유정난이 일어났습니다. 수양대군은 김종서 등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했으며, 2년 후인 1455년에는 어린 조카 단종에게서 왕위를 빼앗아 세조로 즉위했습니다. 계유정난 당시 신숙주의 위치는 박팽년, 성삼문과 함께 언급할 정도로 큰 두각을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세조가 쿠데타 전에는 신숙주에게 동참을 제안하지 않았고, 쿠데타가 성공한 후에 회유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계유정난 이후로는 완전히 수양대군의 오른팔로 활동하면서 단종의 양위를 주도했고, 세조는 그를 좌익공신 1등공신으로 삼았습니다.
▣ 운명을 가른 1456년 6월
1456년 1월, 신숙주의 부인 윤씨가 막내를 낳다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습니다. 당시 신숙주는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아직 돌아오지 못해 부인의 임종을 지켜보지 못했습니다. 40세에 상처한 신숙주는 부인을 못내 잊지 못하고 8남 1녀를 키우면서 재혼하지 않았습니다. 그해 6월, 그의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세종대왕은 죽으면서 집현전 학사들을 불러 어린 손자 홍위(단종)를 부탁한다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이 유언을 받은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는 단종이 강제로 폐위되자 세조를 제거하고 단종을 복위시키기로 결심했습니다. 이들은 신숙주에게도 거사 동참을 요청했으나 그는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신숙주는 성삼문 등의 단종 복위 운동이 명분상으로는 옳지만, 인력과 장비 부족으로 실현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는 한명회나 권람 등에게 이 사실을 고변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김질이 자신의 장인 정창손의 설득으로 거사를 폭로하면서 모든 것이 드러났습니다. 김질의 밀고로 거사가 탄로나자 사육신은 혹독한 고문 끝에 일가족과 함께 새남터에서 참수형으로 처형당했습니다.
▶ "너는 두 임금을 섬기는가!"
성삼문은 고문을 받는 중에도 세조를 꾸짖었습니다. "세종대왕께서 세상을 떠나실 때 우리 모두에게 원손을 부탁하셨소. 그 말씀은 지금도 귀에 쟁쟁하거늘 너 혼자만은 잊어버렸단 말이냐? 네가 이렇게까지 못된 줄은 몰랐다." 신숙주는 세조 옆에서 그들의 고문 장면을 지켜보았으며 성삼문의 질타에도 묵묵히 자리를 지켰습니다.
신숙주는 그들에게 "그들은 단종의 충신이지만 금상(세조)의 충신은 아니다"라고 항변했습니다. 사형장으로 끌려가던 성삼문은 좌우를 돌아보며 말했습니다. "너희들은 현명한 임금을 도와 태평성대를 이룩해라. 나는 돌아가 지하에서 옛 임금을 뵈오리라."
사육신의 처형 직후 신숙주는 단종 복위 운동이 다시 발생하자 탄핵 상소를 올려 노산군(단종)과 금성대군의 처형을 강력히 주장하여 세상을 놀라게 했으며, 그는 이를 관철시켰습니다. 옛 친구들이 목숨을 걸고 지키려던 어린 임금의 사형을 주장한 것입니다.
▣ 승승장구한 출세, 그리고 변절자라는 낙인
세조의 집권 이후 신숙주는 병조판서, 판중추원사 등 고위직을 역임했고, 1457년 겨우 41세의 나이로 의정부 우의정에 올라 정승이 되었습니다. 1461년부터 1464년, 1471년부터 1475년까지 의정부 영의정을 역임했습니다. 문신의 신분이었으나 병력을 이끌고 여진족과 왜구 토벌에 여러 번 출정했으며, 외교관으로도 큰 활약을 했습니다.
신숙주는 『동국통감』 편찬, 『국조오례의』 완성, 『해동제국기』 저술 등의 업적을 남겼습니다. 조선의 대표적 법전인 『경국대전』의 편찬에도 관여했고, 명나라, 일본, 여진과의 외교에서도 많은 공을 세웠습니다. 세조는 신숙주가 정승이 된 후에도 집현전 학사 시절의 호칭인 '신 수찬'이나 명나라 사신으로 갔을 때의 호칭인 '신 서장'이라고 부르기를 좋아했습니다.
1475년 신숙주는 일생을 마쳤고, 세조는 그에게 문충이라는 시호를 내렸습니다. 그는 여섯 명의 왕을 섬기며 영의정까지 지내는 등 부귀영화를 누렸으며, 그의 형제와 아들, 손자 역시 대대로 고관대작을 역임하며 가문의 영광을 이어갔습니다.
사육신 사건으로 인하여 신숙주와 더불어 집현전에서 교유했던 학사들 상당수가 처형당하거나 옥중에서 사망했습니다. 이들의 죽음은 신숙주의 승승장구와 비견되어 시간이 흐를수록 충신으로 부각되었고, 그 반대로 신숙주를 배신자, 변절자의 이미지로 기억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 충신인가, 변절자인가
신숙주에 대한 당대의 평은 "대의를 따르는 과단성 있는 인물"이었으나, 후대에는 사육신과 생육신을 추앙하는 도학적 분위기에서 기회에 능한 변절자로 평가되었습니다. 15세기까지 사림들은 신숙주를 그리 나쁘게만 보지 않았고, 김종직도 신숙주의 학문적 역량을 높이 평가해 문집에 서문을 쓰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후 사림이 득세하면서 사육신이 복권되는 과정에서 신숙주의 평가는 점점 낮아졌습니다.
빨리 상하는 숙주나물의 이름이 신숙주가 단종을 배신하고 변절했다고 놀리는 말에서 시작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아내 윤씨가 남편의 변절이 부끄러워 자살했다는 이야기는 1923년 박종화의 소설과 1928년 이광수의 '단종애사'에 나오는 내용으로, 실제로는 윤씨가 사육신 사건 몇 달 전에 사망했으니 지어낸 이야기입니다.
신숙주는 절개를 지키다 죽은 성삼문과 달리 현실을 선택했고, 그 대가로 영화를 누렸지만 역사에는 변절자로 남았습니다. 젊은 시절 함께 배우고 일하며 성장했던 두 친구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각기 다른 선택으로 완전히 다른 운명을 맞이했고, 이로 인해 극과 극의 평가를 받게 되었습니다. 출세와 절개 사이에서 한 사람은 목숨을 택했고, 한 사람은 권력을 택했습니다. 그리고 역사는 전자를 충신으로, 후자를 배신자로 기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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