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시대에는 엄격한 신분제도가 있었습니다. 양반, 중인, 상민, 천민으로 나뉘었고, 그중에서도 가장 낮은 신분이 바로 노비였습니다. 한번 노비로 태어나면 평생 노비로 살아야 했고, 자손 대대로 그 신분이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이 철옹성 같은 신분제를 뛰어넘어 정3품 대호군이라는 높은 관직에 오른 인물이 있습니다. 조선 세종 때 노비 신분을 벗고 발탁되어 혼천의와 자격루를 발명한 과학기술자 장영실입니다. 그는 어떻게 노비에서 벗어나 조선 최고의 과학자가 될 수 있었을까요?
▣ 기생의 아들로 태어난 천재 장인
세종실록에 따르면 장영실의 아버지는 원나라 유민으로 소주·항주 출신이고, 어머니는 조선 동래현 기생이었습니다. 조선의 신분제도상 기생에게서 태어난 아이는 부친의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천인 계급에 속했습니다. 아버지가 원나라 출신의 양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머니가 기생이었기 때문에 장영실은 동래현의 관노가 되어야 했습니다.
손재주가 뛰어났던 장영실은 어린 나이에 관기였던 어머니 대신 동래현의 노비가 되었습니다. 동래현 병기 창고에서 일하면서 낡고 못 쓰게 된 병장기를 손질하면서 천재적인 자질을 발휘했습니다. 천문기구 제작은 물론 철을 만드는 제련과 농기구, 무기 등의 수리에 뛰어났다고 전해집니다.
1400년 태종이 지방의 뛰어난 인재들을 발굴해 중용시키기 위해 실시한 '도천법'에 따라 장영실은 미천한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한양으로 입성하게 되었습니다. 관상감 출신의 남양 부사 윤사웅의 추천으로 한양에 올라와 궁중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장영실의 재주를 눈여겨보고 있던 세종은 국왕이 되자 그를 중국에 파견시켰습니다.
▶ 세종의 파격적인 결단
1421년 세종은 장영실을 윤사웅, 최천구 등과 함께 중국에 파견하여 천문기기의 모양을 배워오도록 했습니다. 당시로서는 노비를 외국에 파견한다는 것 자체가 파격적인 일이었습니다. 중국에서 1년간 머무르다 돌아온 장영실은 1423년 상의원 별좌로 임명되었습니다. 상의원은 임금의 의복과 궁중에서 사용하는 일용품 및 금은보화 등을 관리하는 관청이었으며, 별좌는 종5품의 문반직이었습니다.
장영실은 많은 논란을 뒤로하고 세종의 인정을 받아 1423년 노비의 신분에서 벗어나 대궐의 일용품을 관리하는 정5품 벼슬인 상의원 별좌라는 벼슬에 올랐습니다. 이것은 조선 역사상 전례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때 관노의 신분에서 벗어난 그는 이후 승승장구했습니다.
1년 만인 1424년 5월 정5품인 행사직으로 승진되었습니다. 행사직이란 벼슬은 실무는 없지만 월급을 받는 녹관으로서 군부에 속한 직책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 조선의 하늘을 읽는 물시계, 자격루
세종은 "백성들이 편안하게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하려면 하늘을 잘 읽어야 하는 법이다. 백성들의 생활에 도움을 주는 기구들을 만들어야 하느니라"고 말했습니다. 조선에서는 왕의 큰 임무 중 하나가 하늘을 잘 살피는 것이었습니다. 농경 사회에서는 씨 뿌리고 수확하는 시기와 날씨의 변화를 아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1432년부터 1438년까지 세종의 명에 따라 이천의 책임 하에 천문 기구 제작 프로젝트에 참여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수력에 의해 자동으로 작동되는 물시계인 자격루를 1434년에 만들어 세종으로부터 총애를 받았습니다.
자격루는 조선 세종 때의 물시계로, 자동으로 시간마다 종이 울리도록 한 국가 표준시계입니다. 항아리에서 일정한 양의 물을 원통으로 흘려보내면 원통 안의 막대가 올라가 구슬을 건드리고, 굴러간 구슬이 인형들을 건드려 종과 징, 북을 치게 해 시각을 알리는 물시계였습니다.
세종실록에는 "행사직 장영실은 그 아비가 본래 원나라의 소주·항주 사람이고, 어미는 기생이었는데, 공교한 솜씨가 보통 사람에 뛰어나므로 태종께서 보호하시었고, 나도 역시 이를 아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 "노비라도 능력 있으면 정3품 줄 수 있다"
영실이 자격루 제작에 성공하자 세종은 공로를 치하하고자 정4품 벼슬인 호군의 관직을 내려주려 했는데 이때도 논란이 많았습니다. 노비 출신에게 정4품을 준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황희가 "김인이라는 자가 평양의 관노였으나 날래고 용맹하여 태종께서 호군을 특별히 제수하신 적이 있으니, 유독 장영실만 안 된다고 할 수 없다"라고 하자 세종은 장영실에게 호군이라는 관직을 내렸습니다. 1433년에는 정4품 벼슬인 '호군'에 올랐으며, 1438년에는 종3품인 '대호군'에 올랐습니다.
노비에서 종3품까지, 이것은 조선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었습니다. 장영실은 미천한 신분에서 승진을 거듭하여 정3품관 대호군에서 정3품관 상호군이라는 관직까지 이르렀습니다.
▣ 백성을 위한 발명품들
장영실의 업적은 자격루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해시계인 앙부일구도 만들었습니다. 앙부일구는 한자를 모르는 조선의 백성들이 시간을 알아볼 수 있는 새 시대를 연 획기적인 발명품이었습니다. 하늘을 향해 있는 가마솥 모양의 해시계라 '앙부일구'라는 이름이 붙었고, 종묘 남쪽 거리와 혜정교에 설치해 일반 백성들이 시각을 알 수 있도록 했습니다.
측우기, 천문관측기 혼천의, 천문관측을 위한 대간의, 휴대용 해시계 현주일구, 천평일구, 현재의 나침판인 정남일구 등을 개발하는 업적을 남겼습니다. 1434년에는 이천이 총책임자였던, 구리로 만든 금속활자인 갑인자의 주조에도 참여했습니다.
세종시대 발명된 과학창작물들의 많은 것이 장영실에 의해 만들어졌으나, 실제 그런 창작물들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제작을 기획하고, 제작 원리 및 방법 등에 이르는 온갖 아이디어는 세종의 것이었습니다. 세종은 "이제 자격궁루를 만들었는데 비록 나의 가르침을 받아서 하였지마는, 만약 이 사람이 아니더라면 암만해도 만들어 내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세종이 기획하고, 장영실이 제작하는 완벽한 듀오였습니다. 세종은 아이디어를, 장영실은 그것을 현실로 만드는 기술을 제공했습니다.
▶ 갑작스러운 추락
하지만 장영실의 영광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1442년에 장영실은 임금이 탈 가마를 만드는 일에 참여했습니다. 장영실의 임무는 제작 감독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가마는 세종이 타기도 전에 부서져 버렸습니다.
사헌부에서는 왕이 다친 것은 아니었으나 안위와 관련된 일이므로 장영실을 비롯한 참여자들은 불경죄로 관직에서 파면되는 것은 물론이고 아울러 곤장까지 맞아야 한다고 했으며, 그것이 과학자 장영실의 마지막 기록이었습니다. 1442년에 대호군 자리에서 파면된 이후로 그의 만년의 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장영실이라는 이름은 이렇게 역사에서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그가 남긴 업적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장영실은 이순지와 이천 등과 함께 조선 전기 당대의 훌륭한 최고의 과학자로 지금도 평가되고 있습니다. 노비이면서 뛰어난 과학기술자였던 장영실을 발탁한 세종대왕, 그의 의지를 실현시킨 장영실, 이 두 인물이야말로 우리 역사상 가장 찬란했던 과학기술문화를 꽃피운 장본인으로 꼽을 수 있습니다.
신분이 아닌 능력으로 사람을 평가한 세종, 그리고 그 기회를 잡아 조선 최고의 과학자가 된 장영실. 두 사람의 만남은 조선 과학사에 길이 남을 황금기를 만들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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