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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이야기

게장 한 그릇이 부른 300년 논쟁, 경종 독살설의 진실

by 정보정보열매 2026. 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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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4년 음력 8월 20일 저녁, 창경궁 환취정. 한 달 가까이 병상에 누워 있던 조선 20대 임금 경종의 수라상에 게장과 생감이 올라왔습니다. 평소 게장을 좋아했던 경종은 오랜만에 입맛이 돌았는지 수라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부터 상황이 급변했습니다. 가슴과 배가 뒤틀리듯 아프기 시작했고, 설사가 멈추지 않았습니다. 나흘 뒤인 8월 24일 경종은 의식을 잃었고, 다음 날 서른일곱의 나이로 숨을 거뒀습니다.

문제는 그 게장이 어디서 왔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세간에서는 왕세제였던 연잉군, 훗날의 영조가 보낸 것이라는 소문이 삽시간에 퍼졌습니다.

어머니의 죽음을 목격한 세자

이 이야기를 이해하려면 경종의 비극적인 삶부터 알아야 합니다. 경종은 숙종과 장희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태어나자마자 남인과 서인의 당쟁 한복판에 서게 됐고, 어린 시절 내내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렸습니다.

결정적인 사건은 열네 살 때 일어났습니다. 어머니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저주했다는 죄목으로 사약을 받게 됐는데, 경종은 그 장면을 직접 목격해야 했습니다. 아버지 숙종이 세자인 그에게 어머니의 죽음을 보게 한 것입니다. 이후 경종은 심한 스트레스성 질환에 시달렸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간질 증세와 함께 복통, 소화불량이 끊이지 않았고, 비만 체질로 인한 각종 질병을 달고 살았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어머니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장본인으로 지목된 사람이 바로 숙빈 최씨였습니다. 장희빈의 저주 사실을 숙종에게 고해바친 인물로 알려진 그녀가 낳은 아들이 연잉군, 훗날의 영조입니다. 경종에게 이복동생 영조는 단순한 형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날 밤, 환취정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1724년 7월부터 경종의 건강은 급격히 나빠졌습니다. 가벼운 감기 증상으로 시작됐지만 보름이 지나도 낫지 않았습니다. 두통, 오한, 열감, 구역질이 계속됐고, 식사를 거의 하지 못해 미음으로 연명하는 상태였습니다. 8월 20일 병세가 잠시 호전되는 듯했을 때, 수라상에 게장과 감이 올라왔습니다.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의관들은 경종이 게장과 생감을 함께 먹었다는 사실을 알고 경악했습니다. 한의학에서 게와 감은 대표적인 상극 음식으로 분류됩니다. 본초강목에도 함께 먹으면 복통과 설사를 일으킨다고 명확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건강한 사람도 탈이 날 수 있는 조합인데, 한 달 가까이 제대로 먹지 못한 환자에게는 치명타였습니다.

의관 이공윤은 즉시 곽향정기산과 두시탕을 처방했지만 효과가 없었습니다. 8월 24일, 왕세제 영조가 인삼과 부자를 처방하라고 강하게 주장했습니다. 이공윤은 반대했습니다. 인삼을 쓰면 기를 제대로 돌리지 못한다고 했지만, 영조는 지금이 어느 때인데 자기 의견만 고집하느냐며 이공윤을 질책했습니다.

결국 인삼 처방이 시행됐고, 잠시 경종의 눈빛이 좋아지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그날 저녁 상태가 급격히 악화됐고, 8월 25일 경종은 숨을 거뒀습니다.

영조를 평생 괴롭힌 게장 한 그릇

경종이 죽자 왕위는 연잉군에게 넘어갔습니다. 그가 바로 조선 21대 임금 영조입니다. 하지만 즉위와 동시에 독살설이 터져 나왔습니다. 게장을 올린 것이 영조라는 소문이 온 나라에 퍼졌고, 이 의혹은 영조의 52년 재위 기간 내내 그를 괴롭혔습니다.

영조 즉위 4년 후인 1728년, 이인좌의 난이 일어났습니다. 반란군은 경종의 위패를 만들어 아침저녁으로 곡을 하며 경종이 독살당했다고 주장했습니다. 반란은 진압됐지만 소문은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가장 극적인 장면은 영조 31년에 벌어졌습니다. 나주 괘서 사건의 주모자로 잡힌 신치운이 영조 앞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은 갑진년부터 게장을 먹지 않았으니, 이것이 바로 신의 역심입니다."

갑진년은 1724년, 경종이 죽은 해입니다. 신치운은 영조 면전에서 당신이 게장으로 형을 죽였다고 정면으로 타격한 것입니다. 실록은 이 말을 들은 영조가 분통해하며 눈물을 흘렸고, 주변 장수들도 당장 신치운의 살을 찢고 싶어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신치운은 대역죄인으로 처형됐고, 그의 일가는 모조리 극형에 처해졌습니다.

영조는 죽을 때까지 억울함을 호소했습니다. 게장은 자신이 올린 것이 아니라 수라간에서 공진한 것이며, 무식한 하인들이 지나치게 올린 것을 흉악한 무리들이 사실을 조작했다고 주장했습니다.

현대 의학이 바라본 경종의 죽음

그렇다면 진실은 무엇일까요. 현대 학계에서는 경종이 독살됐을 가능성은 낮다고 봅니다. 몇 가지 근거가 있습니다.

우선 궁궐 음식은 여러 사람이 나눠 먹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식사 전 독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맛을 보고, 남은 음식은 아랫사람들이 나눠 먹었습니다. 게장에 독이 들었다면 경종만 아팠을 리가 없습니다.

게장과 감의 조합도 건강한 사람을 죽게 만들 정도의 독은 아닙니다. 다만 둘 다 찬 성질의 음식이라 소화기가 약한 사람에게는 심한 복통과 설사를 유발할 수 있습니다. 한 달 가까이 제대로 먹지 못하고 기력이 쇠진한 상태에서 이런 음식을 먹으면 극심한 탈수를 일으킬 수 있고, 이것이 경종의 직접적인 사인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경종은 어린 시절부터 심각한 스트레스성 질환을 앓았고, 간질과 비만성 질병까지 겹쳐 있었습니다. 게장과 감이 치명타가 될 만큼 이미 허약한 상태였던 것입니다.

정치가 만들어낸 비극

결국 경종 독살설은 의학적 사건이라기보다 정치적 사건에 가깝습니다. 경종을 지지한 소론과 영조를 지지한 노론 사이의 권력 다툼이 이 비극의 본질입니다. 소론 강경파와 남인에게 경종 독살설은 정권 탈환의 명분이었고, 영조에게는 평생 지워지지 않는 주홍글씨였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영조가 자신을 의학에 조예가 있는 사람이라고 공공연히 주장했다는 점입니다. 그런 영조가 위독한 경종에게 의학적으로 해로운 음식이 올라가는 것을 방치했다는 사실은 의도와 무관하게 의심을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게다가 경종이 위독해졌을 때 설치되어야 할 시약청이 설치되지 않았고, 영조는 경종의 건강 상태를 상세히 알리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이런 행동들이 독살설을 더욱 그럴듯하게 만들었습니다.

300년이 지난 지금, 게장과 감을 함께 먹으면 안 된다는 상식은 여전히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 상식의 뿌리에 조선 왕실의 비극적인 권력 다툼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경종의 짧은 삶과 영조의 평생에 걸친 고통,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간 정쟁. 게장 한 그릇이 남긴 역사의 무게는 생각보다 무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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