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옛날이야기

장희빈의 최후, 드라마처럼 강제로 사약 먹인 기록 없다

by 정보정보열매 2026. 1. 19.
반응형

"민씨가 내게 악행을 해 그 벌로 죽었거늘 왜 나를 죽이려 하느냐!" 드라마 속 장희빈은 사약을 거부하며 발악합니다. 격분한 숙종이 궁녀들에게 명령하거든요. "입을 벌려 사약을 마시게 하라!" 문짝으로 몸을 누르고 사약 세 사발을 강제로 들이붓습니다.

1961년 영화 《장희빈》이 선풍적 인기를 끌었습니다. 권선징악의 결말을 원하는 민중은 요녀 장희빈의 비참한 죽음만을 기억하게 되었거든요. 하지만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에는 그런 기록이 없습니다. 오늘은 드라마와 완전히 다른 장희빈의 실제 최후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실록에는 "자진했다"고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숙종실록 35권, 숙종 27년 10월 10일 계해 2번째 기사를 보면 간단합니다. "장씨가 이미 자진했으니, 해조로 하여금 상장의 제수를 참작해 거행하도록 하라." 이게 전부거든요. 어떻게 죽었는지 자세한 과정은 기록에 없습니다.

왕이 화장실 가는 것까지 상세하게 기록하는 조선왕조실록입니다. 드라마처럼 난리법석을 떤 죽음이었다면 어떤 식으로든 기술되었을 가능성이 높거든요. 하지만 실록이나 승정원일기에는 그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습니다.

사관들도 품위와 체통이 있습니다. 역적들도 왕에게 절하고 스스로 마시는 사약을 전직 왕비이자 왕세자의 생모가 거부하며 패악질을 부렸다고 차마 기록할 수 없었을 거라는 주장도 있거든요. 하지만 이는 추측일 뿐입니다.

경종 때 임금의 생모라 해서 실록을 세초하여 자진했다고 기록을 바꿨을 수도 있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하지만 확실한 건 공식 기록에는 장희빈이 스스로 자진했다고 나와 있다는 사실이거든요.

신하들이 사약 대신 자진을 권유했습니다

1701년 음력 10월 8일 유시에 중요한 논의가 있었습니다. 판중추부사 서문중, 우의정 신완, 이조판서 이여가 숙종을 청대했거든요. 마지막으로 희빈 장씨의 구명을 청했습니다.

숙종의 뜻이 완고하여 자진의 명을 번복할 수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구명을 포기하고 희빈 장씨를 자진시키는 수단에 대해 물었거든요. 이에 숙종이 사약 이외에는 달리 방도가 없다고 답했습니다.

서문중 등이 말했습니다. "왕세자를 낳고 기른 사친에게 유사의 형벌을 쓰는 것은 주례에서 금한 것입니다. 궁 안에선 사사를 할 수 없으니 사제로 내보내 사약을 줘야 하는데 이는 유사의 형벌이 됩니다."

"공족의 사죄는 전인에게 넘겨 목매어 죽인다"고 간언했거든요. 즉 장옥정을 어쩔 수 없이 죽여야 하더라도 사죄를 지은 죄인으로 보면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세자에게 흠이 가지 않도록 조용히 처리해야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야사에서 악녀로 만든 건 노론의 정치 공작입니다

《인현왕후전》은 작자 미상의 야사입니다. 인현왕후는 선, 장희빈은 악이라는 설정을 하고 있거든요. 주술 등 온갖 악행으로 천사 같은 인현왕후를 괴롭힌 장희빈이 하늘의 심판을 받아 파멸하는 권선징악적 내용입니다.

장희빈 관련 야사는 경종이 사망하고 영조가 즉위한 이후에 등장했습니다. 장희빈과 경종에 적대적인 노론 측 인사들이 썼거든요. 정치적 의도가 다분합니다.

《인현왕후전》에 따르면 장희빈이 죽기 직전 숙종에게 대들었습니다. 격분한 숙종이 "요망한 년"이라는 극한 표현까지 써가며 궁녀들에게 장희빈의 입을 벌려 사약을 마시게 했거든요. 장희빈은 "세자와 함께 죽여라"고 악을 쓰며 저항했다고 합니다.

《수문록》에는 더 충격적인 내용이 있습니다. 죽기 직전에 세자에게 위해를 가해 병신으로 만들었다는 거죠. 세자의 고환을 파열시켜 성불구로 만들었다고 적었거든요.

세자 고환 파열 이야기는 거짓말입니다

세자 고환 파열 이야기는 다른 기록과 대비해보면 맞지 않습니다. 당시 세자 나이 14세 때 일이거든요. 만약 장희빈이 세자의 고환을 파열시켰다면 엄청난 사건입니다.

내의원에서 곧바로 세자에 대해 응급 처방을 하는 등 조정에 비상이 걸렸을 겁니다. 그렇지만 당시 숙종실록이나 승정원일기에는 그런 언급이 전혀 없거든요. 무엇보다 당일 승정원일기엔 세자가 앓고 있는 피부병에 대한 처방 얘기만 나옵니다.

《단암만록》을 쓴 민진원은 인현왕후 민씨의 동생입니다. 경종이 소변을 가리지 못해 왕이 된 뒤에도 앉은 자리가 축축했다고 적었거든요. 덜떨어진 인물로 깎아내렸습니다.

모친 장희빈이 죽은 충격에 멍하니 먼 곳을 쳐다보는 등 정신줄을 놓고 헛소리도 종종 했다며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었다고 적었습니다. 정사에는 전혀 없는 내용인데, 다분히 정치적 의도성을 갖고 쓴 것이거든요.

장희빈은 붕당정치의 희생양입니다

1674년 숙종이 즉위하면서 2차 예송에서 승리한 남인이 정권을 쥐었습니다. 1680년 경신환국으로 남인이 밀려나고 서인이 집권했거든요. 이 사이에 서인은 송시열의 노론과 윤증의 소론으로 갈라졌습니다.

1689년 희빈 장씨가 낳은 아들을 세자로 책봉하는 과정에서 기사환국이 발생했습니다. 서인이 몰락하고 남인이 다시 집권했거든요. 장희빈은 남인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1694년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다시 집권했습니다. 인현왕후가 복위하면서 장희빈은 다시 후궁으로 강등되었거든요. 1701년 인현왕후가 죽자 서인은 장희빈이 저주했다고 몰아붙였습니다.

장희빈이 사형당하면서 남인은 완전히 몰락했습니다. 이후 남인의 재집권은 불가능했거든요. 장희빈의 죽음은 개인의 비극이 아니라 붕당정치의 희생양이었습니다.

역관 집안 출신으로 왕비까지 오른 유일한 인물입니다

장희빈의 본명은 장옥정입니다. 본관은 인동이거든요. 조부 장응인은 역관으로 중국어에 능했고, 글씨를 잘 쓰고 풍류가 있는 인물이었다고 합니다.

조선 518년 역사에서 비양반 신분으로 왕비에 올랐던 유일한 인물입니다. 역관은 중인 계층이거든요. 하급 궁녀에서 중전의 자리까지 오른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적어도 인현왕후보다는 기가 세고 강한 여인이었습니다.

장희빈의 미모는 사관들도 인정했습니다. 노론조차 장희빈의 미모를 인정할 정도였거든요. 김창협은 "후궁으로서 가까이 사랑할 사람이 간혹 있을 수도 있다"고 기록했습니다.

다만 조선이 성리학 국가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칭찬은 단순한 외모 평가가 아닙니다. 장희빈이 미모로 숙종을 홀리고 인현왕후를 모함하여 중전의 자리를 찬탈했다는 부정적 평가와 연결되거든요.

1961년 영화가 악녀 이미지를 대중화했습니다

1961년 《인현왕후전》으로 극본을 짠 정창화 감독의 영화 《장희빈》이 대중에게 선풍적 인기를 모았습니다. 이 인기를 바탕으로 아류작인 영화, 드라마, 서적 등이 연이어 만들어졌거든요.

권선징악의 결말을 원하는 민중들은 요녀 장희빈의 비참한 죽음만을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1995년 SBS 《장희빈》에서는 표독스럽게 눈을 치켜 뜨고 숙종을 노려보았습니다. 경악한 숙종이 "한 사발 더 부어라!"라고 명령하여 세 그릇을 입에 붓고 나서야 최후를 맞았거든요.

2003년 KBS 《장희빈》에서는 장희빈이 사약을 먹으려 하지 않자 문짝으로 몸을 누르고 들이부어 먹이는 장면이 나왔습니다. 야사를 반영한 것인데, 사실 야사 자체가 서인계 사관이 남인계의 장희빈을 공격하려고 퍼뜨린 풍문일 가능성이 크거든요.

2010년대부터 제작되는 장희빈 관련 드라마에서는 정사서의 내용을 일정 부분 반영하여 조용히 마시는 장면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2010년 《동이》의 장희빈은 자발적으로 사약을 요청하고 품위 있게 원샷했거든요.

숙종이 두 여인을 죽음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인현왕후는 1701년 서른다섯의 젊은 나이로 병들어 죽었습니다. 그런 뒤 장희빈은 인현왕후를 저주했다는 혐의로 사사되었거든요. 두 여인 모두 숙종 시대에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여인들의 뒤에 숨어, 붕당들의 뒤에 숨어 시대의 불행을 가중시킨 최대의 주범은 인현왕후도 장희빈도 서인당도 남인당도 아닌 숙종 그 자체였습니다. 강력한 왕권을 추구하며 환국정치를 실시했거든요.

숙종은 붕당을 자주 교체함으로써 신하들의 충성심을 경쟁시키는 정국 운영을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정치적 부침이 심한 붕당은 서인과 남인이었거든요. 장희빈은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남인의 정치적 행보와 운명을 함께 했습니다.

인현왕후가 죽고 장희빈이 유력한 중전 후보로 떠오르자 숙종은 별다른 근거도 없는 최숙빈의 말을 근거로 장희빈을 죽음으로 내몰았습니다. 드라마 속 숙종은 당혹스럽고 참담해하지만, 실제 숙종은 정치적 계산으로 장희빈의 죽음을 결정했거든요.


드라마와 영화에서 장희빈은 사약을 거부하며 발악하다가 강제로 입을 벌려 사약을 먹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세 사발을 마셨다거나, 세자의 고환을 파열시켰다는 이야기도 나오거든요.

하지만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에는 "장씨가 이미 자진했다"고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야사의 극적인 내용은 노론 측 인사들이 정치적 목적으로 지어낸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거든요.

장희빈은 희대의 악녀가 아니라 붕당정치의 희생양이었습니다. 역관 집안 출신으로 왕비까지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지만, 숙종의 환국정치와 서인-남인의 대립 속에서 비극적 최후를 맞았습니다. 1961년 영화 이후 대중에게 각인된 악녀 이미지는 역사적 진실과 다릅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