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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이야기

조선 시대 사람들은 정말 설날에 이렇게 보냈을까?

by 정보정보열매 2026. 1.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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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연휴가 다가오면 우리는 당연하게 떡국을 먹고, 세배를 하고, 세뱃돈을 주고받습니다. 그런데 문득 궁금해지지 않으셨나요? 이런 풍습들이 대체 언제부터 시작된 걸까, 조선 시대 사람들도 지금처럼 설을 보냈을까 하고요. 실제로 확인해보면 놀라운 점이 많습니다. 지금 우리가 하는 것과 거의 같은 것도 있고, 지금은 완전히 사라진 풍습도 있습니다. 오늘은 조선 시대 설날 풍속에 대해 자주 궁금해하시는 것들을 하나씩 정리해드리겠습니다.

떡국을 먹어야 나이를 먹는다는 말, 진짜 조선 시대부터 있었나요?

네, 사실입니다. 조선 후기의 세시 풍속서인 동국세시기와 열양세시기에 이미 이 표현이 등장합니다. 열양세시기에 따르면, 당시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몇 살이냐"라고 묻는 대신 "떡국을 몇 그릇 먹었느냐"라고 물었다고 합니다. 설날에 먹는 떡국을 첨세병이라고 불렀는데, 해가 바뀔 때 먹는 떡이라는 뜻입니다.

떡국에 들어가는 흰 가래떡에도 의미가 있었습니다. 동국세시기에서는 떡국을 백탕 또는 병탕이라고 부르는데, 흰색 가래떡을 넣고 끓인 탕이라는 뜻입니다. 흰색은 새해의 밝음과 정결함을 상징했고, 가래떡의 긴 모양은 장수를, 동그랗게 썬 모양은 엽전처럼 재화의 풍요를 의미했습니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원래 떡국 국물은 꿩고기로 우려냈다고 합니다. 그런데 꿩을 쉽게 구할 수 없던 서민들이 닭고기로 대신했는데, 여기서 "꿩 대신 닭"이라는 속담이 유래했다고 전해집니다.

세뱃돈 문화도 조선 시대부터 있었나요?

세배 자체는 조선 시대부터 있었지만, 세뱃돈을 주는 문화는 원래 우리 전통이 아닙니다. 본래 조선 시대에는 세배를 받으면 돈이 아니라 세배상을 차려주거나 덕담을 해주는 것이 전통이었습니다. 세배상에는 떡과 과일, 식혜, 수정과 같은 음식을 올렸습니다. 아이들에게 돈을 주는 풍습은 중국에서 들어온 것으로 추정됩니다. 중국에서는 설날에 결혼하지 않은 자녀에게 홍바오라고 하는 붉은 봉투에 돈을 넣어 주는 풍습이 있는데, 이것이 전해진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덕담의 형식은 지금과 달랐습니다. 경도잡지에 따르면, 덕담은 원래 손윗사람이 손아랫사람에게 "올해는 과거에 급제하겠구나"처럼 선언하듯이 말하면, 아랫사람이 그에 걸맞은 답례 덕담을 올리는 방식이었습니다. 지금처럼 서로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인사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형태였던 겁니다.

복조리는 왜 걸었나요?

복조리는 설날 새벽에 집 밖에 걸어두던 조리입니다. 조리란 쌀에 섞인 돌이나 모래를 걸러내는 체인데, 대나무를 가늘게 쪼개어 엮어 만들었습니다. 섣달그믐날 자정이 지나면 복조리 장수들이 "복조리 사려"라고 외치며 다녔고, 어떤 지역에서는 복조리 장수가 담 너머로 복조리를 던져 놓고 다음 날 돈을 받아가기도 했습니다.

복조리에는 여러 상징이 담겨 있었습니다. 조리가 쌀을 이는 도구이니 한 해의 복이 쌀알처럼 풍성하게 일어나라는 의미가 있었고, 대나무를 엮은 틈새가 눈처럼 많아서 광명을 통해 나쁜 것을 물리친다는 상징성도 있었습니다. 복을 사는 것이라 여겨 복조리 값은 절대 흥정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복조리 안에는 실이나 엿, 성냥 같은 것을 담아 벽에 걸어두었습니다.

설날 밤에 잠을 자면 안 됐다는데, 사실인가요?

네, 이것도 실제로 있던 풍습입니다. 야광귀라는 귀신 이야기와 관련이 있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야광귀는 설날 밤에 집집마다 다니면서 신발을 신어보고, 자기 발에 맞는 신발이 있으면 가져간다고 했습니다. 신발을 빼앗기면 그 해에 운이 나쁘다고 믿었기 때문에, 설날 밤에는 신발을 감추거나 안방에 들여놓았습니다.

더 확실한 방법도 있었습니다. 야광귀는 글을 읽을 줄 알아서, 문 앞에 체를 걸어두면 촘촘한 구멍의 개수를 세느라 날이 새버린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복조리를 걸어두는 것이 야광귀를 쫓는 역할도 했다고 합니다. 아이들에게는 "설날 밤에 자면 눈썹이 희어진다"고 겁을 주어 밤새 깨어 있게 했는데, 이것을 수세라고 불렀습니다.

윷놀이는 정말 부여 시대부터 했나요?

윷놀이의 기원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다릅니다. 조선 후기의 학자 성호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고려의 풍속이라고 했고, 육당 최남선은 조선 고유의 민속이라고 했으며, 단재 신채호는 부여의 사출도 제도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신채호의 견해에 따르면 도, 개, 걸, 윷, 모는 부여의 다섯 가축인 돼지, 개, 양, 소, 말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저가는 돼지로 도, 구가는 개로 개, 우가는 소로 윷, 마가는 말로 모에 해당한다는 것입니다.

확실한 것은 고려 시대에 이미 윷놀이가 있었다는 점입니다. 고려 말 이색의 목은집에 윷놀이에 관한 시와 놀이 장면이 기록되어 있고, 오늘날과 같은 29칸 윷판이 이미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윷판의 둥근 바깥 모양이 하늘을, 안의 네모진 것이 땅을 상징한다고 해석했습니다. 단순한 놀이가 아니라 천지의 이치를 담은 것으로 본 겁니다.

윷놀이는 점술 도구로도 사용되었습니다. 경도잡지에 따르면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윷점을 쳐주기도 했는데, 예를 들어 도도도가 나오면 "어린아이가 자비로운 엄마를 만났다"는 뜻으로 좋은 점괘였고, 도개걸이 나오면 "나비가 등잔을 쳤다"는 뜻으로 주의를 요하는 점괘였습니다.

설날 아침에 여자가 남의 집에 들어가면 안 됐다고요?

이것도 실제로 있던 금기입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설날이나 상묘일, 즉 새해 첫 토끼날에는 여자가 아침 일찍 남의 집에 출입하면 그 집에 재수가 없다는 속신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조선 시대에는 설날 세배를 다닐 때 부녀자들이 직접 다니지 않고 문안비라고 하는 하녀를 대신 보내기도 했습니다.

또 다른 금기로는 설날에 머리를 빗지 않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머리를 빗으면 복이 나간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대신 설날 밤에는 머리카락을 태워서 액을 막는 소액의 풍습이 있었습니다. 대문에 호 자나 용 자를 써서 붙이는 것도 액을 막기 위한 방법이었습니다.

토정비결도 설날 풍습이었나요?

맞습니다. 토정비결은 토정 이지함이 주역을 참조하여 만들었다고 전해지는데, 생년월일을 따져 한 해의 운수를 점치는 것입니다. 설날에 가족끼리 모여 한 해의 신수를 보는 것이 풍습이었습니다. 토정비결 외에도 다양한 점술이 있었습니다. 청참은 새해 첫 새벽에 처음 듣는 소리로 점을 치는 것이고, 오행점은 나무판이나 엽전에 금, 목, 수, 화, 토의 글자를 새겨 점을 보는 것입니다. 설날 며칠간의 날씨를 보고 한 해의 농사를 점치기도 했습니다.

지역마다 설 음식이 달랐나요?

네, 차례상에 올리는 음식이 지역마다 조금씩 달랐습니다. 경기도에서는 떡국과 만둣국을 함께 올렸고, 강원도에서는 떡국, 만둣국, 밥을 모두 올리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충청도, 경상남도, 전라남도에서는 떡국을, 전라북도와 경상북도에서는 밥을 차례상에 올렸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금은 전국적으로 떡국이 설 대표 음식으로 자리 잡았지만, 조선 시대에는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었던 겁니다.

정리하자면, 떡국을 먹고 세배를 하고 윷놀이를 하는 핵심적인 설날 풍습은 조선 시대, 아니 그 이전부터 이어져 온 것입니다. 복조리 걸기, 야광귀 쫓기, 수세 같은 풍습은 지금은 거의 사라졌고요. 세뱃돈 문화는 비교적 최근에 들어온 것으로 보입니다. 올 설에 가족과 함께 떡국을 드시면서 "이게 수백 년 전부터 내려온 거래"라고 이야기해보시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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