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한양의 어느 양반가 새벽녘입니다. 아직 해가 뜨지도 않았는데 온 집안이 분주합니다. 오늘은 정월 초하루, 새해의 첫날입니다. 부엌에서는 새벽부터 떡국을 끓이는 소리가 들려오고, 안채에서는 여인들이 설빔을 꺼내 정성껏 다림질을 합니다. 조상의 신위 앞에는 정갈하게 차려진 차례상이 놓여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설날 풍경, 그런데 조선시대 설날에는 우리가 모르는 이야기들이 숨어 있습니다.
설날 밤, 신발을 숨겨야 했던 이유
조선시대 사람들은 설날 밤에 절대로 신발을 밖에 내놓지 않았습니다. 야광귀라는 귀신이 설날 밤에 마을을 돌아다니며 아이들의 신발을 신어보고, 발에 맞으면 신고 가버린다는 속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야광귀에게 신발을 빼앗기면 그해 운이 나빠진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신발을 방 안에 들여놓거나 숨겨두었습니다. 더 재미있는 것은 야광귀를 쫓기 위해 체를 대문에 걸어두는 풍습이었습니다. 야광귀가 체의 구멍을 세다가 새벽이 되어 물러간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는 이야기지만, 당시 사람들에게는 매우 진지한 새해 의식이었습니다.
며느리는 친정에 세배할 수 없었다
조선시대에는 출가외인이라 하여 시집간 여자는 더 이상 친정의 구성원이 아니라고 여겼습니다. 설날이라고 해서 친정에 세배하러 가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명절에 음식 준비와 시댁 손님 접대에 여념이 없었던 것도 이유였지만, 무엇보다 예법상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친정 부모님께는 어떻게 새해 인사를 드렸을까요. 여기서 문안비라는 독특한 풍습이 등장합니다. 양반가에서는 계집종을 친정에 보내 세배를 대신하게 했습니다. 계집종이 대신 절을 올리고 주인마님의 안부를 전했던 것입니다. 친정에서도 자기 집의 계집종을 답례로 사돈댁에 보내 문안을 여쭙게 했습니다. 직접 갈 수 없으니 사람을 보내 마음이라도 전했던 것입니다.
떡국을 먹어야 나이를 먹는다
지금도 설날에 떡국을 먹지만, 조선시대에는 떡국을 먹는 것이 훨씬 중요한 의미를 가졌습니다. 떡국을 먹어야 비로소 나이를 한 살 먹는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린아이에게 나이를 물을 때 떡국 몇 그릇 먹었느냐고 묻기도 했습니다.
흰 떡을 사용한 것은 새해 첫날이 밝아온다는 뜻에서 밝음을 상징했고, 떡을 둥글게 써는 것은 둥근 태양을 본뜬 것이었습니다. 태양 숭배 사상이 음식 문화에까지 녹아든 셈입니다. 지역에 따라 차례상에 올리는 음식이 달랐는데, 경기도에서는 떡국과 만둣국을, 전라북도와 경상북도에서는 밥을 상에 올리기도 했습니다.
복조리 사러 밤새 줄을 섰다
설날 이른 아침, 또는 섣달 그믐날 밤 자정이 지나면 전국에서 조리 장사들이 인가 골목을 돌아다녔습니다. 대나무를 가늘게 쪼개어 엮어 만든 조리를 복조리라 불렀는데, 이것을 사서 벽에 걸어두면 그해의 행운을 조리로 일어 취한다고 믿었습니다. 조리가 쌀을 이는 도구이니, 복을 건져 올린다는 의미였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복조리를 남보다 먼저 사야 복이 더 많이 들어온다고 여겼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그믐날 밤부터 조리 장사가 오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고, 한 해 동안 쓸 조리를 한꺼번에 사서 방 한쪽 구석에 걸어두고 하나씩 쓰는 집도 있었습니다.
세뱃돈은 원래 없었다
지금은 세배를 하면 으레 세뱃돈을 받지만, 조선시대에는 세뱃돈이라는 개념이 없었습니다. 세배를 받은 어른이 어른에게는 술과 음식을 내놓았고, 아이들에게는 떡과 과일을 주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약간의 돈을 주는 경우도 있었지만 지금처럼 보편화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돈을 주는 풍습이 널리 퍼진 것은 근대 이후의 일입니다. 중국에서 설날에 붉은 봉투에 돈을 넣어 자녀에게 주는 풍습이 영향을 미쳤다는 설도 있습니다. 조선시대 아이들은 세뱃돈 대신 맛있는 떡과 과일을 손꼽아 기다렸을 것입니다.
상중에는 보름까지 집 밖에 나가지 않았다
설날에도 지켜야 할 예법은 엄격했습니다. 상중에 있는 사람은 정월 보름까지 출입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습니다. 세배를 다닐 수도 없었고, 세배를 받을 수도 없었습니다. 죽은 이의 혼령을 모셔둔 궤연을 모신 집에서는 먼저 궤연에 조문하고, 상주에게 인사를 한 다음, 웃어른부터 차례대로 세배하는 복잡한 절차를 따랐습니다.
세배를 드려야 할 어른이 먼 곳에 살고 있을 경우에는 정월 보름까지 찾아가서 세배하면 예절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여겼습니다. 교통이 불편했던 시절, 30~40리를 걸어서 세배하러 가는 일도 흔했습니다.
까치 소리를 기다렸던 설날 새벽
청참이라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설날 새벽에 집 근처에서 맨 처음 들리는 짐승의 울음소리로 한 해의 길흉을 점치는 것이었습니다. 까치 소리가 들리면 길조, 까마귀 소리가 들리면 흉조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집 근처에 까치가 집을 짓도록 담장에 죽나무를 심어두는 집도 있었습니다.
설날 아침 까치 소리에 기뻐하고, 까마귀 소리에 근심하던 조선 사람들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새해의 운명이 새 울음소리에 달려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설빔은 대보름까지 입었다
설날에 입는 새 옷을 설빔 또는 세장이라고 불렀습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새 옷을 입었는데, 이 옷은 섣달 그믐 이전에 미리 마련해두었습니다. 색깔이 있는 화려한 옷으로 준비했으며, 대체로 대보름까지 입었습니다.
새해 첫날 새 옷을 입는 것은 단순히 멋을 내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묵은 것을 벗고 새것을 입음으로써 새해를 새롭게 시작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습니다. 가난한 집에서는 새 옷을 마련하기 어려웠기에, 헌 옷이라도 깨끗이 빨아 입었습니다.
정리하자면, 조선시대 설날은 지금보다 훨씬 복잡한 의례와 금기가 따르는 날이었습니다. 야광귀를 피해 신발을 숨기고, 복조리를 사기 위해 밤을 새우고, 까치 소리에 한 해의 운을 점치던 사람들. 며느리는 친정에 갈 수 없어 종을 대신 보내고, 상중인 사람은 보름까지 집 밖에 나가지 못했습니다. 세뱃돈 대신 떡과 과일을 받았고, 떡국을 먹어야만 비로소 나이를 먹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쇠는 설날의 모습은 수백 년 전통이 시대에 맞게 변화해온 결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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