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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전

최승로 시무 28조란? 고려를 유교 국가로 만든 신라 출신 천재 재상

by 정보정보열매 2025. 10.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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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로 시무 28조란? 고려를 유교 국가로 만든 신라 출신 천재 재상

 

관음보살의 보살핌으로 태어나 유교 국가를 건설하다

최승로(崔承老, 927~989). 신라 6두품 출신으로 고려 재상까지 오른 인물입니다. 그가 56세에 쓴 '시무 28조'는 고려를 본격적인 문치(文治) 국가로 이끈 유교 정치의 설계도였습니다. 광종의 무단 정치 이후 혼란스러웠던 고려는 최승로의 등장으로 안정된 국가 체제를 갖추게 됩니다.

최승로는 어떻게 태어났나? 관음보살의 기적

927년, 후백제 견훤이 신라를 공격해 경애왕을 죽인 바로 그 해. 최승로는 신라 6두품 출신 최은함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삼국유사]에 전하는 그의 출생 이야기는 극적입니다.

최은함은 오랫동안 자식이 없어 경주 중생사의 관음보살상에 기도해 아들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석 달도 안 돼 견훤의 습격으로 경주는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은함은 갓난아기를 안고 다시 중생사로 달려가 절박하게 기도했습니다.

"부처께서 주신 아이라면, 대자대비의 힘으로 우리 부자를 훗날 다시 만나게 해주소서."

울면서 세 번 반복해 기도한 뒤, 관음상 뒤에 아기를 숨기고 떠났습니다. 15일 후 백제군이 물러나고 다시 찾아가니, 아기는 금방 목욕한 듯 깨끗하고 젖 냄새까지 났습니다. 이 아이가 바로 최승로입니다.

937년 신라가 망하고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하자, 10세의 최승로도 아버지를 따라 송도(개성)로 이주했습니다. 천년 왕국의 멸망을 목격한 소년은 새 왕조에서 어떤 인물이 될까요?

최승로

12세 천재 소년, 태조 왕건을 만나다

최승로는 어릴 때부터 천재였습니다. 12세에 태조 왕건을 만나 논어를 줄줄 외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감탄한 태조는 즉시 상을 내리고 영재들이 모인 원봉성(元鳳省)에 보내 특별 교육을 받게 했습니다.

주위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자란 소년은 "국가를 위해 큰일을 하겠다"는 의지를 불태웠습니다. 이후 그는 태조를 시작으로 혜종, 정종, 광종, 경종을 거쳐 성종까지 다섯 왕을 섬기는 긴 여정을 시작합니다.

광종 시대의 좌절: 20년 불우의 세월

화려한 소년기와 달리 청년 최승로의 20~40대는 암흑기였습니다. 광종은 중국 귀화인 쌍기를 총애해 한림학사에 천거하고 문병(文柄, 문교 행정권)을 맡겼습니다.

유학 한 번 안 간 순수 국내파 최승로에게 이는 자존심을 짓밟는 일이었습니다. 학문으로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지만, 쌍기의 등장 이후 재능을 펼칠 기회가 없었습니다. 광종 대 여덟 번 시행된 과거에서 단 한 번도 시험관(지공거)이 되지 못했습니다.

20년 넘게 불우하게 지낸 세월.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광종이 과거제를 도입하고 호족 세력을 제거한 덕분에, 유교적 정치 이념을 구현할 토대가 마련되었습니다.

광종 후반기 들어 과거 출신 신진 관료들이 등장하면서 최승로의 유교적 소양이 인정받기 시작했습니다. 절치부심하며 기다린 세월이었습니다.

982년, 운명의 상소문 '시무 28조'를 올리다

981년, 유교 사회 건설을 표방한 성종이 즉위했습니다. 이듬해 성종은 정5품 이상 모든 관리에게 시무책 상소를 명령했습니다.

기다렸다는 듯 최승로는 장장 28조에 달하는 장문의 시무책을 올렸습니다. 당시 그의 나이 56세. 학문과 경륜이 최절정에 이른 시기였습니다.

시무 28조의 핵심 내용은?

[고려사]에는 22조가 전문으로 수록되어 있습니다. 주요 내용은:

국방과 재정

  • 국방비를 절감하라
  • 시위 군졸을 줄여라
  • 궁중 비용을 줄여라
  • 공역(貢役)을 공평하게 하라

불교 억제, 유교 진흥

  • 불교의 폐단을 줄여라
  • 승려들의 고리대금을 금지하라
  • 승려들의 횡포를 막아라
  • 연등회와 팔관회의 동원을 줄여라
  • 불경과 불상을 사치스럽게 만들지 말라
  • 불교를 억제하고 유교를 일으켜라

제도 정비

  • 관복을 제정하라
  • 상벌을 공정하게 하라
  • 중국 제도를 무조건 따르지 말라
  • 신분 차별을 엄격히 하라

민생과 통치

  • 지방 토호들의 횡포를 막아라
  • 백성을 동원해 절 짓는 것을 금지하라
  • 부호들을 견제하라
  • 군주는 덕을 베풀고 사심 없는 마음가짐을 가져라

특히 광종에 대한 평가가 신랄했습니다. 중국풍을 맹목적으로 좋아한 것, 쌍기를 등용한 것을 최대 실정으로 지적했습니다. 20년 불우의 세월에 대한 불만도 담겨 있었죠.

성종은 최승로의 시무책을 적극 수용했습니다.

최승로가 만든 고려 체제: 12목 설치와 3성 6부제

시무책을 올린 직후 최승로는 정2품 문하시랑평장사에 임명되었습니다. 이제 구상을 실행에 옮길 차례였습니다.

983년 이후 최승로의 업적:

  • 12목 설치: 지방행정 체계 정비
  • 3성 6부제: 중앙 관제 정비
  • 팔관회와 연등회 폐지
  • 유교 정치 이념 제도화

관음보살의 보살핌으로 목숨을 건진 최승로였지만, 그가 구현하고자 한 이상은 유교 사회였습니다.

988년 종1품 문하수시중에 오르고 청하후에 봉해져 식읍 700호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미 환갑을 넘긴 노쇠한 몸이었습니다. 여러 차례 사직을 원했지만 성종은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989년, 63세로 생을 마감하다

989년 최승로는 6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성종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태사 벼슬을 추증하고, 베 1천 필, 밀가루 300석, 쌀 500석, 유향 100냥을 장례비로 하사했습니다.

최승로는 죽기 전 자신에게 기회를 준 성종을 생각하며 시를 남겼습니다.

"다행히도 천 년 만에 지존을 만나 재주 없이 직책을 더럽히며 서원에 있네 임금의 깊은 총애 모름지기 자랑하여 후세에 보여주리"

목종은 최승로를 성종의 묘에 합사해 공로를 치하했고, 덕종은 대광·내사령을 추증했습니다.

3대가 이어간 학문과 충성

최승로의 업적은 3대에 걸쳐 이어졌습니다.

아들 최숙, 그리고 손자 최제안도 조부 못지않은 학자였습니다. 최제안은 현종·덕종·정종·문종 4대 왕을 섬기며 벼슬이 태사, 문하시랑에 이르렀습니다.

최제안의 가장 큰 업적은 '훈요십조'의 재발견입니다. 거란 침입으로 [태조실록]이 소실되자, 그는 자료를 찾아 지방을 돌아다녔습니다. 최항의 집에서 병화로 분실되었던 태조의 훈요십조를 발견해 세상에 알린 것입니다.

최제안이 죽자 문종은 사흘 동안 조회를 정지하며 추도했습니다.

최승로의 유산: 고려 500년 기틀을 세우다

최승로는 중앙집권화를 도모하면서도 귀족 세력을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귀족 사회의 안정을 바라면서도 서민의 삶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성종 대 고려가 안정된 국가 기틀을 갖춘 것은 최승로의 공로였습니다. 시무 28조는 단순한 상소문이 아니라 고려 500년을 설계한 청사진이었습니다.

망국 신라의 백성으로 태어나, 관음보살의 기적으로 살아남아, 12세 천재로 발견되고, 20년을 인내하며, 56세에 시무 28조로 새 왕조의 틀을 완성한 인물.

최승로. 국내파 학자로서의 자존심, 유교 지식인으로서의 신념, 개혁가로서의 실천력을 모두 갖춘 그는 고려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재상 중 한 명으로 기억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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