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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전

정약전 자산어보 저자는 누구? 정약용 형이자 멘토였던 실학자

by 정보정보열매 2025. 10.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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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전 자산어보 저자는 누구? 정약용 형이자 멘토였던 실학자

 

"외로운 천지 사이에 우리 손암 선생만이 나의 지기였는데"

정약용(丁若鏞, 1762~1836). 실학사상의 집대성자로 추앙받는 그에게는 두 명의 멘토가 있었습니다. 한 명은 조선 22대 왕 정조였고, 다른 한 명은 네 살 위의 둘째 형 정약전(丁若銓, 1758~1816)이었습니다.

정약용은 형 정약전이 세상을 떠난 후 이렇게 애통해했습니다.

"나를 알아주는 이가 없다면 차라리 진작에 죽는 것만 못하다. 아내도 나를 알아주지 못하고 자식도 나를 알아주지 못하고, 형제 종족들이 모두 나를 알아주지 못하는 처지에 나를 알아주던 우리 형님이 돌아가셨으니, 슬프지 않으랴."

아내보다 자식보다 더 특별했던 존재. [자산어보(玆山魚譜)]의 저자로 널리 알려진 정약전의 삶을 통해 두 형제의 특별하고도 애틋한 인연을 살펴봅니다.

정약전

정약전은 어떻게 태어났나? 견훤의 난 속 기적

1758년(영조 34) 3월 1일, 정약전은 경기도 광주 마현에서 태어났습니다. 본관은 나주, 자는 천전(天全), 호는 손암(巽庵), 연경재(硏經齋), 매심(每心)입니다.

아버지는 진주목사를 지낸 정재원이었고, 어머니는 해남 윤씨로 화가 윤두서의 손녀였습니다. 정재원에게는 두 부인이 있었는데, 정약전은 둘째 부인 윤씨의 3남 1녀 중 장남이었습니다. 동생으로 정약용과 정약종이 있었고, 누이는 조선 천주교 최초의 영세자 이승훈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서학 입문: 권철신 문하에서 서양 학문을 접하다

1776년(영조 52) 아버지가 호조좌랑이 되어 서울로 오면서, 정약전의 본격적인 학문 여정이 시작되었습니다. 이윤하, 이승훈, 김원성과 교유하기 시작했고, 성호 이익의 학문을 이어받은 권철신의 문하에서 수학했습니다.

정약용은 형을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공은 어려서부터 범상치 않았고 자란 뒤에는 더욱 기걸(奇傑)하였다. 성옹 이익의 학문을 전수받아 주자를 쫓고 도학의 근원을 찾아 공자에까지 거슬러 갔다."

1777년부터는 권철신을 중심으로 경기도 여주 주어사에서 열린 서학 강학회에 참여했습니다. 이벽, 이승훤 등 남인 인사들과 교유하며 서양의 역수학을 접하고 천주교에 끌렸습니다. 이러한 학통의 계승은 정약전은 물론 정약용이 천주교와 관련을 맺게 하는 동기가 되었습니다.

과거 급제와 관직 생활: 형제가 함께 벼슬길에

1783년(정조 7) 정약전은 사마시에 합격해 진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처음에는 "대과는 내 뜻이 아니다"며 과거 응시를 거부했습니다.

1789년 이미 벼슬길에 나선 정약용의 설득으로 생각을 바꿨습니다. "과거에 급제하지 않으면 임금을 섬길 길이 없다"며 공부에 집중해, 1790년(정조 14) 증광별시에 병과로 급제했습니다.

이후 성균관 전적, 병조좌랑을 역임했습니다. 정조는 "정약전의 준걸한 풍채가 정약용의 아름다운 자태보다 낫다"며 총애했습니다.

1798년에는 왕의 명을 받아 [영남인물고] 편찬에 참여했습니다. 조선 초기부터 정조대까지의 경상도 인물들을 정리한 중요한 작업이었습니다.

동림사 40일: 함께 공부하고 노닐던 형제

정약전과 정약용은 학문을 논하고 산수를 유람하며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습니다.

1778년 겨울, 동림사에서의 40일

아버지가 화순현감으로 있을 때, 두 형제는 동림사에 머물며 독서했습니다. 정약전은 [상서]를, 정약용은 [맹자]를 읽었습니다. 정약용은 [맹자]의 은미한 말과 오묘한 뜻을 형에게 물으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정약용은 형에게 말했습니다.

"우리 형제가 학문을 한 지 이미 여러 해 되었는데, 일찍이 동림사에서 맛본 것 같은 즐거움이 또 있었습니까?"

1782년 가을, 봉은사에서의 15일

두 형제는 봉은사에서 15일간 머물며 경의과를 익혔습니다. 정약용은 시를 지었습니다.

"우리의 아름다운 아가위꽃이 안팎의 집안 간에 서로 비치어 너그럽게 대하고 격려도 하니"

여기서 '아가위꽃[棣華]'은 [시경]에 나온 말로 우애 있는 형제를 뜻합니다. 정약용은 자신과 형의 관계를 아가위꽃에 빗댔습니다.

1797년 여름, 물고기 잡고 산나물 뜯던 날

승정원 좌부승지였던 정약용은 조정 승인 없이 근무지를 이탈해 고향으로 달려갔습니다. 고향이 그리웠기 때문입니다.

형제들과 배를 타고 물고기 50여 마리를 잡았고, 천진암에 가서 3일간 놀았습니다. 술 한 잔에 시 한 수를 읊으며 산나물 56종을 맛봤습니다.

"크고 작은 고기가 모두 50여 마리나 되어 조그만 배가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서 물 위에 뜬 부분이 겨우 몇 치에 불과했다."

벼슬살이의 고단함을 피해 고기 잡고 산나물 뜯는 형제의 모습이 생생합니다.

1784년 4월 15일: 천주교와의 운명적 만남

이날은 두 형제에게 운명적인 날이었습니다. 사돈 이벽(맏형 정약현의 처남)에게 천주교 교리를 듣고 심취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큰형수의 제삿날이어서 고향으로 내려간 형제는, 제사 후 이벽과 함께 한강에서 배를 타고 서울로 향했습니다. 두미협 쯤에서 두 형제는 이벽에게 천주교 교리를 들었습니다.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수표교에 사는 이벽의 집으로 가서 [천주실의], [칠극] 등 천주교 교리서를 빌려 읽으며 천주교 신앙에 깊이 빠졌습니다.

1801년 신유박해: 율정에서의 영원한 이별

정조가 세상을 떠난 후 탄압이 시작되었습니다. 1801년(순조 1) 순조를 대신해 수렴청정하던 정순왕후가 천주교 금압령을 내렸습니다.

스승 권철신을 비롯한 천주교 신자들이 사형당했고, 정약전은 신지도로, 정약용은 장기현으로 유배되었습니다. 신유박해였습니다.

큰형 정약현의 사위 황사영이 프랑스 함대 파견을 요청하는 백서를 북경에 보내려다 발각되면서 사태가 더 악화되었습니다. 황사영은 처형당했고, 정약전은 흑산도로, 정약용은 강진으로 이배되었습니다.

두 형제는 말머리를 나란히 하여 귀양길을 떠났으나, 나주 성북 율정점에서 손을 잡고 영원히 헤어졌습니다.

정약용이 남긴 시가 애틋합니다.

"제일 미운 것은 율정점의 문 앞길이 두 갈래로 난 것이네 원래 한 뿌리에서 태어났는데 낙화처럼 뿔뿔이 흩날리다니 천지를 넓게 볼 양이면 모두가 한 집안이건만 좀스레 내 꼴 내 몸만 살피자니 슬픈 생각 언제나 끝이 없지"

자산어보는 어떻게 탄생했나? 흑산도 15년의 결실

흑산도에 유배된 정약전은 직접 해양 생물을 관찰하고 정리해 [자산어보(玆山魚譜)]를 저술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해양생물학 전문 서적이라 할 만큼 치밀한 고증이 돋보입니다.

정약전은 서문에서 밝혔습니다.

"나는 섬사람들을 널리 만나보았다. 그 목적은 어보를 만들고 싶어서였다. 섬 안에 장덕순, 즉 창대라는 사람이 있었다. 성격이 조용하고 정밀하여, 초목과 어조 가운데 들리는 것과 보이는 것을 모두 세밀하게 관찰하고 깊이 생각하여 그 성직을 이해하고 있었다."

[자산어보] 저술에는 장덕순 등 흑산도 주민들의 도움이 절대적이었습니다. 현재 흑산도 사리의 사촌서당은 정약전이 유배 생활하며 [자산어보]를 집필한 곳으로, 유배문화공간으로 조성되어 있습니다.

정약전이 [자산어보]를 저술할 무렵 정약용에게 편지했고, 정약용은 "그림보다 글로 쓰는 게 좋겠다"고 조언했습니다. 정약전은 바다 생활 중 "조수가 발생하는 까닭은 달에 있다"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유배지에서도 이어진 학문 교류

정약용도 유배지 강진에서 자신이 지은 책을 정약전에게 보내 충고를 구했습니다. 정약전은 답장에서 말했습니다.

"그 새로운 뜻을 밝힌 것이 내가 생각해 낸 것과 판에 박은 듯 똑같아서, 곧바로 자네의 손을 잡고 내 아우야! 내 아우야! 등을 두드려 주고 싶었으나 그럴 수가 없었네."

기특한 동생의 등을 두드려주고 싶으나 그러지 못하는 아쉬움을 표현했습니다. 정약전은 정약용의 많은 저술에 일일이 답을 해주었고, 정약용은 형의 조언을 따르면 의심났던 글과 서로 맞지 않던 수가 모두 신기하게 들어맞았다고 회고했습니다.

1811년 겨울, 개고기 요리법을 보내다

육식을 제대로 못하는 형이 걱정된 정약용은 개고기를 먹을 것을 권유하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개 잡는 방법부터 요리법까지 구체적으로 적혀 있었습니다.

"호마(들깨) 한 말을 부쳐드리니 볶아서 가루로 만드십시오. 채소밭에 파가 있고 방에 식초가 있으면 이제 개를 잡을 차례입니다."

이 요리법은 정약용이 박제가에게 배운 것이었습니다. 형을 아끼고 생각하는 정약용의 마음이 느껴집니다.

1814년: 재회를 꿈꾸다

1814년 여름, 정약용이 유배에서 풀려날 것 같다며 흑산도로 가겠다는 사연을 전했습니다.

정약전은 "나의 아우로 하여금 나를 보기 위하여 험한 바다를 건너게 할 수 없으니 내가 우이보(牛耳堡)에 가서 기다릴 것이다"며 뭍에 가까운 우이도로 가려 했습니다.

그러자 흑산도 사람들이 들고 일어나 정약전을 붙잡았습니다. 정약전은 은밀히 우이도 사람에게 배를 가져오게 해 안개 낀 밤에 떠났습니다. 이튿날 아침 흑산도 사람들이 배를 몰아 뒤쫓아와 그를 다시 데려갔습니다.

정약용은 이 사연을 듣고 말했습니다.

"귀양살이하는 사람이 다른 섬으로 옮겨 가려 하자 본도의 백성들이 길을 막고 더 머물게 하였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형의 덕망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주는 일화입니다.

1816년: 우이도에서의 마지막

1년 후 정약전은 흑산도 사람들에게 형제간의 정의로 애걸해 겨우 우이도로 갔습니다. 하지만 형제의 재회는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1816년(순조 16) 정약전은 우이도에서 눈을 감았습니다. 그토록 사랑했던 아우를 다시 만나지 못하고 58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정약전과 정약용, 형제이자 평생의 멘토

바다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그리워하고 존경했던 두 형제. 유배지에서의 슬픔을 학문으로 승화시킬 수 있었던 것은 마음으로 의지하고 격려하는 서로의 존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형제이면서도 평생을 신뢰하는 벗이자 서로의 멘토로 살았던 정약전과 정약용. 그들의 삶과 저술은 조선후기 지성사를 더욱 풍요롭게 했습니다.

정약용은 형이 세상을 떠난 후 이렇게 썼습니다.

"외로운 천지 사이에 우리 손암 선생만이 나의 지기였는데, 이제는 잃어버렸으니, 앞으로는 비록 터득하는 바가 있더라도 어느 곳에 입을 열어 함께 말할 사람이 있겠느냐."

정약전. [자산어보]의 저자이기 전에, 정약용의 멘토이자 지기였던 실학자. 흑산도 15년 유배 생활 중 해양생물학의 기초를 닦고, 끝내 아우를 만나지 못하고 우이도에서 생을 마감한 그는 조선 후기 실학사상의 숨은 거목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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