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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 왜 개혁가에서 권력 망령이 되었나? - 파란만장한 78년의 삶

by 정보정보열매 2025. 1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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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 왜 개혁가에서 권력 망령이 되었나? - 파란만장한 78년의 삶

 

 

"서양의 오랑캐가 침략해 오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해할 수밖에 없고, 화해를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

전국에 세워진 척화비에 새겨진 글귀다. 흥선대원군의 쇄국 의지를 보여주는 상징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그를 평가하기에는 그의 삶이 너무 복잡하다.

건달로 위장해 목숨을 지켰던 청년, 12살 아들을 왕으로 만들고 10년간 조선을 개혁한 섭정, 서원을 철폐하고 양반에게 세금을 매긴 개혁가, 경복궁 중건으로 백성을 수탈한 권력자, 쇄국으로 근대화 기회를 날린 보수주의자, 아들과 며느리와 권력 투쟁을 벌인 집요한 정치인.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은 한 사람 안에 이 모든 모습을 담고 있다. 그래서 오늘날까지도 평가가 엇갈린다. 개혁 정치가인가, 보수적 국수주의자인가?

건달로 위장한 왕족의 생존 전략

이하응은 혈통으로 보면 인조의 셋째 아들 인평대군의 8세손이다. 왕권과 그다지 가까운 왕족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버지 남연군이 정조의 이복형제인 은신군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왕위와 가까워진 것이다.

하지만 19세기 초 안동 김씨 세도정치 상황에서 왕위와 가까운 왕족이라는 것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였다. 안동 김씨들은 자신들이 통제할 수 있는 무능한 왕을 원했다. 조금이라도 왕의 재목으로 보이는 왕족은 역모라는 무서운 누명을 뒤집어쓰고 죽었다.

이하응이 선택한 생존 전략은 건달로 위장하는 것이었다. 야심 없는 파락호를 자처했다. '궁도령', '상갓집 개'라는 치욕적인 별명까지 얻으며 세도가들의 눈을 피했다.

하지만 이것은 연기였다. 그는 아무도 모르게 조대비와 연줄을 댔다. 조대비는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의 세자비로, 아들 헌종이 왕위에 올랐지만 안동 김씨를 친정으로 둔 시어머니 순원왕후에게 밀려 한 많은 궁중 생활을 했던 비운의 대비였다.

이하응은 조대비의 조카 조성하와 친교를 맺어 조대비에게 접근했다. 그리고 철종이 후사 없이 죽을 경우 자신의 둘째 아들 명복(후날의 고종)을 왕위계승자로 지명하도록 설득했다.

1863년 12월, 철종이 사망하자 조대비는 약속대로 12살 명복을 왕으로 지명했다. 이하응은 조선 역사상 유일하게 왕의 자리에 오른 적이 없으면서 살아 있는 왕의 아버지가 되었다. 흥선대원군의 탄생이다.

10년간의 개혁 정치

조대비는 수렴청정을 하면서 정책 결정권을 흥선대원군에게 주었다. 오랫동안 세도가 양반들에게 무시당하며 절치부심 기회를 노리던 그는 시정의 건달 행세를 하며 깨달은 문제점들을 개혁으로 해결하기 시작했다.

안동 김씨 축출과 인재 등용

우선 19세기 초부터 시작된 세도정치의 고리를 끊었다. 안동 김씨 주류들을 대거 정계에서 몰아냈다. 다만 국정 공백을 막기 위해 김병학 등 일부와는 손을 잡았다. 당파를 초월한 인재 등용과 부패 관리 척결에 힘썼다.

서원 철폐

조선 후기 오랫동안 계속된 붕당 간 갈등과 국가 재정 파탄의 원인이 전국에 널리 퍼진 서원에 있다고 보고, 47개의 중요한 서원을 제외한 모든 서원을 철폐했다. 서원은 명목상 교육기관이었지만 실제로는 양반들의 정치적 근거지이자 면세 혜택을 누리는 곳이었다.

왕권 강화와 제도 개혁

  • 비변사 폐지
  • 양반에게도 세금 징수
  • 법전 간행으로 법률 제도 확립
  • 의복 제도 개혁으로 사치 근절
  • 사창제도 실시로 지방 관리의 부정 방지

이런 개혁은 양반 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양반들은 크게 반발했다. 하지만 국가에 대한 의무를 양인에게만 전가하던 시스템이 바뀌면서 국고는 풍족해졌고 양인의 부담은 줄어들었다.

개혁의 그림자: 경복궁과 쇄국

하지만 흥선대원군의 정치에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다.

경복궁 중건의 무리수

왕권 강화를 상징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무리하게 경복궁을 중건했다. 당백전과 원납전으로 경제 구조를 흐렸고, 백성의 삶은 다시 피폐해졌다. 개혁 초기에 쌓은 민심을 스스로 무너뜨렸다.

천주교 박해와 쇄국 정책

서구의 새로운 사상이 왕권 중심의 유교 사상을 교란시킬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천주교도들을 박해했다(병인박해). 쇄국 정책을 펴 국제 관계를 악화시키고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일 기회를 놓쳤다.

병인양요(1866)와 신미양요(1871)를 막아낸 것은 집권 초기 개혁으로 강해진 국방력의 결과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서구 세력과 평화롭게 수교할 기회를 놓친 사건이기도 했다.

시대착오적 왕권 강화

조선은 원래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표방한 나라였다. 하지만 19세기에 이 조화는 세도정치라는 신권의 독주로 무너졌다. 흥선대원군은 비정상적으로 커진 신권을 제압하기 위해 왕권 강화를 도모했다.

만약 조선이 세계사의 큰 흐름에 휩쓸리지 않았다면 이런 개혁은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때는 19세기 후반. 산업혁명을 통해 발달한 서양 국가들이 제국주의화되어 동양으로 진출하고 있었다.

이런 서세동점의 위기 속에서 흥선대원군의 왕권 강화 집착은 시대착오적이었다. 그는 변화하는 세계를 읽지 못했다. 아니, 읽으려 하지 않았다.

아들과의 권력 투쟁

섭정이나 수렴청정은 아무리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다 해도 임시적이라는 한계가 있다. 어리다는 이유로 권력을 위임받은 왕은 성장하면 반드시 그 권력을 되찾으려 한다.

12살에 왕좌에 오른 고종이 22세가 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자신이 왕인 나라를 직접 다스리고 싶어 했다. 너무나 강력한 아버지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했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은 10년간 휘두르던 권력을 넘겨주지 않으려 했다. 부자간의 권력 투쟁이 시작되었다.

고종과 명성황후는 최익현과 반 흥선대원군 세력을 부추겼다. 최익현은 이항로의 문인으로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에 악감정을 품고 있었다. 그는 흥선대원군의 실정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리고 퇴진을 강력히 주장했다.

1873년, 고종은 친정을 선포했다. 흥선대원군은 원치 않는 정계 은퇴를 했다. 운현궁에서 궁궐로 들어가는 문이 폐쇄되면서 대원군의 섭정도 끝났다.

권력에 집착한 말년

강제로 물러난 탓에 흥선대원군은 정계 복귀를 호시탐탐 노렸다. 그 과정은 그다지 산뜻하지 못했다. 권력에 대한 집착은 이전에 보여준 확고한 개혁 의지와 경세가로서의 품위마저 손상시켰다.

재집권에 대한 야망은 며느리 명성황후와의 갈등으로 이어졌다. 외척의 정치 참여를 극단적으로 막았던 그의 섭정 기간과는 상반되게, 그가 권력을 잃은 후 정국은 완전히 왕비의 친정인 민씨 가가 주도하고 있었다.

끝없는 정계 복귀 시도

  • 고종을 폐립하고 다른 아들을 왕으로 만들려는 역모에 연루
  • 1882년 임오군란 때 난도를 이끌고 궁궐에 들어가 잠시 정권 장악 (하지만 청나라에 납치됨)
  • 1894년 갑오농민전쟁 때 동학 세력에 접근
  • 갑오경장 때는 일본과 손잡고 재집권 시도

정권을 다시 잡기 위해 그는 어떤 세력과도 제휴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위안스카이, 동학, 일본... 가리지 않았다.

을미사변의 그림자

1895년, 고종은 대원군의 정치 활동을 대부분 제한하는 조치를 취했다. 사실상 유폐나 다름없는 생활. 하지만 그 속에서도 흥선대원군은 정계 복귀를 꿈꿨다.

만년의 헛된 꿈은 며느리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미사변)과 관련해 일본 공사 미우라에게 이용당하는 빌미를 제공했다. 을미사변 이후 대원군은 또다시 잠시 정권을 잡지만, 신변에 위험을 느낀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아관파천)하면서 다시 축출되었다.

1898년, 흥선대원군은 78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개혁가인가, 수구파인가?

흥선대원군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개혁가로서의 면모:

  • 세도정치 타파
  • 서원 철폐로 양반 특권 제한
  • 양반에게도 세금 징수
  • 부패 관리 척결
  • 당파 초월한 인재 등용

보수주의자로서의 면모:

  • 쇄국 정책으로 근대화 기회 상실
  • 천주교 박해
  • 경복궁 중건으로 백성 수탈
  • 시대착오적 왕권 강화 집착

두 얼굴 모두 흥선대원군의 진실이다. 그는 국내 문제에 대해서는 과감한 개혁가였지만, 국제 정세에 대해서는 완고한 보수주의자였다.

권력 망령의 비극

더 안타까운 것은 말년의 행적이다. 10년간 강력한 개혁을 추진한 정치가가 권력을 잃자 어떤 수단도 가리지 않고 복귀를 시도했다. 심지어 외세까지 끌어들였다.

이것은 개인의 비극이기도 하지만 시대의 비극이기도 하다. 19세기 후반 조선은 급변하는 세계사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다. 이 시기에 필요한 것은 개혁과 개방이었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은 개혁은 했지만 개방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권력을 잃자 개혁의 명분조차 내팽개치고 권력 탈환에만 집착했다. 이것이 그의 가장 큰 한계다.

역사의 아이러니

흥선대원군의 삶에는 많은 아이러니가 있다.

  • 건달로 위장해 목숨을 지킨 왕족이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 외척 정치를 막으려 했지만 자신이 물러나자 외척(민씨) 정치가 시작되었다.
  • 왕권 강화를 위해 개혁했지만 그 왕(고종)이 자신을 몰아냈다.
  • 서양 오랑캐를 막았지만 결국 조선은 일본에 망했다.
  • 개혁가로 시작했지만 권력 망령으로 끝났다.

마치며: 시대를 잘못 만난 개혁가

흥선대원군은 분명 능력 있는 정치가였다. 10년간의 개혁은 세도정치로 무너진 조선을 어느 정도 회복시켰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막아낸 것도 그의 개혁 덕분이었다.

하지만 그는 시대를 읽지 못했다. 19세기 후반은 쇄국으로 버틸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다. 왕권 강화만으로는 부족했다. 근대화와 개방이 필요했다.

더 큰 문제는 권력에 대한 집착이었다. 훌륭한 개혁을 했지만 권력을 놓지 못했다. 그리고 권력을 빼앗기자 어떤 수단도 가리지 않고 복귀를 시도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개혁가로서의 명분을 잃었다.

"참으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것에는 틀림이 없는 인물"이라는 평가가 정확하다. 개혁가이자 수구파, 애국자이자 권력 망령. 이 모든 모습이 한 사람 안에 공존했다.

결국 흥선대원군의 비극은 개인의 비극이 아니라 시대의 비극이었다. 급변하는 세계사의 흐름 속에서 조선이라는 낡은 시스템을 개혁하려 했지만, 그 개혁은 불완전했고, 때는 이미 늦었다.

우리는 그에게서 무엇을 배워야 할까? 개혁의 용기도 중요하지만, 시대를 읽는 혜안도 중요하다는 것. 그리고 권력은 언젠가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 권력에 집착하는 순간, 모든 업적이 무너진다는 것.

흥선대원군은 개혁가로 기억되기를 원했을 것이다. 하지만 역사는 그를 시대를 잘못 만난 개혁가이자, 권력에 집착한 정치인으로 기록한다. 그것이 그의 비극이고, 우리가 기억해야 할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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