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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이야기

조선시대 과거시험 커닝, 콧구멍에 숨긴 족보부터 땅굴 답안지까지

by 정보정보열매 2026. 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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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과 부정행위의 역사는 함께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오늘날 수능이나 공무원 시험에서 부정행위가 적발되면 큰 뉴스가 되지만, 사실 이런 일은 수백 년 전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조선시대 과거시험은 입신양명의 유일한 길이었기에, 선비들의 합격 열망은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그만큼 부정행위도 기상천외했습니다. 콧구멍에 커닝페이퍼를 숨기고, 땅속으로 대나무 통을 연결해 답안지를 주고받고, 심지어 글자도 모르는 사람이 돈으로 합격을 사기도 했습니다. 오늘은 조선시대 과거시험의 놀라운 부정행위 세계를 살펴보겠습니다.

과거시험, 조선 선비들의 목숨 건 전쟁

과거시험이 얼마나 치열했는지 연암 박지원이 과거에 급제한 지인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만에 하나'가 되겠다고 시험장에 들어갔다가 서로를 밟고 넘어져 죽고 부상한 자가 부지기수로 '열에 아홉'은 저승 문턱에 갔다 오게 되니, 그대에게 '만에 하나'의 영광을 축하할 마음은 없지만, '열에 아홉'은 저승에 갈 위험한 시험장에 더 이상 들어가지 않아도 된 것만은 축하한다."

과장된 표현이 아닙니다. 실제로 과거시험장에서는 좋은 자리를 잡기 위한 경쟁이 치열했습니다. 조선 후기에는 '선접꾼'이라 불리는 건장한 행동대원들이 시험 전날부터 진을 치고 있다가 새벽에 입장해 좋은 위치를 선점했습니다. 이들은 자리 선점 대가로 돈을 받았습니다. 시험 난이도도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사서삼경을 암기하는 것은 기본이고, 자치통감 수준의 역사서 내용까지 꿰고 있어야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부정행위의 유혹은 피하기 어려웠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이런 부정행위를 '감인고(堪忍苦)'라고 불렀습니다.

기상천외한 커닝 방법들

조선시대 과거시험 부정행위는 그 종류가 매우 다양했습니다. 가장 고전적인 방법은 커닝페이퍼였습니다. '협서(挾書)'라고 불린 이 방법은 붓대 끝에 작은 종이를 숨기거나, 옷 안에 커닝페이퍼를 넣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중국에서는 사서삼경 70만 자를 쥐수염으로 만든 붓으로 깨알같이 적어놓은 커닝용 속옷까지 등장했습니다.

더 기발한 방법도 있었습니다. '의영고(義盈庫)'는 콧구멍 속에 커닝 종이를 숨기는 행위를 말합니다. 그 작은 종이에 필요한 내용을 적어 넣었다니, 그 정성이면 차라리 외우는 게 나았을 것 같기도 합니다. 귓구멍에 종이를 숨기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고반(顧盼)'은 고개를 돌려 옆 사람의 답안지를 베끼는 행위입니다. 부정행위의 기본 중의 기본이었습니다. '낙지(落地)'는 답안지를 일부러 땅에 떨어뜨려 다른 사람이 볼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응시자끼리 짜고 하기도 했고, 매수된 시험관이 행하기도 했습니다. '설화(說話)'는 옆사람과 소곤소곤 의견을 나누어 답을 작성하는 것이었습니다.

시험관을 속이는 10개의 도장

조선 조정도 부정행위에 손 놓고 있지 않았습니다. 과거시험장에는 '금란관(禁亂官)'이라는 시험 감독관이 있었는데, 이들은 부정행위 유형별로 무려 10개의 도장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부정행위가 발각되면 그 수법에 따라 응시자의 시험지에 해당 도장을 찍어 채점에 참고하도록 했습니다.

예를 들어 남의 것을 훔쳐보려고 심하게 눈을 굴리거나 고개를 움직이면 '고반(顧盼)'이라는 도장이 찍혔습니다. 옆사람이 듣게끔 중얼거리면 '음아(吟啞)', 감독관 눈을 피해 시험지를 바꾸면 '환관(換卷)'이라는 도장이 찍혔습니다. 초고지를 통해 부정을 저지르다 들키면 '낙지(落紙)' 도장이 찍혔습니다. 도장이 찍힌 시험지는 당연히 감점되거나 무효 처리되었습니다.

권력형 부정행위, 대필과 대리시험

개인이 혼자 하는 커닝보다 더 심각한 것은 권력형 부정행위였습니다. '대필(代筆)'은 권력층에 있는 사람이 시험 문제를 미리 알아내어 명문장가에게 글을 짓게 한 뒤, 그것을 외워서 시험장에 가는 방법이었습니다. 조선 말기 세도가 자제들이 이 방법으로 적지 않게 합격했습니다.

'대인(代人)'은 아예 대리시험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사진 첨부가 없던 시대라 수월했겠지만, 대체로 감독관과 내통한 권력형 대리시험이었습니다. 1566년(명종 21년)에는 글자도 잘 모르는 심진, 심자, 심전 세 사람이 대리시험으로 생원·진사시에 합격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성균관 유생들은 그들을 '상가상사(償價上舍)', 즉 '돈 주고 산 생원·진사'라고 비아냥거렸습니다.

시험관과 응시자가 결탁하는 '혁제(赫蹄)'도 있었습니다. 이를 막기 위해 암송 시험인 '강경(講經)' 때는 응시자와 시험관 사이에 장막을 쳤습니다. 또한 '역서(易書)'라 하여 시험관이 응시자의 글씨를 알아보지 못하도록 별도의 필사자가 답안을 다시 베껴 쓰게 하는 제도도 있었습니다.

땅굴로 답안지를 보내다

숙종 31년(1705년) 2월, 성균관 앞마을의 한 아낙이 나물을 캐다가 놀라운 것을 발견했습니다. 땅에 묻힌 노끈을 잡아당겼더니 대나무 통이 나왔습니다. 조사해보니 이 대나무 통은 땅속을 통해 과거시험이 열리는 성균관 반수당(泮水堂)까지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부정행위자들은 대나무 통 속에 노끈을 넣어 시험장에서 문제를 노끈에 매달아 밖으로 보내고, 밖에 있는 사람이 답안을 작성해 다시 노끈에 묶어 보냈던 것입니다. 오늘날로 치면 시험장에 땅굴을 파서 답안지를 주고받은 셈입니다. 당국이 조사를 했으나 범인은 끝내 잡지 못했습니다.

비둘기의 귀소본능을 이용한 방법도 있었다고 합니다. 비둘기에게 문제를 적어서 날려 보내면 밖에서 답안이 돌아오는 식이었습니다. 쥐수염으로 만든 붓으로 아주 작은 글씨를 써서 보냈다고 합니다.

부정행위 처벌은 어땠을까

법적으로 과거시험 부정행위에 대한 처벌은 매우 엄격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답안지를 베껴 쓰면 곤장 100대에 3년간 막노동을 해야 했습니다. 미리 책을 들고 오면 3년간 응시자격이 박탈되었습니다. 시험관이나 중간 브로커도 영구히 관직에 임용될 수 없었습니다.

합격자 발표가 끝나 급제자 명단에 이름이 올랐더라도, 추후 부정이 적발되면 '삭과(削科)'라 하여 과거 급제가 취소되었습니다. 부정행위가 심각하여 시험 전체의 공정성에 문제가 있으면 '파방(罷榜)'이라 하여 시험 전체를 무효화하는 조치가 내려지기도 했습니다. 고종대에는 수십 명이 과거 부정행위로 제주도에 유배를 갔고, 명·청 시기에는 부정행위 적발 시 사형에 처해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조선 말기로 갈수록 이런 처벌은 유명무실해졌습니다. 뇌물을 주는 방식으로 적당히 무마되는 경우가 많았고, 세도가 자제들은 천자문을 몰라도 합격했습니다. 임금이 직접 주관한 시험장에서도 술판과 싸움판이 벌어지는 '난장판'이 되었습니다. 실제로 '난장판'이라는 말의 유래가 조선 말기 과거시험장의 혼란에서 나왔다는 설이 있을 정도입니다.


시험이 있는 곳에 부정행위가 있다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한 진리인 것 같습니다. 콧구멍에 커닝페이퍼를 숨기고, 땅굴을 파서 답안지를 주고받던 조선시대 선비들의 모습은 오늘날 스마트워치나 무선이어폰으로 부정행위를 시도하는 수험생들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그 기발한 잔머리를 공부에 쏟았다면 정정당당하게 장원급제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하지만, 부정행위의 역사만큼은 반복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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