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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이야기

조선시대 과거시험 커닝 방법, 콧구멍 속 쪽지부터 땅굴까지

by 정보정보열매 2026. 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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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이나 공무원 시험에서 부정행위가 적발되면 큰 뉴스가 됩니다. 그런데 시험과 부정행위의 역사는 생각보다 오래되었습니다. 조선시대 과거시험에서도 온갖 기상천외한 커닝 방법이 동원되었고, 조선 후기에는 시험장이 난장판이 되어 '난장'이라는 말의 유래가 되었다고 합니다. 콧구멍에 쪽지를 숨기고, 붓대 속에 커닝페이퍼를 넣고, 심지어 땅굴을 파서 답안지를 주고받기까지 했던 조선 선비들의 치열했던 부정행위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입신양명을 위한 유일한 길, 과거시험

조선시대에 관리가 되어 출세하는 정상적인 방법은 오직 과거에 합격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연암 박지원은 과거에 급제한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만에 하나가 되겠다고 시험장에 들어갔다가 서로를 밟고 넘어져 죽고 부상한 자가 부지기수"라고 썼을 정도로 경쟁이 치열했습니다. 문과 대과의 경우 3년에 한 번 열리는 식년시에서 최종 합격자는 고작 33명에 불과했습니다. 전국 팔도의 수천 명 선비들이 몇십 명의 자리를 놓고 경쟁했으니, 그 치열함은 오늘날 어떤 시험과도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부정행위의 유혹은 강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실제로 숙종 시대에는 과거시험의 대표적인 폐단 여덟 가지를 정리한 '과거 팔폐'가 언급될 정도로 부정행위가 만연했습니다. 법으로는 다른 사람의 답안지를 베껴 쓸 경우 곤장 100대에 3년간 강제노역에 처했고, 책을 몰래 가져온 경우에도 3년간 응시자격이 박탈되었습니다. 하지만 처벌이 아무리 엄해도 부정행위는 끊이지 않았습니다.

상상을 초월하는 커닝 방법들

조선시대 커닝 방법 중 가장 기본적인 것은 '협서'였습니다. 오늘날의 커닝페이퍼와 같은 것으로, 선비들은 작은 종이에 사서삼경의 내용을 깨알같이 베껴 적어 숨겨두었습니다. 문제는 이 쪽지를 어디에 숨기느냐였는데, 여기서 선비들의 창의력이 폭발했습니다. '의영고'라고 불리는 방법은 콧구멍 속에 쪽지를 숨기는 것이었고, 붓대 끝에 작은 종이를 말아 넣는 방법도 흔했습니다. 중국에서는 속옷 안쪽에 사서삼경 70만 자를 쥐수염으로 만든 붓으로 깨알같이 적어둔 커닝용 속옷까지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고반'은 고개를 돌려 옆사람의 답안지를 훔쳐보는 행위를 말합니다. 부정행위의 가장 기본 중의 기본이었습니다. '낙지'는 답안지를 일부러 땅에 떨어뜨려 다른 사람이 볼 수 있게 하는 수법이었고, '설화'는 옆사람과 소곤소곤 의견을 나누며 답을 작성하는 것이었습니다. 시험장에는 '금란관'이라는 감독관이 배치되어 이런 부정행위를 감시했는데, 적발되면 해당 수법에 따라 각기 다른 도장을 답안지에 찍어 채점에 반영했습니다.

땅굴을 파고 비둘기를 날리다

가장 대담한 부정행위 사례는 숙종실록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균관 앞마을의 한 아낙이 나물을 캐다가 땅에 묻힌 노끈을 발견했는데, 잡아당기니 대나무 통이 나왔습니다. 이 대나무 통은 땅속으로 과거시험이 열리는 성균관 반수당까지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부정행위자들은 이 통로를 통해 시험문제를 밖으로 빼돌리고, 외부에서 작성한 답안지를 다시 받아온 것입니다. 조사가 이루어졌지만 범인은 끝내 잡히지 않았습니다.

비둘기의 귀소본능을 이용한 방법도 있었습니다. 시험장에서 문제를 적어 비둘기 발에 묶어 날려 보내면, 밖에서 대기하던 사람이 답안을 작성해 다시 비둘기를 날려 보내는 방식이었습니다. 이때도 쥐수염으로 만든 붓으로 작은 종이에 깨알 글씨를 썼다고 합니다. 권력형 부정행위로는 '대필'이 있었는데, 권력층이 시험문제를 미리 알아내어 유명 문장가에게 글을 짓게 한 뒤 그것을 외워서 시험장에 가는 수법이었습니다.

시험장이 난장판이 된 조선 후기

조선 후기로 갈수록 과거시험장의 풍경은 점점 혼란스러워졌습니다. 원칙적으로는 응시자 본인만 입장해야 했지만, 양반들은 먹을 갈아주거나 시중을 드는 하인을 대동하는 것이 관례처럼 되었습니다. 이것이 악용되면서 '수종협책'이라 하여 하인들이 커닝을 돕거나 답안을 대신 작성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과거시험장을 그린 그림을 보면 파라솔을 펴고 느긋하게 앉아 다과회를 즐기는 듯한 장면까지 등장합니다.

'선접꾼'이라 불리는 건장한 행동대원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과거 시험 전날 밤부터 시험장 입구에 진을 치고 있다가 새벽에 입장하여 문제가 걸리는 현제판 주위의 좋은 자리를 선점했습니다. 그리고 돈을 받고 그 자리를 팔았습니다. 시험장 안에서 술판이 벌어지고, 장사꾼이 막걸리를 팔러 들어오는 지경까지 이르렀습니다. 조선 말기에는 글자도 잘 모르는 사람이 대리시험으로 생원, 진사에 합격하는 일도 있었는데, 성균관에서는 이들을 '상가상사', 즉 돈 주고 산 생원이라며 비아냥거렸다고 합니다.

부정행위의 대가

부정행위가 적발되면 형벌과 함께 '정거'라 하여 과거시험 응시를 일정 기간 제한하는 조치가 내려졌습니다. 이미 합격자 발표가 끝나 급제자 명단에 올라갔더라도 추후 부정이 적발되면 '삭과'라 하여 합격이 취소되었습니다. 부정행위가 너무 심각하여 시험 전체의 공정성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되면 '파방'이라 하여 해당 시험 전체를 무효화하기도 했습니다. 고종 시대에는 수십 명이 과거 부정행위로 제주도에 유배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부정행위는 조선이 망할 때까지 근절되지 않았습니다. 뇌물과 정실, 문벌의 높고 낮음, 당파의 소속에 따라 합격과 불합격이 결정되는 일이 빈번해지면서 과거제도 자체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습니다. 결국 1894년 갑오개혁 때 과거제도는 완전히 폐지되고 새로운 관리 등용법이 도입되었습니다.


시험이 있는 곳에 부정행위가 있다는 말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진리인 듯합니다. 조선시대 선비들이 커닝페이퍼를 만들고 땅굴을 파고 비둘기를 날리던 그 열정을 공부에 쏟았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한편, 입신양명의 유일한 통로였던 과거시험에 목숨을 걸 수밖에 없었던 당시 상황도 이해가 됩니다. 어쩌면 부정행위의 역사는 공정한 경쟁을 향한 인류의 끝없는 투쟁의 역사이기도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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