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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이야기

조선시대 여성은 정말 재혼을 못했을까, 드라마가 숨긴 진실

by 정보정보열매 2026. 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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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극 드라마를 보면 조선시대 과부는 평생 수절하며 외롭게 살아가는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남편이 죽으면 젊은 나이에도 재혼은 꿈도 꾸지 못하고, 시댁에서 며느리로 늙어가야만 하는 비극적인 운명이 당연한 것처럼 묘사되지요. 열녀문이 세워지고 정절을 지킨 여인이 칭송받는 장면도 자주 등장합니다. 그런데 과연 조선시대 모든 여성이 이렇게 살았을까요? 실제 역사 기록을 들여다보면 우리가 알고 있던 것과는 꽤 다른 모습이 나타납니다.

고려시대까지 재혼은 자유로웠다

놀랍게도 고려시대까지 여성의 재혼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계급을 막론하고 과부가 다시 결혼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고, 사회적으로 죄악시하지도 않았습니다. 심지어 왕비조차 재혼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고려 성종의 비였던 문덕왕후 유씨는 처음 흥덕원군과 결혼했다가 이혼한 후 다시 결혼하여 왕비가 되었습니다. 왕실에서도 이혼과 재혼이 가능했다는 것은 당시 사회가 여성의 재혼을 얼마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는지를 보여줍니다.

고려시대에는 남귀여가혼이라 하여 남자가 여자 집에 들어가 사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장가간다는 표현이 바로 여기서 유래한 것입니다. 이런 혼인 풍습 덕분에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상대적으로 높았고, 재산 상속에서도 딸과 아들이 균등하게 대우받았습니다. 여성이 이혼하거나 남편과 사별한 후 다시 결혼하는 것은 개인의 선택에 맡겨진 일이었습니다.

성종 때 시작된 재혼 금지의 역사

조선이 건국되고 성리학이 국가 이념으로 자리 잡으면서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조선 초기까지도 여성의 재혼은 비교적 자유로웠습니다. 결정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은 성종 8년인 1477년이었습니다. 이 해에 성종은 재가한 여성의 자손이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도록 하는 법을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재가녀 자손 금고법입니다.

당시 대부분의 대신들은 이 법에 반대했습니다.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고 홀로 남겨진 여성에게 평생 재혼하지 말라고 강요하는 것은 너무 가혹하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성종은 단호했습니다. 굶어 죽는 것은 작은 일이고 절개를 잃는 것은 큰 일이라며 법을 밀어붙였습니다.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는 유교적 이념이 법으로 강제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법은 경국대전에도 반영되어 재가녀의 아들과 손자는 과거 시험에 응시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16세기까지는 족보에도 두 번째 남편이라는 뜻의 후부 기록이 남아 있었지만, 이후로는 이마저도 삭제되었습니다. 양반 가문에서 여성의 재혼은 점점 더 금기시되어 갔습니다.

양반만 해당된 재혼 금지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재가녀 자손 금고법은 양반 계층에만 실질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 법의 핵심은 재혼한 여성의 자손이 과거 시험에 응시하지 못하고 관직에 나가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애초에 과거 시험이나 관직과 인연이 없는 평민이나 천민에게 이 법은 별 의미가 없었습니다.

조선시대 인구의 80에서 90퍼센트를 차지했던 것은 양반이 아닌 평민과 천민이었습니다. 이들에게 남편의 죽음은 곧 생계의 위기를 의미했습니다. 농사를 짓든 장사를 하든 혼자서 가족을 부양하기는 매우 어려웠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재혼은 생존을 위한 당연한 선택이었습니다. 유교적 이념보다 당장의 생활이 훨씬 중요했던 것입니다.

실제로 조선 후기 단성현 호적 대장을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홀아비의 재혼율은 평균 50퍼센트가 넘었습니다. 계층별로 보면 상층은 30.8퍼센트, 중층은 57.6퍼센트, 하층은 69.5퍼센트로 나타났습니다. 하층으로 갈수록 재혼율이 높았다는 것은 그만큼 하층 여성의 재혼도 빈번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층 남성의 재혼 상대가 30세 이상인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았는데, 이들 대부분은 결혼 경험이 있는 과부였을 것입니다.

조선시대에도 이혼이 있었다

재혼뿐 아니라 이혼도 존재했습니다. 드라마에서는 한번 결혼하면 죽을 때까지 함께하는 것처럼 그려지지만, 실제로는 다양한 형태의 이혼이 있었습니다. 물론 이혼의 주도권은 대부분 남성에게 있었습니다. 칠거지악이라 하여 시부모에게 불손하거나, 아들을 낳지 못하거나, 음란하거나, 질투하거나, 나쁜 병이 있거나, 말이 많거나, 도둑질을 한 경우 남편이 아내를 내쫓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칠거지악에 해당하더라도 삼불거라는 예외 조항이 있었습니다. 시부모의 삼년상을 함께 치렀거나, 가난할 때 결혼한 조강지처이거나, 아내가 돌아갈 곳이 없는 경우에는 이혼할 수 없었습니다. 세종 때 문신 이미라는 사람이 아내 최씨가 아들을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내쫓고 새 아내를 맞았는데, 조정에서는 최씨가 시부모 삼년상을 치렀으므로 삼불거에 따라 이혼이 무효라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평민과 천민 사이에서는 사정파의라 하여 말로 합의하면 이혼이 가능했습니다. 양반처럼 복잡한 절차가 필요 없었던 것입니다. 이혼의 증표로 옷의 앞섶을 서로 잘라주는 수세라는 풍습도 있었습니다. 또한 남편이 아내에게 할급휴서라는 이혼 문서를 주면, 이 문서를 가진 여성은 재혼이 가능했습니다.

호적에 남은 재혼의 흔적

조선 후기 호적은 공식 문서임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재혼 사실을 보여주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호적에는 의자녀라는 표현이 등장하는데, 이것은 재혼한 여성이 전남편에게서 낳은 자녀를 새 남편의 호적에 올릴 때 사용한 표현입니다. 데리고 들어간 자식이라는 뜻입니다. 이부녀, 즉 아버지가 다른 딸이라는 표현도 같은 맥락에서 사용되었습니다.

제주도 대정현의 호적과 당시 현감의 일기를 분석한 연구에서는 하층민의 복잡한 가족 관계가 드러납니다. 고자라는 하급 관리였던 김몽득이라는 사람은 두 명의 처와 한 명의 첩을 두었는데, 그의 후처 임소사도 초혼이 아니었고 과년한 딸을 데리고 왔습니다. 첩인 김예도 마찬가지로 초혼이 아니었으며 딸을 데리고 왔습니다. 이처럼 하층민 사이에서는 재혼이 매우 빈번했고, 양반가와 같은 엄격한 혼례 절차도 갖추지 못했습니다.

400년 만에 폐지된 재혼 금지

성종 때 만들어진 재가녀 자손 금고법은 무려 400년 넘게 유지되었습니다. 그동안 수많은 젊은 과부들이 재혼하지 못하고 평생을 홀로 살아야 했습니다. 특히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에는 전쟁에서 남편을 잃은 여성들이 재혼할 수 없어 큰 고통을 겪었습니다. 양란 이후 사회 질서 회복을 명분으로 열녀에 대한 강조가 더욱 심해졌고, 남편을 따라 죽거나 정조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버린 여성이 포상을 받는 일이 급증했습니다.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은 근대화 과정에서였습니다. 1894년 동학 농민군은 폐정개혁안에서 청춘과부의 재가를 허용하도록 요구했습니다. 같은 해 갑오개혁 때 마침내 과부의 재가는 귀천을 논하지 않고 본인의 의사대로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4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여성의 재혼을 죄악시했던 법이 비로소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입니다.


조선시대 여성의 재혼 문제는 생각보다 복잡합니다. 드라마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모든 여성이 평생 수절해야 했던 것은 아닙니다. 재혼 금지는 주로 양반 계층에 해당했고,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했던 평민과 천민 사이에서는 재혼이 일상적이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조선시대 여성의 삶이 자유로웠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 속에서 여성은 분명 많은 제약을 받았습니다. 다만 역사를 바라볼 때는 계층에 따른 차이를 이해하고, 실제 사람들의 삶이 이념이나 법과 항상 일치하지는 않았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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