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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이야기

조선시대 과거시험 커닝 수법, 코 속 쪽지부터 땅굴까지 상상초월

by 정보정보열매 2026. 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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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수능이나 공무원 시험에서 부정행위가 적발되면 큰 뉴스가 됩니다. 시험 무효는 물론이고 향후 응시 자격까지 박탈당하는 엄중한 처벌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조선시대 과거시험은 어땠을까요? 혹시 옛날에는 선비들이 모두 정정당당하게 실력으로만 승부했을 거라고 생각하신다면 큰 오산입니다. 조선시대 과거시험장은 온갖 기상천외한 부정행위가 판치는 전쟁터나 다름없었습니다. 콧구멍에 커닝페이퍼를 숨기는 것은 기본이고, 땅속에 대나무 통을 매설해서 답안을 주고받는 일까지 벌어졌으니 말입니다. 오늘은 상상을 초월하는 조선시대 커닝의 세계로 여러분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과거팔폐, 숙종 시대에 정리된 여덟 가지 부정행위

숙종 시대에 이르러 과거시험의 폐단이 너무 심해지자 조정에서는 대표적인 부정행위 여덟 가지를 정리하여 과거팔폐라 불렀습니다. 그중 가장 기본적인 것이 고반이었습니다. 고반은 고개를 돌려 옆사람의 답안지를 훔쳐보는 행위로, 오늘날로 치면 컨닝의 가장 고전적인 형태입니다. 시험 감독관인 금란관은 이런 행위를 발견하면 즉시 해당 응시자의 시험지에 고반이라는 도장을 찍었습니다. 눈을 심하게 굴리거나 고개를 수상하게 움직이기만 해도 도장이 찍혔으니, 요즘 CCTV 감시보다 더 촘촘한 감시였던 셈입니다.

설화는 옆사람과 속삭이며 의견을 나누는 행위를, 낙지는 답안지를 일부러 땅에 떨어뜨려 다른 사람이 볼 수 있게 하는 수법을 말합니다. 옆사람이 들을 수 있게 중얼거리면 음아라는 도장이, 감독관 몰래 시험지를 바꿔치기하면 환관이라는 도장이 찍혔습니다. 이렇게 부정행위 유형별로 열 가지가 넘는 도장이 준비되어 있었다고 하니, 그만큼 부정행위가 다양하고 빈번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도장이 찍힌 시험지는 채점에서 불이익을 받았고, 심한 경우 즉시 퇴장당했습니다.

콧구멍 속 쪽지와 속옷에 쓴 글씨

협서는 오늘날의 커닝페이퍼에 해당하는 것으로, 작은 종이에 핵심 내용을 깨알같이 적어 숨겨 들어가는 수법입니다. 그런데 그 숨기는 장소가 정말 기상천외했습니다. 의영고라 불린 수법은 무려 콧구멍 속에 커닝 종이를 숨기는 것이었습니다. 코가 막힐 정도로 작게 만든 종이를 돌돌 말아 콧속에 넣고 시험장에 들어갔다가, 감독관이 보지 않을 때 슬쩍 꺼내 펼쳐보았던 것입니다. 붓대 끝의 빈 공간에 작은 종이를 숨기는 것도 흔한 수법이었습니다.

중국 명청 시대에는 아예 조끼 안쪽 전체에 사서삼경의 내용을 깨알같이 적어 입고 들어가는 수법이 유행했는데, 조선에서도 이와 유사하게 종이로 만든 속옷에 글을 써서 입고 들어가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쥐수염으로 만든 아주 가는 붓으로 개미 눈알만 한 글씨를 빼곡히 적었다고 합니다. 과거시험은 유교 경전의 내용만 인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사서오경의 핵심 구절만 제대로 적어 넣으면 대부분의 문제에 대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땅굴을 파서 답안을 주고받다

1705년 숙종 31년, 성균관 앞마을에서 나물을 캐던 한 아낙이 이상한 것을 발견합니다. 땅속에서 노끈이 튀어나와 있었던 것입니다. 이상하게 여겨 잡아당기자 대나무 통이 딸려 나왔는데, 조사 결과 이 대나무 통은 성균관 담장 밑을 지나 과거시험이 치러지는 반수당까지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누군가 긴 노끈을 이은 대나무 통을 땅속에 묻고 비늘처럼 이어 구멍을 통하게 한 뒤 기와로 덮어 위장했던 것입니다.

부정행위자의 수법은 이러했습니다. 시험이 시작되면 시험장 안의 응시자가 문제를 적어 노끈에 매달아 보냅니다. 밖에서 대기하던 사람이 이를 받아 답안을 작성한 뒤 다시 노끈에 묶어 보내면, 응시자는 그것을 자기 답안지에 베껴 쓰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수사가 진행되어 시험장으로 이어진 노끈이 여러 개 추가로 발견되었지만, 끝내 범인은 잡지 못했습니다. 드라마 성균관스캔들에서도 이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장면이 등장했을 정도로 유명한 사건입니다.

대리시험과 권력형 부정행위

돈과 권력이 있으면 대리시험도 가능했습니다. 1566년 명종 21년에는 글자도 제대로 모르는 심진, 심자, 심전 세 사람이 대리시험으로 생원진사시에 합격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당시 성균관 유생들은 이들을 돈 주고 산 생원진사라는 뜻의 상가상사라고 비아냥거렸습니다. 사진이 없던 시대라 본인 확인이 어려웠고, 대부분 감독관과 미리 내통한 권력형 대리시험이었기 때문에 적발도 쉽지 않았습니다.

더 노골적인 권력형 부정행위도 있었습니다. 세도가의 자제들은 시험 문제를 미리 빼내어 명문장가에게 답안을 짓게 한 뒤 그것을 외워서 시험장에 들어갔습니다. 이것을 대필이라 불렀는데, 한말의 세도가 자제들이 이 방법으로 적지 않게 급제했다고 합니다. 조선 말기에 이르면 세도가의 자제는 천자문을 몰라도 합격했고, 임금이 직접 주관하는 시험장에서도 술판과 싸움판이 벌어질 정도로 기강이 무너졌습니다.

부정행위에 대한 처벌은 어땠을까

법적으로 부정행위에 대한 처벌은 상당히 엄격하게 규정되어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답안지를 베껴 쓴 경우에는 곤장 100대에 3년간 강제 노역에 처해졌고, 책을 미리 들고 들어간 경우에도 과거 응시 자격이 3년간 박탈되었습니다. 시험관이나 중간 브로커가 부정에 가담한 경우에는 영구히 관직에 임용될 수 없었습니다. 고종 대에도 수십 명이 과거 부정행위로 제주도 유배형에 처해졌고, 명청 시대 중국에서는 부정행위 적발 시 사형에 처해지기도 했습니다.

합격자 발표가 끝난 후에도 부정이 적발되면 삭과라 하여 급제를 취소당했습니다. 부정행위가 너무 심해 시험 전체의 공정성이 의심되면 파방이라 하여 해당 시험 전체를 무효화하는 극단적인 조치가 취해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법과 현실 사이에는 늘 간극이 있는 법입니다. 권력과 뇌물 앞에서 이런 처벌 규정은 종종 무력화되었고, 조선 후기로 갈수록 부정행위는 오히려 더 만연해졌습니다.


연암 박지원은 과거에 급제한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만에 하나가 되겠다고 시험장에 들어갔다가 서로 밟고 넘어져 죽고 다친 자가 부지기수라고 말입니다. 958년 고려 광종 때 시작되어 936년간 존속한 과거제도는 1894년 갑오개혁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인간의 욕망과 그것이 만들어낸 부정의 역사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반복되고 있습니다. 시험이 있는 곳에 부정이 따라다니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모양입니다. 다만 그 수법이 콧구멍 속 쪽지에서 스마트 워치로 바뀌었을 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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