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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이야기

조선시대 과거시험 커닝 방법, 콧구멍 속 쪽지부터 대리시험까지

by 정보정보열매 2026. 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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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도 각종 시험에서 부정행위가 논란이 되곤 합니다. 그런데 이런 부정행위의 역사가 꽤 오래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신가요? 조선시대 과거시험에서도 커닝은 끊이지 않았고, 그 수법은 오늘날 못지않게 교묘했습니다. 콧구멍 속에 쪽지를 숨기고, 노비를 공부시켜 대리시험을 보게 하고, 시험관을 매수해 답안지를 바꿔치기하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입신양명의 유일한 길이었던 과거시험, 그 치열한 경쟁 속에서 벌어진 부정행위의 온갖 수법을 살펴봅니다.

과거시험, 인생을 건 한판 승부

조선시대에 관직에 오르는 정상적인 방법은 과거에 합격하는 것이었습니다. 과거는 문과, 무과, 잡과로 나뉘었는데, 보통 과거라 하면 문과를 가리킬 정도로 문과의 비중이 컸습니다. 문과에 급제하면 양반 가문의 위상이 올라가고, 본인은 물론 자손 대대로 벼슬길이 열렸습니다. 그야말로 한 번의 합격으로 인생이 바뀌는 셈이었습니다.

문제는 경쟁률이 살인적이었다는 점입니다. 3년마다 치르는 정기 시험인 식년시의 경우 문과 최종 합격자는 고작 33명에 불과했습니다. 전국에서 수천 명이 몰려드니 합격률은 극히 낮았고, 평균 합격 연령이 30대였을 정도로 오랜 준비 기간이 필요했습니다. 심지어 70세가 넘어 급제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치열한 경쟁 속에서 부정행위의 유혹에 빠지는 사람이 생기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과거 팔폐, 여덟 가지 부정행위의 유형

숙종 시대에는 과거시험의 대표적인 폐단을 정리한 '과거 팔폐(科擧八弊)'라는 말이 생겼습니다. 그만큼 부정행위가 만연했다는 뜻입니다. 기록에 남아 있는 부정행위의 수법은 실로 다양했습니다.

가장 기본적인 것은 '고반(顧盼)'이었습니다. 고개를 돌려 옆사람의 답안지를 훔쳐보는 것으로, 지금도 가장 흔한 커닝 방법이지요. 시험장에는 '금란관(禁亂官)'이라는 감독관이 배치되어 있었는데, 심하게 눈을 굴리거나 고개를 움직이는 응시자가 있으면 그 사람의 시험지에 '고반'이라는 도장을 찍어 기록했습니다.

'설화(說話)'는 옆사람과 소곤소곤 의견을 나누어 답을 작성하는 것이었습니다. 감독관의 눈을 피해 속삭이다가 들키면 시험지에 '음아(吟啞)'라는 도장이 찍혔습니다. '낙지(落地)'는 답안지를 일부러 땅에 떨어뜨려 다른 사람이 볼 수 있게 하는 수법으로, 응시자끼리 행하기도 하고 매수된 시험관이 도와주기도 했습니다.

콧구멍 속 쪽지, 붓대 속 종이

커닝페이퍼를 숨기는 방법도 기상천외했습니다. '협서(挾書)'는 붓대 끝에 작은 종이를 말아 숨기는 것이었습니다. 붓은 시험에 필수품이니 자연스럽게 들고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더 대담한 방법으로 '의영고(義盈庫)'가 있었는데, 이것은 콧구멍 속에 커닝 종이를 숨기는 것이었습니다. 작은 종이에 깨알 같은 글씨로 내용을 적어 돌돌 말아 코에 넣었다가 시험 중에 꺼내 보는 식이었습니다.

'수종협책(隨從挾冊)'은 수종, 즉 시중드는 사람을 통해 책이나 자료를 들여오는 것이었습니다. 원칙적으로 시험장에는 응시자 본인만 들어갈 수 있었지만, 지체 높은 양반들은 시중을 드는 사람을 대동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 수종들이 몰래 책을 들여와 부정을 저지르는 일이 잦았습니다. 당시 과거장을 그린 그림을 보면 파라솔까지 펴놓고 다과회를 하는 듯한 풍경이 있는데, 이런 느슨한 분위기가 부정행위를 부추긴 측면이 있었습니다.

대리시험과 답안지 바꿔치기

더 대담한 부정행위로 '대인(代人)', 즉 대리시험이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사진이 없었으니 신원 확인이 어려웠고, 감독관과 내통하면 대리시험이 가능했습니다. 1566년 명종 때에는 글자도 잘 모르는 심진, 심자, 심전 세 사람이 대리시험으로 생원, 진사시에 합격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성균관에서는 이들을 '상가상사(償價上舍)', 즉 '돈 주고 산 생원, 진사'라고 비아냥거렸다고 합니다.

어떤 양반은 아예 머리 좋은 노비를 사들여 공부를 시킨 뒤 대리시험을 치르게 했습니다. 노비가 합격하면 그 자격을 양반 자신의 것으로 둔갑시키는 식이었습니다. '절과(竊科)'는 합격자의 답안지에서 이름 부분만 떼어내고 미리 정해진 사람의 이름으로 바꿔붙이는 수법이었습니다. 이 경우 정당하게 합격한 사람이 불합격 처리되는 억울한 일이 생겼습니다.

'차술(借述)'은 다른 사람의 글을 빌려 쓰는 것이었습니다. 권력층에 있는 사람이 시험 문제를 미리 알아내어 유명한 문장가에게 답안을 짓게 한 뒤, 그것을 외워서 시험장에 들어가는 수법이었습니다. 조선 말기 세도가의 자제들이 이 방법으로 적지 않게 급제했다고 합니다.

시험관 매수와 권력형 부정

개인이 저지르는 부정행위보다 더 큰 문제는 조직적인 부정이었습니다. 응시자가 권력층과 결탁하거나 시험관과 짜고 치는 경우가 이에 해당합니다. '혁제(赫蹄)'는 시험관과 응시자가 미리 결탁하는 행위였습니다. 이를 막기 위해 암송 시험인 '강경(講經)' 때에는 응시자와 시험관 사이에 장막을 쳤고, '역서(易書)'라 하여 답안지를 다른 사람이 베껴 쓰게 해서 필적으로 응시자를 알아보지 못하게 하기도 했습니다.

조선 후기 당쟁이 격화되면서 과거시험은 자기 당파 세력을 심는 수단으로 악용되기도 했습니다. 1610년 광해군 때 문과 별시에서는 권력 실세였던 이이첨의 사돈 등 시험관 친인척들이 대거 합격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이 합격자 명단을 '자서제질사돈방(子壻弟姪査頓榜)', 즉 '아들, 사위, 동생, 조카, 사돈의 명단'이라고 조롱했습니다.

엄격한 처벌, 그러나 끊이지 않은 부정

부정행위에 대한 처벌은 매우 엄격하게 규정되어 있었습니다. 세종 29년에 마련된 처벌 규정에 따르면, 다른 사람의 답안지를 베껴 쓸 경우 곤장 100대에 3년간 강제 노역형에 처해졌습니다. 책을 몰래 가지고 들어간 경우에는 3년간 과거 응시 자격이 박탈되었습니다. 시험관이 문제를 누설하거나 봉인된 답안지를 엿본 경우에는 영구히 관직에 임용될 수 없었습니다. 삼년상 중에 과거에 응시한 경우에도 곤장 80대에 처했습니다.

부정행위가 발각되면 '정거(停擧)'라 하여 일정 기간 과거 응시가 금지되었습니다. 이미 합격자 발표가 끝난 뒤에 부정이 적발되면 '삭과(削科)'라 하여 급제가 취소되었습니다. 부정이 너무 심각해서 시험 전체의 공정성이 의심되면 '파방(罷榜)'이라 하여 시험 자체가 무효화되기도 했습니다. 고종 때에는 수십 명이 과거 부정행위로 제주도로 유배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엄격한 처벌 규정에도 부정행위는 끊이지 않았습니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과거의 폐단은 더욱 심해졌고, 뇌물과 정실, 문벌, 당파에 따라 합격과 낙제가 결정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글을 한 자도 모르는 까막눈이어도 뒤를 봐줄 사람만 있으면 장원을 차지하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결국 1894년 갑오경장 때 과거제도는 폐지되고, 새로운 관리 등용법이 마련되었습니다.


조선시대 과거시험의 부정행위를 보면 인간의 욕심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 번의 합격으로 인생이 바뀌는 시험 앞에서 정정당당함을 지키기란 쉽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콧구멍 속 쪽지부터 권력형 대리시험까지, 그 수법의 다양함에 혀를 내두르게 됩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부정으로 얻은 합격은 결국 들통나기 마련이고 더 큰 대가를 치러야 했다는 사실입니다. 수백 년 전 과거장의 이야기가 오늘날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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