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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이야기

조선시대 이혼은 정말 쉬웠을까, 칠거지악의 숨겨진 진실

by 정보정보열매 2026. 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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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극을 보면 조선시대 남편들이 "칠거지악"을 들먹이며 아내를 쉽게 내쫓는 장면이 종종 등장합니다. 아들을 못 낳는다, 말이 많다, 시부모에게 불순하다는 이유로 무력한 아내가 쫓겨나는 모습은 조선시대 여성의 비참한 처지를 상징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실제 역사 기록을 들여다보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조선시대 이혼은 생각보다 훨씬 어려웠고, 오히려 함부로 아내를 내쫓은 남편이 처벌받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칠거지악, 아내를 내쫓는 일곱 가지 이유

칠거지악은 중국 유교 경전에서 유래한 것으로, 조선에서는 대명률을 통해 법제화되었습니다. 일곱 가지 사유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첫째 시부모에게 순종하지 않는 것, 둘째 아들을 낳지 못하는 것, 셋째 음탕한 행실, 넷째 질투, 다섯째 나병이나 간질 같은 악질, 여섯째 말이 많은 것, 일곱째 도둑질이었습니다.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남편은 이 중 하나만 해당해도 아내를 내보낼 수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칠거지악만으로 이혼이 성립되지 않았습니다. 조선 조정은 이혼을 매우 엄격하게 통제했습니다. 대명률에는 "처를 내보내거나 의절할 상황이 없는데도 이혼한 자는 장 80대에 처한다"고 명시되어 있었습니다. 반대로 "칠거지악을 범했으나 삼불거에 해당하는 사항이 있는 자와 이혼한 자도 죄 2등을 감하고 다시 살게 한다"고 규정했습니다. 즉 칠거지악에 해당해도 삼불거라는 예외 조항이 있으면 이혼이 불가능했고, 이를 어기면 처벌받았습니다.

삼불거, 아내를 내쫓을 수 없는 세 가지 경우

삼불거는 칠거지악의 남용을 방지하기 위한 안전장치였습니다. 첫째, 시부모의 삼년상을 함께 치른 경우입니다. 남편의 부모 상을 함께 치렀다는 것은 며느리로서의 도리를 다했다는 의미이므로, 그런 아내를 버리는 것은 도의에 어긋난다고 보았습니다. 둘째, 혼인 당시 가난하고 천했으나 나중에 부귀하게 된 경우입니다. 어려울 때 함께한 아내를 잘살게 된 후 버리는 것은 배은망덕이라 여겼습니다. 셋째, 이혼 후 돌아갈 친정이 없는 경우입니다. 갈 곳 없는 여인을 내쫓는 것은 인륜에 어긋난다고 판단했습니다.

삼불거는 단순한 도덕적 권고가 아니라 법적 효력을 가졌습니다. 세종실록에는 삼불거를 어기고 이혼을 강행한 사례들과 그에 대한 처벌 기록이 여럿 남아 있습니다. 조선 조정은 칠거지악에 해당하더라도 삼불거 조항이 있으면 원칙적으로 이혼을 허락하지 않았고, 이를 무시하고 아내를 내쫓은 남편에게 형벌을 가했습니다.

실제로 이혼이 허락된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조선왕조실록을 살펴보면 이혼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알 수 있습니다. 세종 때 대신 이맹균은 아내가 아들을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내쫓으려 했다가 오히려 파직되어 귀양을 갔습니다. 태종 때 장진이라는 사람은 아내 김씨가 병에 걸렸다고 새장가를 들었다가 처벌받았습니다. 더 놀라운 사례도 있습니다. 태종 때 김봉종은 아내가 5촌 시숙과 간통했다고 내쫓았는데, 도리어 장 80대를 맞았습니다. 간통이 명백한 칠거지악 사유임에도 절차를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이혼을 강행했다는 이유였습니다.

양반 사회에서 이혼은 가문의 수치로 여겨졌습니다. 아내를 내쫓으면 처가 쪽에서 가만있지 않았고, 양반 사회의 체면 문화상 이혼 자체가 양가 모두에게 불명예였습니다. 따라서 칠거지악에 해당하는 일이 있어도 대부분 은밀히 덮고 지나가거나, 별거 형태로 유지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칠거지악을 들먹이며 이혼을 요구하는 것 자체가 양반 사회에서는 쉽게 꺼낼 수 없는 말이었습니다.

서민들은 오히려 자유로웠다

흥미롭게도 서민 계층에서는 이혼이 훨씬 자유로웠습니다. 대명률에는 "부부가 화합하여 쌍방이 이혼을 원하는 자는 처벌하지 않는다"는 조항이 있었습니다. 양반들은 가문의 명예와 유교적 규범에 얽매여 이혼이 어려웠지만, 서민들은 경제적 필요나 현실적인 이유로 비교적 쉽게 합의이혼을 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서민 계층에서도 남편이 일방적으로 아내를 버리는 것은 가능했지만, 양반처럼 칠거지악을 형식적으로 들먹이며 내쫓는 일은 드물었습니다. 애초에 서민들은 성리학적 규범에 덜 구속되었고, 가문의 체면이나 정치적 이해관계도 복잡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역설적으로 유교적 질서가 강하게 적용되던 양반 계층에서 이혼이 더 어려웠던 셈입니다.

아내가 남편을 내쫓을 수는 없었나

안타깝게도 조선시대 여성에게는 남편을 내쫓을 권리가 없었습니다. 칠거지악은 오로지 남편이 아내에 대해 행사할 수 있는 것이었고, 그 반대는 법적으로 인정되지 않았습니다. 남편이 아내를 아무리 학대해도 이혼 사유가 되지 않았습니다. 반면 아내가 남편을 때리면 장 100대를 맞고, 남편이 원하면 이혼당할 수 있었습니다. 숙종실록에는 남편을 때린 기 센 아내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는 매우 예외적인 사례로 기록될 만큼 드문 일이었습니다.

여성이 남편의 동의 없이 이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의절, 즉 법적으로 강제되는 이혼뿐이었습니다. 남편이 아내의 존속을 해하거나, 아내가 남편의 존속을 해하는 등 극단적인 상황에서만 국가가 개입해 강제로 이혼시켰습니다. 그 외에 여성이 스스로 혼인관계를 끊는 것은 불가능했고, 임의로 집을 나가 재혼하면 배부죄로 극형에 처해지기도 했습니다.

조선 말기에는 이혼 조건이 완화되었다

조선 말기 고종 때 제정된 형법대전에서는 칠거지악 중 아들을 못 낳는 것과 질투하는 것 두 가지가 이혼 사유에서 삭제되어 오거로 줄었습니다. 자식이 없다거나 질투한다고 아내를 내쫓는 것은 도리에 어긋난다는 인식이 반영된 것입니다. 또한 삼불거에 자녀가 있는 경우를 추가하여 사불거로 확대했습니다. 아이가 있으면 어떤 사유가 있어도 이혼할 수 없게 한 것입니다.

이 오출사불거 규정은 1908년 형법대전 개정으로 폐지되었습니다. 대한제국 말기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근대적인 이혼 제도가 도입되면서 칠거지악과 삼불거라는 유교적 규범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조선시대 이혼은 드라마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남편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칠거지악이라는 이혼 사유가 있었지만, 삼불거라는 강력한 제한 조항이 함께 작동했고, 조정은 이혼의 남용을 막기 위해 적극적으로 개입했습니다. 물론 이 모든 제도가 여성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가부장적 질서와 가문의 안정을 유지하려는 목적이 더 컸습니다. 그럼에도 조선시대 이혼이 생각보다 어려웠다는 사실은 우리가 가진 고정관념을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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