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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이야기

조선시대 과거시험 부정행위, 콧구멍 커닝페이퍼부터 땅굴 답안지까지

by 정보정보열매 2026. 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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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수능이나 공무원 시험에서 부정행위가 적발되면 큰 뉴스가 됩니다. 그런데 조선시대 과거시험에서도 부정행위가 있었을까요? 놀랍게도 조선시대 선비들의 커닝 수법은 현대인들이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대담하고 치밀했습니다. 콧구멍에 커닝페이퍼를 숨기는 것은 기본이고, 땅굴을 파서 답안지를 주고받거나 아예 대리시험을 치르는 일까지 비일비재했습니다. 입신양명의 유일한 길이었던 과거시험, 그 이면에 숨겨진 부정행위의 실상을 들여다봅니다.

과거시험, 왜 목숨을 걸었나

조선시대 과거시험은 단순한 시험이 아니었습니다. 양반 자제들에게 과거 급제는 가문의 영광이자 출세의 유일한 정도였습니다. 연암 박지원은 과거에 급제한 지인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습니다. "만에 하나가 되겠다고 시험장에 들어갔다가 서로를 밟고 넘어져 죽고 부상한 자가 부지기수로 열에 아홉은 저승 문턱에 갔다 오게 되니, 그대에게 만에 하나의 영광을 축하할 마음은 없지만, 열에 아홉은 저승에 갈 위험한 시험장에 더 이상 들어가지 않아도 된 것만은 축하한다."

실제로 1800년 정조 24년, 왕세자 책봉을 기념하는 특별시험이 창경궁 춘당대에서 열렸을 때 이틀간 응시한 수험생이 무려 21만 5천여 명에 달했습니다. 경쟁률이 최고 5만 대 1에 이르는 극한의 경쟁 속에서 부정행위의 유혹은 커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기상천외한 커닝 수법들

조선시대 과거시험장에서 벌어진 부정행위는 그 종류가 다양했습니다. 당시에는 이런 행위를 '감인고'라 불렀는데, 숙종 때에는 대표적인 과거의 폐단을 정리한 '과거 팔폐'라는 말이 생길 정도였습니다.

가장 기본적인 수법은 '고반'이었습니다. 고개를 돌려서 옆사람의 답안지를 베끼는 것으로, 부정행위의 고전 중의 고전이었습니다. 시험장에는 '금란관'이라는 감독관이 배치되어 있었는데, 남의 것을 훔쳐보려고 심하게 눈을 굴리거나 고개를 움직이는 행위가 적발되면 그 사람의 시험지에 '고반'이라는 도장을 찍어 채점에 참고했습니다.

'낙지'는 답안지를 일부러 땅에 떨어뜨려서 다른 사람이 보게 하는 수법이었습니다. 응시자끼리 이루어지기도 하고, 매수된 시험관이 행하기도 했습니다. '설화'는 옆사람과 소곤소곤 의견을 나누어 답을 작성하는 것이었고, 옆사람이 듣게끔 중얼거리면 시험지에 '음아'라는 도장이 찍혔습니다.

더 대담한 수법도 있었습니다. '협서' 또는 '수종협책'이라 불리는 커닝페이퍼가 대표적이었습니다. 붓대 끝에 작은 종이를 숨기거나, 심지어 콧구멍 속에 커닝 종이를 숨기는 '의영고'라는 수법도 있었습니다. 종이로 만든 속옷에 글을 써서 입거나, 아주 작은 책을 만들어 옷 속에 숨겨 들어가는 일도 비일비재했습니다. 중국 송나라 시대에는 속옷에 사서삼경과 주석 등 무려 70만 자를 적어놓은 커닝페이퍼가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땅굴을 파서 답안지를 주고받다

1705년 숙종 31년 2월, 성균관 앞마을에서 놀라운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한 아낙이 나물을 캐다가 노끈이 땅에 묻힌 것을 발견하고 잡아당겼더니 대나무 통이 나왔습니다. 조사 결과, 이 대나무 통은 땅속을 통해 과거시험이 열리는 성균관 반수당까지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범인의 수법은 이러했습니다. 긴 노끈을 이은 대나무 통을 땅에 묻고 비늘처럼 죽 이어 구멍을 통하게 한 뒤 다시 기와를 덮어 은폐했습니다. 시험장 안에 있는 응시자가 시험문제를 노끈에 매달아 보내면, 밖에 있는 사람이 답안지를 작성해서 노끈에 묶어 보낸 것입니다. 당국이 조사를 했으나 시험장으로 이어진 노끈이 여러 개 발견된 사실만 추가 확인했을 뿐, 끝내 범인은 잡을 수 없었습니다. 이 사건은 KBS 사극 '성균관 스캔들'에서도 다뤄질 정도로 유명한 부정행위 사례입니다.

조직적 부정행위, '접'의 등장

조선 후기로 갈수록 부정행위는 더욱 조직화되었습니다. '접'이라 불리는 6인조 부정행위 조직이 등장했는데, 각자 역할이 철저히 분담되어 있었습니다.

먼저 '선접꾼'은 좋은 자리를 선점하는 역할이었습니다. 과거일 새벽 과장에 진입해 현제판 주위의 좋은 위치에 자리를 잡는 건장한 행동대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우산대와 말뚝, 쇠몽둥이 등을 휘두르며 달려가 자리를 맡았고, 그 대가로 돈을 받았습니다. '수종'은 응시생을 보좌하는 자들로, 먹을 갈아주거나 시중을 드는 역할이었습니다. 원칙적으로 과거시험장에는 수험자 당사자만 입실이 가능했으나, 양반들이 시중드는 사람을 대동하는 것을 국가에서 묵인해주었기 때문에 이를 악용한 것입니다.

핵심 인물은 '거벽'과 '사수'였습니다. 거벽은 실제로 문제를 푸는 사람으로, 머리가 좋은 노비를 구해다가 시키거나 신분이나 나이 등의 사정으로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는 선비들이 부자집의 문객으로 이 역할을 맡았습니다. 사수는 글씨를 대신 써주는 사람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거자'는 답안지에 최종적으로 자신의 이름을 응시자명으로 쓰는 사람으로, 다른 구성원들이 해놓은 밑작업의 수혜를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대리시험과 권력형 부정

개인이 저지르는 부정행위보다 더 큰 문제는 조직적으로 행해지는 권력형 부정이었습니다. '대필'은 권력층에 있는 사람이 시제를 미리 알아내어 명사로 하여금 문장을 짓게 한 뒤 그것을 외어서 과장에 나가는 수법이었습니다. 조선 말기 세도가 자제들이 이 방법으로 적지 않게 등과했습니다.

'대인'이라는 대리시험도 있었습니다. 사진 첨부가 없었던 시절이라 가능했지만, 대체로 감독관과 내통한 권력형 대리시험이었습니다. 1566년 명종 21년에는 글자도 잘 모르는 심진, 심자, 심전 세 사람이 대리시험으로 생원·진사시에 합격했습니다. 성균관에서는 그들을 돈 주고 산 생원, 진사라는 뜻의 '상가상사'라 비아냥거렸다고 합니다.

시험관과 짬짜미하는 '혁제'도 심각했습니다. 1610년 광해군 2년에 시행된 문과 별시에서는 정권의 실세였던 이이첨의 사돈 등 시험관의 친인척들이 대부분 합격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이때의 합격자 명단을 적은 책을 '아들, 사위, 동생, 조카, 사돈의 방목'이라고 비아냥거렸습니다.

부정행위의 처벌과 그 한계

법적으로 부정행위에 대한 처벌은 매우 엄하게 규정되어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답안지를 베껴 쓸 경우에는 곤장 100대에 3년간 막노동을 강제당했고, 미리 책을 들고 올 경우에도 과거 응시 자격이 3년간 박탈되었습니다. 시험관이나 중간 브로커들도 영구히 관직에 임용될 수 없도록 규정되어 있었습니다.

부정행위가 발각되면 형벌과 함께 과거시험 응시를 제한하는 '정거' 조치가 있었습니다. 합격자 발표가 끝나서 급제자 명단에 들어갔더라도 추후 부정이 적발되면 '삭과'라 해서 과거 급제를 취소했습니다. 부정행위가 심각하여 시험 전체의 공정성에 문제가 있으면 '파방'이라 하여 시험 전체를 무효화하는 조치가 단행되기도 했습니다. 고종 때에는 수십 명의 사람들이 과거 부정행위를 저질렀다는 이유로 제주도로 유배 보내졌고, 중국 명청 시기에는 부정행위 적발 시 사형에 처해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조선 말기로 갈수록 뇌물을 주는 방식으로 적당히 무마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뇌물과 정실, 문벌의 고하, 당파의 소속에 따라 급제와 낙제가 결정되면서 과거제도는 극도로 문란해졌습니다. 결국 1894년 갑오경장 때 과거제도는 폐지되고 새로운 관리 등용법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조선시대 과거시험의 부정행위를 보면 시험과 부정행위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 것 같습니다. 입신양명을 위한 극심한 경쟁 속에서 편법의 유혹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던 모양입니다. 다만 역사가 보여주듯이, 부정으로 얻은 영광은 결국 제도 전체의 붕괴로 이어졌습니다. 커닝페이퍼를 만들 머리로 공부를 했다면 장원급제도 어렵지 않았을 텐데, 그것이 사람 마음이란 게 참 아이러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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