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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이야기

조선시대 역관, 천대받았지만 가장 부유했던 통역사들의 이중생활

by 정보정보열매 2026. 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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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극에서 조선 사신이 중국 황제를 만나거나 일본 사절과 대화하는 장면을 보신 적이 있으실 겁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통역 없이 서로 말이 척척 통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실제로는 어땠을까요? 당연히 통역관이 있었습니다. 바로 '역관'입니다. 드라마에서는 존재감이 희미하지만, 실제 조선시대 역관들은 외교의 최전선에서 활약하면서 동시에 당대 최고의 부자가 되기도 했던 흥미로운 존재였습니다. 오늘은 신분은 낮았지만 돈과 정보를 쥐고 있던 역관들의 이중생활을 들여다보겠습니다.

나라의 목소리를 전하는 사람들

역관은 한마디로 조선시대의 통역사였습니다. 중국과의 사대외교, 일본 및 여진과의 교린외교에서 통역 업무를 담당했습니다. 사신이 외국에 갈 때 동행하여 통역을 맡았고, 외국 사신이 조선에 왔을 때는 왕 앞에서 대신들 사이에서 말을 옮기는 역할을 했습니다.

역관이 되려면 역과라는 시험에 합격해야 했습니다. 조선은 건국 초부터 사역원과 승문원을 설치하고 외국어 학습을 장려했는데, 역과에서는 중국어인 한어, 일본어인 왜어, 몽골어, 여진어 등을 시험 보았습니다. 가장 수요가 많았던 것은 당연히 중국어였고, 그다음이 일본어였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역관 집안이 대대로 세습되는 경향이 강했다는 것입니다. 외국어는 어릴 때부터 구전으로 배우는 것이 효과적이었기 때문에, 할아버지가 아버지에게, 아버지가 아들에게 언어를 가르치면서 역관 명문가가 형성되었습니다. 인동 장씨, 밀양 변씨, 우봉 김씨, 천녕 현씨, 해주 오씨 등이 대표적인 역관 가문이었습니다.

중인 신분, 천대받는 전문가들

역관의 신분은 중인이었습니다. 양반과 상민 사이에 위치한 중간 계층으로, 의관, 율관, 산학관 등과 함께 기술직 관료에 속했습니다. 국가 외교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음에도 불구하고, 양반들은 역관을 천하게 여겼습니다.

조정의 대신들은 역어의 임무가 국가의 중대사임을 자주 강조하면서도, 정작 역관들에게는 사회적 차별을 가했습니다. 역관은 잡과 출신이라는 이유로 문과 출신자에 비해 불이익을 받았고, 승진에도 한계가 있었습니다.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정3품 당하관에서 실직이 끝나게 되어 있었습니다.

게다가 역관에게 주어진 관직은 정직이 아니라 체아직이었습니다. 체아직은 몇 개월 단위로 교체되는 임시직으로, 재직 기간에만 녹봉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평소에는 월급도 없었습니다. 어엿한 관직자임에도 생활이 불안정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습니다.

사행길에서 벌어들인 천문학적 부

그런데 역관들에게는 돈을 벌 수 있는 특별한 기회가 있었습니다. 바로 사신을 따라가는 사행이었습니다. 조선 정부는 가난하게 국정을 운영했기 때문에 사신단에 경비를 넉넉히 주지 않았습니다. 대신 무역 활동을 허가해서 여기서 번 돈으로 경비를 충당하게 했습니다. 역관들은 이 틈을 이용해 공적으로나 개인적으로 무역에 참여하여 상당한 부를 쌓았습니다.

역관이 한 번 중국에 다녀오면 오늘날 가치로 최소 2억에서 4억 원 정도의 수입을 올릴 수 있었다고 합니다. 조선 후기에는 인삼이 주요 무역 품목이었는데, 조선 사신단이 북경에 들어서기만 하면 임시로 인삼 시장이 열렸습니다. 역관들은 여기서 인삼을 팔고 중국 물건을 사들였습니다.

특히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초반에는 청나라와 일본 사이의 중개무역이 활발해지면서 역관들의 전성기가 열렸습니다. 중국 사행에 참여한 역관이 북경에서 물품을 구해 오면, 왜학 역관을 통해 일본에 수출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역관들은 막대한 이윤을 남겼습니다.

박지원의 소설 허생전에 나오는 거부 변씨의 실제 모델이 된 변승업도 역관이었습니다. 그는 사무역으로 엄청난 재산을 모은 대표적인 사례였습니다. 희빈 장씨 집안도 역관 가문이었습니다. 장희빈의 친아버지 장형이 역관이었고, 외할머니도 부유한 역관 가문인 변씨 출신이었습니다.

정보원과 문화 교류의 중심

역관의 역할은 통역과 무역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외국 현지 사정을 탐지하는 정보원 역할도 수행했습니다. 특히 중국 정세에 민감했던 조선 정부는 통역단 책임자인 수역관과 기록 담당인 서장관에게 귀국 즉시 현지 상황을 보고하도록 명했습니다.

보고 내용에는 어떤 제한도 없었습니다. 궁중의 일부터 길거리에서 벌어지는 민간인의 사생활까지, 아편의 심각성이나 국제 전쟁의 조짐까지 다양한 정보가 수집되었습니다. 이 기록들은 동문휘고의 사신별단, 문견사건 등에 남아 있습니다.

1866년 병인박해로 프랑스 신부가 처형되었을 때, 역관 오경석은 중국에서 비밀리에 정보를 수집하여 조선 정부가 프랑스 침략에 대비하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오경석은 단순한 역관을 넘어 개화파 형성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로, 조선 후기 근대화의 흐름을 주도한 선각자였습니다.

역관들은 양국 간 문물을 교류하는 중개자이기도 했습니다. 사신이 머무는 공관은 보안상 출입이 제한되었기 때문에, 북경의 인삼 가게가 조선인과 중국인이 만나는 장소로 활용되었습니다. 그곳은 무역만 하는 곳이 아니라 문학과 예술을 토론하고 교류하는 문화 공간이기도 했습니다. 역관 이상적은 청나라 학자들과 교류하며 받은 책을 제주도에 유배 중이던 추사 김정희에게 보내기도 했습니다.

당상관보다 사행을 원했던 사람들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역관이 당상관으로 승진하면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동료 역관들 사이에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욕할 때 "너는 지지리도 복이 없으니 빨리 당상관이나 되어라"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왜 승진이 욕이 되었을까요? 당상관이 되면 오히려 사행에 참여하기 어려워졌기 때문입니다. 역관에게 진짜 돈이 되는 것은 지위가 아니라 외국에 다녀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역관들은 평생토록 사신을 따라갈 기회만 목 빠지게 기다렸다고 합니다. 명예보다 실리를 택한 것입니다.

신분 해방을 향한 몸부림

역관들은 기술과 행정 실무뿐만 아니라 지식과 경제력에서도 양반에 뒤지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중인이라는 신분 때문에 항상 차별받았습니다. 이에 대한 불만은 조선 후기에 신분 해방 운동으로 이어졌습니다.

역관들은 근대화 과정에서도 선도적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외국과 직접 접촉하며 새로운 문물을 먼저 접했던 그들은 변화의 필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았습니다. 개화파의 형성에 큰 영향을 끼친 오경석이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중국을 오가며 서양 문물을 소개하고 개화사상을 전파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조선시대 역관들은 참으로 모순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나라를 대표해 외국과 소통하는 중요한 임무를 맡았지만 신분은 천대받았고, 명예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경제적으로는 당대 최고 부자 반열에 올랐습니다. 오늘날 통역사와 외교관이 존경받는 직업인 것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이 느껴집니다. 역관들의 이야기는 신분제 사회의 모순과 함께, 어떤 상황에서도 실리를 찾아 나름의 방식으로 성공을 일궈낸 사람들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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