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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이야기

조선시대 사형 집행의 실제, 드라마에서 보지 못한 다섯 가지 진실

by 정보정보열매 2026. 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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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극 드라마에서 사형 장면은 극적인 클라이맥스를 장식합니다. 머리를 풀어헤친 망나니가 광기 어린 표정으로 거대한 칼을 휘두르며 춤을 추고, 입에 머금은 술을 칼날에 뿜어낸 뒤 단번에 죄인의 목을 베는 장면은 시청자의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하지만 실제 조선시대 사형 집행은 드라마에서 본 것과 상당히 달랐습니다. 오늘은 기록에 남아 있는 조선시대 사형 집행의 실제 모습을 살펴보겠습니다.

사형에도 등급이 있었다

조선시대 사형은 크게 네 가지로 나뉘었습니다. 가장 가벼운 등급이 사사형, 그다음이 교수형, 그리고 참형, 가장 무거운 극형이 능지처사형이었습니다. 같은 사형이라도 신분과 죄목에 따라 형이 달랐고, 어떤 방식으로 죽느냐가 명예와 직결되었습니다.

왕족이나 고위 관료에게는 사약을 내렸습니다. 사약에 의한 사형은 대명률에도 없는 조선만의 특수한 형벌로, 일종의 명예형이었습니다. 귀한 신분의 죄인이 망나니의 칼날 아래서 목이 잘리는 치욕을 피할 수 있게 해주는 왕의 배려였던 셈입니다. 반면 일반 백성이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지으면 교수형이나 참수형을 받았고, 모반대역 같은 중죄를 지으면 능지처참을 당했습니다.

대명률에 따르면 우발적으로 사람을 때려 죽인 경우에는 교수형에 처했고, 고의로 살인한 경우에는 참수형에 처했습니다. 교수형은 시체를 온전히 보존할 수 있어 참형보다 가벼운 형벌로 여겨졌습니다. 유교 사회에서 부모에게 물려받은 몸을 온전히 보존하는 것은 중요한 도리였기 때문입니다.

참수형은 드라마처럼 집행되지 않았다

드라마에서 흔히 보는 망나니의 모습은 머리를 풀어헤치고 광기 어린 표정으로 거대한 칼을 휘두르는 것입니다. 하지만 조선시대 실제 참수형 그림을 보면 이와 사뭇 다릅니다. 김윤보가 그린 형정도첩에 묘사된 회자수, 즉 망나니는 두건 형태의 모자를 쓰고 비교적 차분한 모습입니다.

실제 참수형 집행 방식은 서양의 중세 참수형과 비슷했습니다. 먼저 죄인의 얼굴에 흰 회칠을 하고 양쪽 귓불을 뚫어 관이전이라는 짧은 화살을 끼웠습니다. 그런 다음 상투 부분을 기둥에 단단히 매어 고정시키고, 목 아래에 나무토막을 괴어 엎어놓은 뒤 참수도로 내리쳐 목을 잘랐습니다. 서서 칼을 휘두르는 게 아니라, 엎드린 죄인의 목을 내리찍는 방식이었습니다.

망나니가 술에 취해 칼을 휘두르며 춤을 추는 장면은 실제 일부 기록에서 힌트를 얻은 것으로 보입니다. 1891년 시구문 밖에서 집행된 처형 기록에 따르면 행렬이 마을을 지나면서 주막에 들러 술과 음식을 먹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모든 처형에서 일어난 일은 아니었고, 드라마처럼 형장에서 춤을 추며 술을 뿜는 행위는 과장된 연출입니다.

망나니는 누가 했나

조선시대 사형집행인은 소속 기관에 따라 크게 세 부류로 나뉘었습니다. 군영의 회자수, 지방의 도우탄, 한양 감옥의 행형쇄장이 그들입니다.

군대에서 사형을 집행하는 회자수는 평소 의장용 칼을 들고 대장을 호위하는 군인이었습니다. 지방에서는 도우탄이라 불리는 백정이 사형 집행을 맡았습니다. 죄인의 목을 베거나 사지를 절단하는 일에 도살 기술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행형쇄장입니다. 이들은 원래 전옥서에 수감된 사형수들이었습니다. 사형수가 자신의 형을 면하는 대가로 다른 사형수의 집행을 맡은 것입니다. 사형을 당할 처지에서 사형집행인으로 변신한 기구한 사연입니다.

망나니라는 명칭은 과거 막란과 희광이라는 두 사람이 사형 집행을 맡아 일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막란희광이라 부른 데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사람을 죽이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만큼 이들은 사회에서 천시받았고, 죄책감으로 정신병을 앓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술에 절어 살았던 이유도 취하지 않으면 끔찍한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사약은 어떻게 집행되었나

드라마에서 익숙한 사약 장면을 떠올려 보면 대개 금부도사가 사약을 들고 오고, 죄인이 한 사발의 독약을 마신 뒤 고통스럽게 숨을 거두는 모습입니다. 실제 사약 집행 과정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몇 가지 세부 사항은 달랐습니다.

형정도첩의 사약 집행 그림을 보면, 방 안에서 의금부도사 또는 형방승지가 형 집행을 주도하고 있습니다. 뒤편에는 전립과 도포 차림의 의관이 형 집행 후 사망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고, 마당에는 사약을 운반해 온 의금부 나장 2명이 대령해 있습니다.

사약의 주성분은 비상이었습니다. 비상을 마시면 극심한 복통과 구토, 경련 등이 일어나며 고통스럽게 죽어갔습니다. 한 번에 죽지 않으면 여러 번 마셔야 했고, 그래도 죽지 않으면 목을 졸라 숨을 끊기도 했습니다. 드라마에서처럼 깔끔하게 죽는 경우는 오히려 드물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사사형은 총 489회 시행되었습니다. 사사형을 가장 많이 시행한 왕은 숙종으로 81회, 그다음이 광해군으로 67회, 중종이 그 뒤를 이었습니다. 흥미롭게도 세종은 사사형을 단 한 번도 시행하지 않았습니다.

사형 집행 장소와 시기

조선시대 사형은 오늘날처럼 비밀리에 집행되지 않았습니다. 일반 범죄에 대한 참형과 능지처사형은 공개적으로 집행되어 일반 백성에게 경각심을 주는 위하형의 성격이 강했습니다.

한양에서 사형이 집행된 대표적인 장소는 한강 연안의 새남터, 청계천 부근의 무교, 서대문 밖 등이었습니다. 새남터는 지금의 용산구 한강로 3가 일대로, 천주교 순교자들이 처형된 곳으로도 유명합니다. 포도청에서 집행하는 경우에는 길 가운데 천막을 치고 휘장을 두른 임시 막사에서 포도대장이 처형을 지휘했습니다.

사형 집행 시기에도 규칙이 있었습니다. 참형은 다시 대시참과 부대시참으로 나뉘었는데, 대시참은 가을과 겨울을 기다려 형을 집행하는 것이고, 부대시참은 시기를 가리지 않고 즉시 집행하는 것이었습니다. 모반대역이나 강상범 같은 중죄를 제외한 일반 범죄는 춘분 이후에는 재판을 정지하고 추분 이후에 재개하는 무정무개 제도가 있었습니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과 여름에는 사형 집행을 피하고, 자연의 이치에 따라 만물이 쇠퇴하는 가을과 겨울에 집행한 것입니다.

가장 잔혹한 형벌, 능지처사

능지처사는 조선시대 가장 무거운 극형으로, 모반대역이나 존속살해 같은 중죄에 적용되었습니다. 죄인의 몸을 산 채로 잘게 찢어 죽이는 형벌로, 그 잔혹함은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거열형은 능지처사의 한 방법으로, 죄인의 사지를 네 개 또는 다섯 개의 수레에 매단 뒤 각 방향으로 수레를 몰아 몸을 찢어 죽이는 형벌이었습니다. 주로 간부가 공모하여 본남편을 살해한 경우 등에 적용되었습니다.

효수는 참수한 후 머리를 장대에 매달아 일반 백성에게 보이는 형벌이었습니다. 군기를 절취하거나 고의로 배를 파손한 자 등에게 적용되었습니다. 기시는 시장에서 사형을 집행하고 시체를 버려두는 형벌로, 왕지를 위조한 자 등에게 적용되었습니다.

이러한 공개 처형은 범죄 억제 효과를 노린 것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조선이 엄벌주의에 입각한 사회였음을 보여줍니다.

정조는 사형 집행을 최대한 줄이려 했다

흥미롭게도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사형 시행 횟수를 보면, 사형을 가장 많이 시행한 왕은 세종 416회, 성종 394회, 영조 154회 순입니다. 이는 조선시대 명군과 태평성대 순서와 거의 일치합니다. 강력한 법 집행이 사회 안정과 연결되었다는 해석도 가능합니다.

정조는 사형 집행에 매우 신중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정조는 중죄인을 심리할 때 낮이고 밤이고 그 정황을 생각하며 의심스러운 점이 없는지 따져보았다고 합니다. 고의가 아닌 우발적 살인의 경우 최대한 사정을 참작하여 사형을 피할 방도를 찾으려 했습니다.

1894년 갑오개혁 이후 조선의 전통적인 사형 제도는 크게 변화했습니다. 사형이 교수형과 총살형으로 단순화되었고, 공개 처형 대신 감옥 내 사형 집행장에서 비공개로 집행되기 시작했습니다. 1900년에는 참형이 완전히 폐지되어 오늘날과 같은 사형 제도의 기틀이 마련되었습니다.


조선시대 사형 집행은 드라마에서 보는 것처럼 단순하지 않았습니다. 신분과 죄목에 따라 형의 종류가 달랐고, 집행 방식과 장소, 시기까지 세밀하게 규정되어 있었습니다. 망나니의 실제 모습도 드라마 속 광기 어린 이미지와는 달랐습니다. 역사 기록을 통해 보는 실제 모습은 때로 우리의 상상보다 더 잔혹하기도, 더 체계적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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