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1월 21일 밤 9시 30분, 서울 종로구 세검정 고개. 비상근무 중이던 경찰관 두 명이 수상한 무리를 발견하고 검문을 시도했습니다. 군복 차림의 사내들이었습니다. 신분증을 요구하자 그들은 갑자기 수류탄을 던지고 기관단총을 난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순간부터 서울 한복판은 전쟁터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가장 충격적인 사건 중 하나로 기록된 1.21 사태의 시작이었습니다.
작전명, 청와대 습격
이 사건의 전모는 유일한 생존자 김신조의 진술을 통해 밝혀졌습니다.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 124부대원 31명에게 내려진 임무는 명확했습니다. 청와대를 습격하여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원래 북한이 세운 계획은 더 대규모였습니다. 수백 명의 병력을 투입해 청와대뿐 아니라 미국 대사관, 국방부, 서울교도소까지 동시에 공격하고, 교도소에서 탈옥시킨 죄수들과 함께 월북한 뒤 이를 남조선 내 반정부 세력의 봉기로 위장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베트남에서 9일 뒤에 벌어진 테트 대공세와 비슷한 구상이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인 이유로 작전은 축소되어 31명이 청와대만 습격하는 것으로 최종 결정되었습니다.
습격 계획은 치밀했습니다. 청와대에 도착하면 5개 조로 나뉘어 정문 보초 제거, 1층과 2층 기습, 경호실과 비서실 습격을 동시에 진행합니다. 기관단총으로 무차별 사격하고 수류탄을 투척한 뒤, 청와대 내 차량을 탈취해 문산 방향으로 탈출합니다. 소요 시간은 단 3~4분. 그들은 황해도 사리원에서 황해북도 인민위원회 건물을 청와대로 가상하고 실전 훈련까지 마쳤습니다.
휴전선을 넘어 서울까지
1968년 1월 16일 밤, 31명의 무장공비는 황해북도 연산군 기지를 출발했습니다. 1월 17일 밤 11시, 휴전선 군사분계선을 넘었습니다. 미 2사단과 국군 25사단의 전투지경선 사이, 경계가 상대적으로 느슨한 지점을 택했습니다. 얼어붙은 임진강을 걸어서 건넜습니다.
날짜 선정도 계산된 것이었습니다. 1월 21일은 일요일이었습니다. 6.25 전쟁 때와 마찬가지로 휴일에는 경계가 느슨해진다는 판단이었습니다. 겨울을 택한 이유도 있었습니다. 추위에 군인들이 근무를 대충 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경기도 파주의 파평산을 거쳐 구파발, 북한산 방향으로 이동했습니다. 30킬로그램의 완전무장 상태로 시간당 10킬로미터를 이동하는 강행군이었습니다. 특수훈련을 받은 정예 요원이 아니면 불가능한 속도였습니다.
나무꾼 4형제와의 조우
침투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1월 19일 오후, 경기도 파주 법원리 야산에서 나무를 하던 우씨 형제 4명과 마주친 것입니다. 무장공비들은 이들을 붙잡았습니다.
김신조의 후일 증언에 따르면, 이때 북한으로부터 무전 회신이 왔습니다. 암호를 해독하면 '원대복귀', 즉 작전이 노출되었으니 돌아오라는 명령이었습니다. 그러나 무전수가 암호 해독에 실패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나무꾼들에게 "우리는 남조선 해방을 위해 온 인민군이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마라"고 위협한 뒤 풀어주었습니다.
풀려난 나무꾼들은 곧바로 신고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군과 경찰의 대응은 신속하지 못했습니다. 무장공비들이 이미 서울 방향으로 상당히 이동한 뒤였습니다.
청와대 500미터 앞에서
1월 21일 밤, 무장공비들은 마침내 청와대 인근까지 도달했습니다. 북악산 승가사를 지나 세검정 고개에 이르렀을 때, 그들과 청와대 사이의 거리는 불과 500미터였습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검문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비상근무 중이던 종로경찰서 소속 경찰관들이 불심검문을 시도한 것입니다. 무장공비들은 처음에는 "우리는 대간첩 훈련 중인 CIC 요원이다"라고 둘러댔습니다. 그러나 경찰관이 의심을 거두지 않자 갑자기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수류탄이 터지고 기관단총 소리가 울렸습니다. 무장공비들은 지나가던 시내버스에도 수류탄을 던졌습니다.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이날 밤 종로경찰서장 최규식 총경을 비롯한 경찰관과 군인, 민간인 다수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소탕작전과 유일한 생존자
비상경계태세가 발령되었습니다. 군경 2만여 명이 투입된 대규모 소탕작전이 시작되었습니다. 뿔뿔이 흩어진 무장공비들을 추격하는 작전은 경기도 일원에서 1월 31일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결과는 처참했습니다. 31명의 무장공비 중 29명이 사살되었고, 1명은 도주하여 북한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단 1명만이 생포되었습니다. 바로 김신조였습니다.
1월 22일 새벽, 인왕산 계곡에서 추격을 받던 김신조는 자폭용 수류탄을 손에 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고리를 당기려는 순간, 살고 싶다는 마음이 앞섰다고 합니다. 그는 투항했습니다. 당시 나이 26세였습니다.
"박정희 목 따러 왔다"
생포된 김신조는 기자회견에 나섰습니다. 임무가 무엇이었느냐는 질문에 그는 거친 함경도 사투리로 대답했습니다. "박정희 모가지 따러 왔수다." 이 한마디는 대한민국 사회 전체를 충격에 빠뜨렸습니다.
김신조의 진술을 통해 침투 경로, 작전 계획, 북한 내 훈련 과정 등이 상세히 밝혀졌습니다. 그가 증언한 침투 경로는 충격적이었습니다. 휴전선을 넘어 서울까지 오는 동안 나무꾼을 만난 것 외에는 단 한 번도 검문을 받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전방 경계가 얼마나 허술했는지를 드러내는 증언이었습니다.
대한민국을 바꾼 사건
1.21 사태는 대한민국 사회 전반에 거대한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안보 위기의식이 고조되면서 일련의 조치들이 쏟아졌습니다.
1968년 4월, 250만 명 규모의 향토예비군이 창설되었습니다. 육군3사관학교가 설립되었고, 전투경찰대가 창설되었습니다. 고등학교와 대학교에 교련 교육이 도입되었습니다. 전 국민 주민등록증 발급이 시행되었고, 군 복무 기간이 36개월로 연장되었습니다. 대통령 경호 강화를 위해 인왕산과 북악산, 청와대 앞길까지 일반인 통행이 금지되었습니다. 이 통행금지는 수십 년간 지속되다가 2020년대에 들어서야 해제되었습니다.
한편 정부는 복수를 위해 비밀 특수부대를 창설했습니다. 684부대라 불린 이 부대는 김일성 암살을 목표로 훈련받았습니다. 그러나 남북 관계 변화로 작전이 취소되면서 부대원들은 실미도에 방치되었고, 결국 1971년 실미도 사건이라는 또 다른 비극으로 이어졌습니다.
김신조, 그 이후의 삶
김신조는 귀순 후 새로운 삶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적응은 쉽지 않았습니다. 사살된 동료들과 북한에 남겨둔 가족에 대한 죄의식으로 괴로워하며 한때 술과 도박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그를 구원한 것은 신앙이었습니다. 1970년 자신에게 위로의 편지를 보내던 여성과 결혼했고, 아내의 권유로 1981년 침례를 받았습니다. 1997년 1월 21일, 청와대 습격 사건이 일어난 지 정확히 29년 만에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이름도 김재현으로 개명했지만, 세상은 여전히 그를 김신조로 기억했습니다.
2022년 1.21 사태 54주년을 맞아 인터뷰에 응한 그는 북악산 김신조 루트를 걸으며 당시를 회고했습니다. 종로경찰서장 최규식의 동상 앞에서 그는 말했습니다. "내 동료 때문에 돌아가신 거니까 간접적인 책임은 있다. 두 사람만 살았더라도 이런 부담을 나눌 수 있었을 텐데, 혼자 살아서 안고 가니까 굉장히 힘들다."
그리고 2025년 4월 9일 새벽, 김신조는 8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건강 악화로 자택에서 요양 중이었다고 합니다. 장례식장에는 57년 전 파주 삼봉산에서 무장공비 일행과 마주쳤던 나무꾼 4형제 중 막내 우성제 씨가 빈소를 찾았습니다.
1.21 사태는 냉전 시대 한반도의 긴장이 얼마나 극단적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31명의 북한 특수부대원이 휴전선을 넘어 대통령 관저 코앞까지 침투했다는 사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생명이 희생되었다는 사실은 분단의 비극을 상징적으로 드러냅니다. 유일한 생존자 김신조의 파란만장한 삶 역시 그 시대의 상처를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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