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년 전 오늘, 1968년 1월 23일 동해 원산 앞바다에서 미국 해군 역사상 전례 없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미 해군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가 북한에 나포된 것입니다. 세계 최강대국 미국의 군함이 공해상에서 납치당한 것은 1807년 이후 160여 년 만의 일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1.21 청와대 기습 미수 사건 이틀 뒤에 벌어져 한반도를 제2의 6.25 직전까지 몰고 갔습니다.
화물선으로 위장한 첩보선
푸에블로호는 원래 1944년에 건조된 미 육군 보급선이었습니다. 10년간 사용된 후 1954년 퇴역하여 방치되어 있던 배였는데, 1966년 미 해군이 이를 인수해 정보수집함으로 개조했습니다. 일반 해양 관측용 선박으로 위장했지만 실제로는 전자정보 수집 임무를 수행하는 첩보선이었습니다.
1967년 11월 일본으로 출항한 푸에블로호는 주일 미국 해군사령부에서 작전 준비를 마쳤습니다. 1968년 1월 11일, 함장 로이드 버처 중령을 비롯한 83명의 승무원을 태우고 일본 사세보항을 출항했습니다. 목적지는 북한 원산 앞바다였습니다.
당시 미국은 북한 해군력을 매우 낮게 평가하고 있었습니다. 1950년대에는 북한 해군이 거의 전무했기 때문에 미군 함정이 북한 근해를 제집 드나들듯이 했고, 이런 관행이 이어져 별다른 대비책 없이 작전에 투입되었습니다.
1968년 1월 23일, 그날의 기록
1월 23일 정오경, 원산항 앞 공해상에서 정보수집 활동을 하던 푸에블로호에 북한 초계정 1척이 접근했습니다. 무전으로 "국적을 밝혀라"는 요구가 들어왔고, 푸에블로호는 "미국 함선"이라고 답변했습니다. 북한 함정은 "정지하라, 그렇지 않으면 발포하겠다"고 위협했습니다. 푸에블로호 측은 "공해상에 있다"고 답하며 이를 거절했습니다.
약 1시간 후 상황이 급변했습니다. 북한 측 지원 요청을 받고 3척의 무장 초계정과 미그기 2대가 추가로 출동해왔습니다. 총 4척의 북한 함정이 푸에블로호를 사방에서 포위했고, 미그기들은 주변을 선회하며 위협 신호를 보냈습니다. 미국이 예상하지 못한 치밀한 작전이었습니다.
오후 1시 40분, 북한 무장 수병들이 푸에블로호에 강제 승선했습니다. 오후 2시 10분, 푸에블로호는 "무력 저항을 하지 않았으며 원산항으로 끌려간다"고 보고했습니다. 오후 2시 32분, "엔진이 모두 꺼졌으며 무전 연락도 이것이 마지막이다"라는 최종 통신을 끝으로 연락이 두절되었습니다.
나포 과정에서 교전이 벌어졌고, 기관하사 듀안 호지스가 총격으로 전사했습니다. 나머지 82명은 북한에 억류되었습니다.
1.21 사태 이틀 후의 충격
실제로 확인해보면 푸에블로호 나포는 더 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불과 이틀 전인 1월 21일, 북한 특수부대원 31명이 박정희 대통령 암살을 목적으로 청와대 인근까지 침투한 1.21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한반도가 극도로 긴장된 상황에서 푸에블로호 사건까지 터진 것입니다.
사건 발생 직후 미국의 린든 존슨 대통령은 즉각 대응에 나섰습니다. 베트남으로 향하던 핵추진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호와 구축함 3척에게 진로를 바꿔 원산만 부근에 대기하라고 명령했습니다. 1월 25일에는 해공군 예비역 14,000여 명에게 긴급 동원령을 내렸고, 전투기를 포함한 항공기 372대에 출동 태세를 갖추게 했습니다. 오산과 군산 기지에는 2개 전투기 대대를 급파했습니다.
1953년 한국전쟁 정전 이후 15년 만에 제2의 전쟁 기운이 고조되었습니다. 미국은 북한 내 공군기지, 미사일 발사장, 해안 방어시설, 산업지대 등 수백 개의 공격 목표물을 확인했습니다.
미국이 군사행동을 포기한 이유
그러나 미국은 결국 군사적 대응을 포기했습니다. 왜였을까요?
가장 큰 이유는 베트남 전쟁이었습니다. 당시 미국은 베트남에서 전쟁 중이었고, 바로 일주일 후인 1월 30일 북베트남군의 구정 공세가 시작되어 전세가 급격히 불리해졌습니다. 한반도에서 또 다른 전쟁을 수행할 여력이 없었습니다. 전선이 두 곳으로 늘어나는 것은 미국으로서도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또한 82명의 미군 인질이 북한에 억류되어 있는 상황에서 섣불리 군사행동을 할 수 없었습니다. 미국은 소련에 중재를 요청했으나 거절당했고, 국제적십자사를 통한 접촉도 실패했습니다.
결국 미국은 판문점에서 북한과 직접 비밀협상을 시작했습니다.
11개월간의 굴욕적 협상
1968년 2월 2일 세 번째 비밀협상에서 큰 틀의 합의가 이루어졌습니다. 미국이 영해 침입을 시인하고 사과하면 북한이 승무원을 송환한다는 조건이었습니다. 그러나 북한은 여기에 추가 대가를 요구하며 협상을 질질 끌었습니다.
억류된 승무원들은 북한에서 혹독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북한은 고문과 학대를 통해 승무원들에게 영해 침범과 간첩 행위를 시인하는 자백서에 서명하도록 강요했습니다. 버처 함장은 훗날 회고에서 억류 기간 동안 식사로 단무지를 하도 많이 먹어서 지금도 무만 보면 피한다고 말했습니다. 전기고문을 당했으며, 고문당해 피투성이가 된 남녀를 보여주며 "남한 스파이의 말로"라고 협박받았다고 증언했습니다.
북한은 이 사건을 대내외적으로 최대한 선전에 활용했습니다. 승무원들의 "자백" 장면을 촬영해 공개했는데, 일부 사진에서 승무원들이 중지를 치켜세우고 있는 것이 포착되었습니다. 이것이 미국에서 욕설의 의미라는 사실을 북한 당국은 몰랐던 것입니다. 그러나 미국의 타임지가 1968년 10월 8일자로 이 사진들을 보도하면서 중지의 의미를 친절히 설명하는 실수를 저질렀고, 이후 승무원들은 더 혹독한 처우를 받았습니다.
사과문의 진실
사건 발생 11개월 만인 1968년 12월 23일, 28차례의 비밀협상 끝에 합의문서 서명이 이루어졌습니다. 미국의 길버트 우드워드 육군 소장은 북한의 요구대로 푸에블로호의 영해 침범을 시인하고 사과하는 문서에 서명했습니다. 단, 서명 직전에 우드워드 소장은 "이 문서의 내용은 사실이 아니며, 미국 정부는 억류 인원의 석방을 위해 서명할 뿐"이라는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최근 RFA가 인터뷰한 푸에블로호 부함장 에드워드 머피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미국이 서명한 원본 사과문에는 "승조원 석방을 위한 사과문 작성"이라는 문구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북한이 이 문구를 무단 삭제한 채 대내 선전에 활용했다는 것입니다. 북한 당국이 주민들을 선전·선동하는 데 이용하기 위해 고의로 문서를 조작했다는 주장입니다.
크리스마스 이브 전날인 12월 23일, 마침내 승무원 82명과 전사자 시신 1구가 판문점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통해 송환되었습니다.
돌아오지 못한 푸에블로호
승무원은 돌아왔지만 푸에블로호 함정과 거기에 탑재된 비밀 전자장치는 북한에 몰수되었습니다. 미 해군 역사상 외국 군대에게 자국 군함이 피납당한 첫 번째 사례이며, 푸에블로호는 현재까지도 나포 상태에 있는 유일한 미 해군 선박입니다.
원산항에 정박되어 있던 푸에블로호는 1998년 김정일의 지시로 평양의 보통강변으로 옮겨졌습니다. 원산에서 평양까지 이어지는 수로가 없는데 어떻게 옮겼을까요? 위장을 철저히 한 후 동쪽 원산 앞바다에서 한반도 영해 밖으로 나가 남쪽 제주도와 일본 사이 공해를 거쳐 서쪽 대동강변으로 옮겼다고 합니다. 미국도 3일 후에야 이 사실을 알았습니다.
현재 푸에블로호는 평양 보통강변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 인근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바로 옆에 1866년 대동강에서 격침된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 기념비가 있다는 것입니다. 북한은 102년의 시차를 두고 발생한 두 사건을 나란히 배치해 대미 항전의 전리품으로 선전하고 있습니다.
미 해군은 푸에블로호를 포기하지 않고 있습니다. 함정 명단에서 푸에블로호의 이름은 미 해군의 상징인 컨스티튜션함과 함께 현역함 자격으로 대우받고 있습니다. 2000년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의 북한 방문을 계기로 반환 협상이 잠시 진행되었으나 이후 북핵 사태 등으로 좌초되었습니다.
사건이 남긴 것
푸에블로호 사건은 한반도와 동북아 정세에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미국에 대한 불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베트남 파병으로 긴밀한 동맹 관계를 유지하던 미국이 북한과 저자세로 협상하는 모습에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북한은 이 사건 이후 국방-경제 병진노선을 선언하며 국가 예산의 절반을 국방비에 투입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북한 경제 몰락의 서막이 되었습니다. 미 해군은 푸에블로호 나포로 인해 전체 군사 보안 시스템을 전면 개편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사건이 마무리된 지 불과 4개월 후인 1969년 4월 15일, 동해상에서 미 해군 정찰기 EC-121이 북한 미그기에 의해 격추되어 승무원 31명 전원이 사망하는 사건이 또 발생했습니다. 닉슨 행정부도 항모를 급파하고 전술핵 사용을 검토했지만 역시 실행하지 않았습니다.
정리하자면, 푸에블로호 사건은 냉전 시대 약소국이 강대국을 상대로 벌인 대담한 도발이었고, 미국이 군사적 보복 대신 굴욕적 협상을 선택한 사례로 남아 있습니다. 57년이 지난 오늘도 푸에블로호는 평양에서 북한의 선전물로 전시되고 있으며, 미 해군 명단에는 여전히 현역함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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