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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이야기

조선시대 과거 시험의 모든 것, 경쟁률과 난이도는 어땠을까

by 정보정보열매 2025. 10.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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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과거 시험의 모든 것, 경쟁률과 난이도는 어땠을까

 

 

드라마나 영화에서 과거 급제를 축하하는 장면, 한 번쯤 보셨죠? 빨간 어사화를 꽂고 말을 타고 가는 장원급제자의 모습은 당시 최고의 영광이었습니다.

조선시대 양반 자제들에게 과거 시험은 출세의 유일한 통로였습니다. 하지만 그 길은 현대 입시보다 훨씬 험난했습니다. 역사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조선 500년간 문과 급제자는 총 1만 4천여 명에 불과했습니다. 연평균 28명만 합격한 것이죠.

과연 조선시대 과거 시험은 어떻게 치러졌고, 얼마나 어려웠을까요? 그리고 급제 후에는 어떤 삶이 기다리고 있었을까요? 지금부터 조선시대 최고의 관문이었던 과거 시험의 모든 것을 알아보겠습니다.

과거시험 풍습

과거 시험의 종류와 구조

문과, 무과, 잡과

조선시대 과거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뉩니다. 문과는 문관을 뽑는 시험으로 가장 권위가 높았습니다. 무과는 무관을 선발했고, 잡과는 의학, 천문, 통역 등 기술직 관리를 뽑았습니다.

이 중 문과가 압도적으로 인기가 높았습니다. 조선은 유교 국가였기에 문치주의를 강조했고, 문과 출신만이 정승이나 판서 같은 고위직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무과나 잡과는 아무리 출세해도 한계가 있었죠.

문과 시험의 3단계

문과는 초시(초장), 복시(회시), 전시(殿試) 3단계로 진행되었습니다.

초시: 지역별로 치러지는 예비시험으로, 합격자 240명을 선발했습니다. 시험 과목은 '사서삼경'과 '시부(詩賦)'였습니다. 사서삼경은 논어, 맹자, 중용, 대학과 시경, 서경, 주역이며, 시부는 한시와 문장을 짓는 것입니다.

복시: 초시 합격자가 한양에서 치르는 본시험으로, 33명을 선발했습니다. 초시보다 훨씬 어려웠고, 3일에 걸쳐 총 7편의 글을 써야 했습니다. 책문(정책 논문), 표전(외교 문서), 시부 등을 작성했죠.

전시: 왕 앞에서 치르는 최종 시험으로, 복시 합격자 전원이 응시했습니다. 등수를 매기는 과정으로, 1등이 장원급제입니다. 왕이 직접 출제하고 채점에도 관여했습니다.

과거 시험의 경쟁률과 난이도

상상을 초월하는 경쟁률

조선시대 인구가 1,000만 명 정도였고, 그중 양반 비율이 10% 내외였습니다. 남성만 응시할 수 있었으니 잠재적 응시자는 약 50만 명이었습니다.

하지만 문과 급제자는 3년마다 33명, 연평균 11명에 불과했습니다. 단순 계산으로도 경쟁률이 약 4만 5천:1입니다. 현대 사법고시 경쟁률이 20-30:1 정도였으니,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치열했습니다.

실제로는 양반 자제 중에서도 공부할 여건이 되는 사람만 응시했지만, 그래도 초시 경쟁률은 보통 100:1을 넘었습니다. 복시는 240명 중 33명을 뽑으니 약 7:1, 전체적으로는 수백:1의 경쟁률이었죠.

시험의 난이도

과거 시험은 단순 암기가 아니었습니다. 사서삼경 전체를 달달 외우는 것은 기본이었고, 그 내용을 바탕으로 창의적인 논술과 한시를 지어야 했습니다.

시험관이 사서삼경 중 한 구절을 제시하면, 그것이 어느 책 어느 장에 나오는지 정확히 알아야 했습니다. 또한 그 구절의 의미와 주석, 역대 학자들의 해석까지 모두 설명해야 했죠.

시부(한시)는 특히 어려웠습니다. 정해진 운자(押韻字)를 사용해 격조 높은 한시를 즉석에서 지어야 했습니다. 시의 형식, 대구, 평측까지 완벽해야 했죠.

책문(정책 논문)은 국가 현안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으로, 역사적 사례와 유교 경전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논리적으로 전개해야 했습니다.

평생을 바친 준비

과거 시험 준비는 보통 5-10살부터 시작했습니다. 먼저 한자를 익히고 천자문, 동몽선습 같은 초급 서적을 배웠습니다. 이후 사서삼경을 10년 이상 공부했죠.

합격 평균 나이가 30대 중반이었습니다. 20-30년을 공부해야 겨우 합격할까 말까 한 시험이었던 것입니다. 40-50대에 겨우 급제하는 사람도 많았고, 평생 공부하다 끝내 합격하지 못한 사람도 부지기수였습니다.

과거 시험장의 풍경

시험 당일의 모습

시험은 보통 성균관이나 각 지역의 향교에서 치러졌습니다. 응시자들은 새벽부터 줄을 서서 입장했고, 신분증인 호패를 검사받았습니다.

시험 도중 부정행위를 막기 위해 감시가 매우 엄격했습니다. 책이나 메모지를 몰래 가져오는 것을 막기 위해 옷까지 뒤졌습니다. 화장실도 감시 하에 다녀와야 했죠.

시험 시간은 하루 종일, 때로는 밤까지 이어졌습니다. 촛불을 켜고 밤새 글을 쓰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추운 겨울이나 더운 여름에도 시험은 계속되었죠.

컨닝과 부정행위

엄격한 감시에도 불구하고 부정행위는 끊이지 않았습니다. 작은 글씨로 경전을 필사한 종이를 옷 속에 숨기거나, 관리를 매수하기도 했습니다.

들키면 처벌이 매우 가혹했습니다. 과거 응시 자격을 영구 박탈당하고, 심하면 유배를 가기도 했습니다. 가문 전체가 수치를 당하기 때문에 함부로 시도할 수 없었죠.

유명한 사건으로 '을사사화' 전 윤원형의 아들이 컨닝으로 적발되어 큰 파문이 일었던 일도 있습니다.

합격 후의 삶

장원급제의 영광

전시에서 1등을 하면 장원급제자가 되어 최고의 영예를 누렸습니다. 왕이 직접 어사화(紅牌)를 하사하고, 말을 타고 삼일 동안 한양 거리를 누빌 수 있었습니다.

장원급제자는 바로 정6품 관직을 받았고, 승진도 빨랐습니다. 집안의 영광이었고, 좋은 혼처로 인기가 높았습니다. 조선 500년간 장원급제자는 171명에 불과했습니다.

급제 후의 관직 생활

급제 후에는 성균관에서 일정 기간 공부를 더 한 후 관직에 배치되었습니다. 하급 관리부터 시작해 점차 승진했습니다.

하지만 급제가 곧 출세를 보장하지는 않았습니다. 당파 싸움에 휘말리거나, 왕의 미움을 사면 유배를 가거나 목숨을 잃기도 했습니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매관매직이 성행해 실력만으로는 한계가 있었죠.

그럼에도 과거 급제는 신분 상승의 확실한 수단이었습니다. 서얼이나 중인 출신도 과거에 합격하면 양반 대우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유명한 과거 급제자들

이황과 이이

퇴계 이황은 34세에 문과에 급제했습니다. 늦은 나이였지만 학문적 깊이로 인정받아 영의정까지 올랐습니다. 율곡 이이는 13세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29세에 문과 장원급제했습니다. 천재로 불렸죠.

두 사람 모두 관직보다 학문에 더 관심이 많았고, 수많은 저서를 남겨 조선 성리학의 양대 산맥이 되었습니다.

정약용

다산 정약용은 22세에 문과에 급제해 촉망받는 관료였습니다. 하지만 천주교 박해에 연루되어 18년간 유배 생활을 했습니다.

유배지에서도 학문을 멈추지 않아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 500여 권의 책을 저술했습니다. 조선 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대학자가 되었죠.

허난설헌의 안타까움

여성은 과거를 볼 수 없었습니다. 천재 시인 허난설헌은 오빠 허균이 부러워 "내가 남자였다면 장원급제했을 것"이라고 한탄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그녀의 시는 중국에까지 알려질 정도로 뛰어났지만, 여성이라는 이유로 과거에 응시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27세에 요절한 그녀의 삶은 조선 여성의 한계를 보여줍니다.

과거 제도의 의미

긍정적 측면

과거 제도는 능력 중심의 인재 선발 시스템이었습니다. 신분이 낮아도 실력만 있으면 출세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죠. 이는 세계적으로도 선진적인 제도였습니다.

또한 전국의 인재들이 경쟁하면서 학문 수준이 높아졌습니다. 성리학이 발달하고, 한글 문학이 꽃피운 배경에는 과거 제도가 있었습니다.

부정적 측면

과거에 집중하면서 실용 학문이 등한시되었습니다. 경전 해석에만 매달려 과학기술이나 상공업은 발전하지 못했습니다.

또한 조선 후기로 갈수록 부정부패가 심해졌습니다. 돈으로 합격증을 사는 경우도 있었고, 집안 배경이 중요해지면서 제도의 취지가 퇴색했습니다.

무엇보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과거 공부에만 인생을 바치다가 실패하는 비극이 반복되었습니다.

현대 입시와의 비교

조선시대 과거와 현대 입시는 놀랍도록 비슷합니다. 치열한 경쟁, 긴 준비 기간, 엄청난 스트레스, 부정행위 논란까지 닮았습니다.

차이점도 있습니다. 현대는 다양한 직업과 성공 경로가 있지만, 조선시대는 과거가 거의 유일한 출세 수단이었습니다. 또한 현대는 여성도 평등하게 기회를 받지만, 조선시대는 남성에게만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과거는 1894년 갑오개혁으로 폐지되었습니다. 500년간 이어진 조선의 상징적 제도가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입니다.


조선시대 과거 시험은 당시 최고의 영예였지만, 그만큼 험난한 길이었습니다. 수십 년을 공부해도 합격을 장담할 수 없었고, 합격 후에도 파란만장한 관직 생활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치열한 경쟁 속에서 조선의 찬란한 학문과 문화가 꽃피웠습니다. 조선이 500년간 지속될 수 있었던 것도 과거를 통해 우수한 인재를 등용했기 때문입니다.

현대를 사는 우리도 입시와 취업이라는 관문을 통과해야 합니다. 조선시대 선조들의 치열했던 도전 정신을 되새기며, 우리만의 길을 개척해나가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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