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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전

정철 왜 '독철(毒澈)'로 불렸을까? - 관동별곡 시인의 두 얼굴

by 정보정보열매 2025. 1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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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철 왜 '독철(毒澈)'로 불렸을까? - 관동별곡 시인의 두 얼굴

 

"음흉한 성혼과 악독한 정철이 나의 어진 신하를 죽였다(兇渾毒澈殺我良臣)."

선조가 한 말이다. 정철을 '독철(毒澈)', 즉 '악독한 정철'이라고 불렀다. 한때 "백관 중의 독수리요, 대궐의 맹호"라며 극찬했던 왕이 같은 인물을 '악독하다'고 비난한 것이다.

정철(1536~1593). 우리는 그를 『관동별곡』의 시인으로 기억한다. "강호에 병이 깊어 죽림에 누웠더니..." 교과서에 나오는 가사문학의 대가. 풍류를 아는 문인.

하지만 정철의 진면목은 문학사가 아니라 정치사에서 찾아야 한다. 그는 서인의 영수였고, 한치의 타협도 없는 강직한 정치인이었으며, 정여립 옥사를 주관한 숙청의 주역이었다.

두 얼굴의 정철. 과연 그는 누구였을까?

"마치 하늘나라 사람 같았다"

어느 날 누군가가 이항복에게 정철이 어떤 사람인지 물었다. 이항복은 우리에게 '오성과 한음' 중 오성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송강(정철의 호)이 반쯤 취해서 즐겁게 손뼉을 마주치며 이야기 나눌 때 바라보면 마치 하늘나라 사람인 듯 하지."

풍류를 잘 알아 천상세계에나 만날 수 있는 인물이라는 뜻이다. 정철의 제자 권필은 스승의 묘소를 지나며 이렇게 읊었다.

빈 산에 낙엽지고 비 쓸쓸히 내리는데 송강 재상 풍류는 이곳에서 적막하네 섭섭타, 술 한잔 올리지도 못하나니 그 옛날 장진주사 오늘을 말한 듯

정철은 가사문학의 대가였다. 『관동별곡』『사미인곡』『속미인곡』『성산별곡』 등 4편의 가사와 100여 수 이상의 시조를 남겼다.

특히 『관동별곡』은 강원도 관찰사로 재직할 때 지은 작품인데, 백성들의 풍속이 우매한 것을 보고 교화를 위해 지었다고 한다. 문학에도 목적이 있었다.

이렇게 우리에게 가사문학의 대가로 알려진 정철. 하지만 그의 실상은 치열한 정치 현장에서 온몸으로 상대 당파에 맞섰던 정치인이었다.

을사사화의 그늘

정철은 어린 시절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다. 누이 중 한 명은 인종의 후궁이었고, 또 한 명은 종친 계림군의 부인이었다. 왕실의 인척으로 위세가 대단했다.

하지만 명종 즉위 후 발생한 을사사화에 계림군을 비롯해 부친과 형이 연루되면서 급격하게 가세가 위축되었다. 전라도 창평으로 낙향해 약 10여 년을 지냈다.

하지만 이 시기는 정철의 일생에서 대단히 중요했다. 스승 기대승, 김인후, 유희춘 등을 만나 학문을 배웠고, 이이, 성혼 등과 교류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알렸다.

1562년(명종 17년) 과거에 급제하며 관료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원칙과 소신을 가진 관료였다.

경양군 사건: 왕의 명령도 거부하다

1566년(명종 21년), 정철이 사헌부 정언으로 재직할 때 사건이 발생했다.

국왕 명종의 종형인 경양군이 처가의 재산을 빼앗으려고 서얼 처남을 꾀어 죽인 뒤 강물에 던져버렸다. 왕족의 살인 사건이었다.

명종은 자신의 종형이 간여된 일이므로 조용히 넘기려 했다. 정철을 설득해 논박을 정지하도록 했다.

하지만 정철은 왕의 요청을 거부했다. 파면되었고, 전라도 광주로 돌아갔다. 3년간 주요 관직에 낙점되지 않았다.

선조가 즉위하면서 이조좌랑에 제수되었다. 하지만 그의 강직함은 변하지 않았다.

격탁양청(激濁揚淸): 탁한 것을 물리치고 맑은 것을 끌어들이다

선조 즉위 후 정철은 이조좌랑을 시작으로 관직 생활을 재개했다. 사화기를 거치면서 누적된 훈척정치의 청산에 적극 나섰다.

그가 내세운 것은 격탁양청(激濁揚淸). 탁한 것을 몰아내고 맑은 것을 끌어들인다는 뜻이다. 사림정치의 선명성을 드러내기 위한 방법이었다.

정철이 이조좌랑으로 있으면서 사림들의 진출을 도모하자, 김개 등이 견제했다.

"오늘날 사류의 폐습은 거의 기묘 연간과 같다."

기묘 연간이란 기묘사화 당시 화를 당한 조광조 등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정철을 조광조에 비유하며 위험인물로 몰아간 것이다.

정철은 김개의 발언이 못되고 악한 말이라고 지적했다. 선조가 언성을 높이며 정철을 힐책했다.

정철은 굴하지 않았다.

"아무리 뇌정(雷霆)과 같은 진노가 계시더라도 신의 말씀은 다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김개 등을 기묘사화를 일으킨 남곤과 심정에 비교하며 비난했다. 결국 삭탈관직되었다.

"백관 중의 독수리요, 대궐의 맹호"

한치의 타협도 없는 정철의 정치 자세는 선조 8년경 붕당이 형성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조정에 동인과 서인의 당파가 있었는데 정철은 동인이 가장 기피하고 싫어하는 인물이었다."

동서인 분당 초기, 정철은 낙향해 있다가 이조판서에 제수되어 서울로 올라왔다. 그리고 동인 박근원, 홍여순, 허봉 등 3인을 귀향보낼 것을 청했다.

김우옹 등이 불가하다며 정철을 탄핵했다. 서로 왈가왈부했다.

선조가 하교했다.

"정철은 그 마음이 곧고 행실은 바르나 다만 그 말이 곧아 당대에 용납되지 못하고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샀노라. 그러나 그가 힘을 다해 직무에 충실했던 점과 맑고 충직한 절의 때문에 초목조차 그 이름을 다 기억한다. 정말 이른바 백관 중의 독수리요, 대궐의 맹호라 할 만하다."

독수리는 중국 후한 때 재상 공융이 예형을 천거하면서 "솔개 백 마리가 있다 해도 한 마리 독수리를 당하지 못한다"고 한 데서 유래한다. 대궐의 맹호란 송나라 유안세가 간의대부로 있으면서 오직 공도만을 지키고 불의에 타협하지 않은 데서 유래한다.

율곡 이이조차 정철에게 화평을 권유할 정도였다. 하지만 정철은 변하지 않았다.

정여립 옥사: 서인의 반격

동서인 분당 이후 정철이 속한 서인은 조정에서 상대적으로 열세였다. 반전의 기회가 된 사건이 정여립 옥사였다.

1589년(선조 22년) 10월, 황해 감사 한준의 비밀 장계로 정여립 옥사가 촉발되었다. 그 진위 여부는 당대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여전히 논란이다.

정철은 심문을 주관하는 위관으로 활동했다. 정여립은 자살로 생을 마감했고, 이발·이길 형제와 정언신·백유양·최영경·정개청 등 동인측 명사가 대거 처벌되었다.

그리고 서인 주도의 정국으로 전환되었다. 그 중심에 정철이 있었다.

『연려실기술』은 이렇게 기록한다.

"큰 변고가 일어나니, 서인들이 기뻐 날뛰고 동인들은 기운을 잃었다. 여립의 역변이 일어난 후에는 갓을 털고 나서서 서로 축하하였으며 동인들은 스스로 물러나고, 서인은 그 자리에서 올라서 거리낌 없이 사사로운 원한을 보복하였다."

이것이 정철이 '독철(毒澈)', 즉 악독한 정철로 불리게 된 이유다.

건저의(建儲議): 몰락의 시작

주도권을 잡은 정철과 서인은 승부수를 띄웠다. 세자 책봉과 관련된 건저의(建儲議)였다.

국왕이 생존한 상태에서 세자 책봉은 대단히 민감한 문제였다. 신하들의 입장에서 쉽게 꺼낼 수 없는 이야기였다.

『송강연보』에 따르면, 정승이 된 유성룡이 정철에게 말했고, 삼정승 이산해·유성룡·정철이 함께 국왕 앞에서 건의했다고 한다. 세자 책봉 대상자는 광해군이었다.

하지만 이산해가 배신했다. 약속한 날짜에 나오지 않을 뿐 아니라, 선조가 의중에 두고 있던 인빈 김씨의 소생인 신성군의 외삼촌 김공량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정철 등이 신성군 모자를 제거하려 한다고 했다.

인빈 김씨에게 전해지고, 선조에게까지 알려졌다. 선조는 이 사실을 공표하지 않고 있다가, 뒷날 경연에서 정철이 세자 책봉을 건의하자 크게 노하여 그 자리에서 좌의정에서 체직시켰다.

임진왜란 때 잠시 재등용되기는 했으나, 정철의 정치 일생은 건저의 문제로 사실상 마감했다.

상반된 평가

정철은 당대뿐 아니라 이후에도 극명하게 상반되는 평가를 받는다.

서인의 평가

조헌: "오로지 임금을 높이고 백성을 보호하며 강개한 곧은 말만 하기 때문에 백관들이 두려워한다."

김장생: 그를 군자라 평가하면서 그를 비난한 자를 소인이라 지목.

신흠: "정철은 평소 지닌 품격이 소탈하고 대범하며 타고난 성품이 맑고 밝으며, 집에 있을 때에는 효제하고 조정에 벼슬할 때에는 결백하였으니, 마땅히 옛사람에게서나 찾을 수 있는 인물이었다."

동인(북인)의 평가

『선조실록』: "정철은 성품이 편협하고 말이 망령되고 행동이 경망하고 농담과 해학을 좋아했기 때문에 원망을 자초하였다. 최영경이 옥에 갇혀 있을 적에, 그가 영경과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은 나라 사람이 다같이 아는 바이고 그가 이미 국권을 잡고 있었으므로 법을 집행하는 사람들도 모두 정철과 잘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그런데 마침내 죽게 만들었으니 남의 손을 빌려 했다는 말을 어떻게 면할 수 있겠는가."

선조: "음흉한 성혼과 악독한 정철이 나의 어진 신하를 죽였다(兇渾毒澈殺我良臣)."

한때 "백관 중의 독수리요, 대궐의 맹호"라고 극찬했던 왕이 같은 인물을 '독철(毒澈)', 즉 악독한 정철이라고 비난한 것이다.

정철은 누구였나?

정철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강직한 원칙주의자 왕의 명령도 거부할 만큼 원칙을 지켰다. 경양군 사건에서 보듯, 권력 앞에서도 굽히지 않았다.

타협 없는 당파 정치인 "동인이 가장 기피하고 싫어하는 인물"이었다. 한치의 타협도 없었다. 격탁양청을 외치며 선명성을 강조했다.

정여립 옥사의 주관자 동인을 대거 숙청한 정여립 옥사를 주관했다. "거리낌 없이 사사로운 원한을 보복"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가사문학의 대가 하지만 그는 풍류를 아는 문인이기도 했다. 『관동별곡』 같은 불멸의 작품을 남겼다.

정치적 패배자 건저의 문제로 몰락했다. 임진왜란 때 잠시 재등용되었지만, 정치적으로는 실패한 삶이었다.

독수리인가, 독철인가?

"백관 중의 독수리요, 대궐의 맹호" "음흉한 성혼과 악독한 정철(兇渾毒澈)"

같은 사람에 대한 정반대의 평가다. 어느 것이 진실일까?

아마도 둘 다 진실일 것이다. 정철은 원칙을 지키는 강직한 인물이었지만, 동시에 타협을 모르는 당파 정치인이었다. 부정부패와는 거리가 먼 결백한 관료였지만, 정적을 무자비하게 숙청하는 냉혹한 정치인이기도 했다.

율곡 이이가 화평을 권유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이는 조제보합론을 주장하며 당쟁을 해소하려 했다. 하지만 정철은 반대였다. 격탁양청. 탁한 것을 몰아내고 맑은 것을 끌어들이자는 것이었다.

누가 옳았을까? 역사는 답하지 않는다. 이이의 조제보합도 실패했고, 정철의 격탁양청도 실패했다. 당쟁은 계속되었고, 조선은 약해졌다.

마치며: 원칙의 양날

정철의 이야기는 원칙의 양날을 보여준다.

원칙을 지키는 것은 중요하다. 권력 앞에서도 굽히지 않는 강직함은 존경받아 마땅하다. 정철이 "백관 중의 독수리요, 대궐의 맹호"로 불린 이유다.

하지만 타협 없는 원칙은 독이 될 수 있다. 정치는 타협의 예술이다. 한치의 양보도 없는 선명성은 갈등을 심화시킨다. 정철이 "독철(毒澈)"로 불린 이유다.

정여립 옥사는 그 극단을 보여준다. 정치적 반대자를 역모로 몰아 대거 숙청했다. 원칙인가, 복수인가? 정의인가, 권력욕인가?

건저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세자 책봉은 필요했을 것이다. 하지만 방법이 문제였다. 정치적 계산 없이 밀어붙이다가 실패했다.

관동별곡의 시인 정철. 하늘나라 사람 같았던 풍류객 정철. 하지만 정치 현장의 정철은 달랐다. 강직했지만 냉혹했고, 원칙적이었지만 타협을 몰랐다.

40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정철에게서 무엇을 배워야 할까?

원칙은 중요하다. 하지만 원칙만으로는 부족하다. 정치는 현실이다. 타협과 조정이 필요하다. 율곡 이이가 정철에게 화평을 권유한 이유를 생각해봐야 한다.

"독수리"와 "독철" 사이. 그 간격이 정철의 비극이고, 조선 당쟁의 비극이며, 원칙주의자의 딜레마다.

정철은 실패했다. 하지만 그의 실패는 우리에게 교훈을 준다. 원칙도 중요하지만 지혜도 필요하다. 강직함도 좋지만 유연함도 필요하다. 선명성도 중요하지만 화합도 필요하다.

관동별곡을 읽으며 정철의 풍류를 즐기되, 정치인 정철의 실패도 기억해야 한다. 그것이 역사를 대하는 올바른 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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