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곧장 궁중으로 달려가 영류왕을 시해하고 시신을 몇 토막으로 잘라서 구덩이에 버렸다."
642년 10월, 고구려의 실권자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시해한 장면이다. 충격적이다. 왕의 시신을 토막 내어 구덩이에 버렸다니.
영류왕(재위 618~642). 그는 612년 고-수 전쟁의 영웅이었다. 수나라 대군을 격파하고,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을 가능하게 만든 인물이었다. 그리고 25년간 큰 전쟁 없이 나라를 안정적으로 다스린 왕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키운 부하 연개소문에게 살해당했다. 그것도 시신이 토막 나는 참혹한 방식으로.
전쟁 영웅이 왜 이런 비참한 최후를 맞았을까?
612년: 고-수 전쟁의 영웅
영류왕은 고구려 25대 평원왕의 아들이자, 26대 영양왕의 이복동생이다. 이름은 건무(建武)였다. 580년대 초반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612년, 그가 30세 무렵이었다. 고구려와 수나라 사이에 전쟁이 발발했다. 수양제가 113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한 것이다.
고건무(영류왕)는 고구려 수도를 방어하는 사령관이었다. 바다를 건너 평양 부근에 도착한 수나라 좌익위대장군 래호아가 지휘하는 수만의 군대를 막아야 했다.
래호아의 임무는 중요했다. 요동을 통과해 육로로 평양을 향하는 수나라 30만 별동대에게 군수품을 보급하고, 함께 평양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고구려로서는 이들을 빨리 격파해 수나라 별동대와 만나지 못하게 해야 했다.
고건무는 유인작전을 펼쳤다.
『북사』 래호아 열전에 따르면, 영양왕의 동생 건무가 "날래고 용감하기가 매우 뛰어나(驍勇絶倫)", 죽을 각오를 한 결사대 100명을 직접 이끌고 래호아의 진영으로 돌진했다고 한다.
형 영양왕처럼 고건무도 용감하게 적진을 향해 돌격해 군사들에게 모범을 보였다. 하지만 이것은 계략이었다. 일부러 패해 작은 승리를 안겨주어 적을 교만하게 만드는 전술이었다.
공을 세우려는 욕심이 컸던 래호아는 자주 승리를 거두어 평양 장안성 앞에 이르자, 자신의 군대만으로 고구려 수도를 함락시킬 야심을 품었다. 부총관 주법상이 수나라 육군을 기다려야 한다고 말렸지만, 래호아는 직접 4만 대군을 이끌고 장안성으로 진군했다.
고건무는 외성을 비워놓고 적을 유인했다. 외성 안에 들어온 수나라 군대는 기강을 잃고 약탈에 나섰다. 바로 그때 숨겨두었던 고구려 군대가 나타나 대오가 흩어진 수나라 군대를 섬멸시켰다.
간신히 도망간 수나라 군대는 해안가 진지만을 겨우 지킨 채, 수나라 육군과 만나 합동작전을 펼칠 능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고건무의 활약 덕분에 을지문덕은 보급품을 받지 못해 지친 30만 수나라 별동대를 살수에서 대파할 수 있었다.
이처럼 고건무는 뛰어난 지략과 용감함을 갖춘 612년 고-수 전쟁의 영웅이었다. 군대 내 위상이 높아지고 사람들의 지지를 얻으면서, 그는 왕위 계승자로 부상했다.
618년 영양왕이 죽자, 고건무가 왕위에 올랐다. 전쟁 영웅이 왕이 된 것이다.
평화주의 정책: 당나라와의 전쟁을 피하다
영류왕이 왕위에 오른 618년은 마침 고구려의 숙적 수나라가 멸망하고 당나라가 등장한 시기였다.
영류왕은 당나라와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려 했다.
- 619년, 621년, 622년: 당나라에 사신 파견
- 622년: 포로 교환 (수나라 포로 1만 명 송환)
- 624년: 당나라가 보낸 도사와 도교서 접수
- 당나라의 책봉도 표면적으로는 수용
당 고조는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고구려와의 관계는 명분과 실제가 다르다. 굳이 신하의 예를 강요해 고구려와 갈등을 일으킬 필요가 없지 않느냐."
책봉의 실질적 의미는 거의 없었다. 당나라는 수나라를 거듭 격파한 고구려의 실력을 잘 알고 있었기에, 겉으로는 우호적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안으로는 고구려를 견제했다. 622년 고구려에서 이탈해 당나라에 귀부한 말갈의 추장 돌지계를 고구려와 가까운 연주 총관에 임명하는 등, 압박을 가했다.
왜 평화를 원했나? 동돌궐의 위협
영류왕이 당나라와 화친을 원한 이유는 당나라를 두려워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진짜 이유는 유목제국 동돌궐이 강성해졌기 때문이었다.
고구려는 551년과 580년대 초에 분리되기 전 강성했던 돌궐과 전쟁을 치른 경험이 있었다.
고-수 전쟁을 지켜보며 힘을 축적한 동돌궐은 수-당 교체기 중원의 여러 군웅들로부터 조공을 받을 정도로 강해졌다. 고-수 전쟁의 최대 수혜자였다.
동돌궐은 고구려의 핵심 이익이 걸린 요해(遼海, 요서 북부 지역)의 거란족을 향해 세력을 확대했다. 전쟁 피해를 극복하는 것이 우선이던 고구려로서는 적극 대응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당나라와 갈등을 일으키기보다는 우호 정책을 시행한 것이었다.
그런데 630년 당나라가 동돌궐을 멸망시켰다. 영류왕이 즉시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승전을 축하한 것은 동돌궐을 견제하고 있던 고구려의 속내가 반영된 것이었다.
봉역도와 경관 파괴
고구려는 당나라의 승전을 축하하면서 겸하여 봉역도(封域圖)를 주었다.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제후가 책봉받은 영토에 관한 지도'라는 뜻인데, 이는 당나라의 입장이 반영된 표현이다.
실제로는 양국의 국경선을 확정한 국경지도로, 영토 분쟁을 하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자는 뜻을 밝힌 것이었다.
하지만 당나라의 생각은 달랐다.
626년 아버지를 핍박하고 형과 동생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당 태종 이세민(재위 626~649)은 언젠가는 고구려를 굴복시키려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
당 태종의 야심과 오만함은 631년 8월 극명하게 드러났다. 고구려에 보낸 사신 장손사가 고구려가 수나라와의 전쟁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경관(京觀, 적의 시신을 모아 만든 기념물)을 헐어버린 것이다.
경관 파괴는 곧 고구려의 자부심을 건드리는 일이었다.
천리장성 축조: 전쟁 준비
영류왕은 당나라가 여세를 몰아 고구려를 공격해올 수도 있음을 감지했다. 백성을 동원해 부여성에서 서남쪽 바다에 이르는 천리에 달하는 지역에 장성을 쌓을 것을 명령했다.
천리장성 축조를 연개소문이 제안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이때는 아직 연개소문의 나이가 국내 정치에 간여할 정도가 아니었다.
천리장성 축조는 영류왕의 지시로 632년 2월부터 646년까지 15년간 지속된 거대한 사업이었다.
천리장성은 중국의 만리장성처럼 하나로 연결된 장벽이 아니라, 천리에 걸쳐 여러 곳에 성을 쌓고 보수하여 일종의 네트워크 방어망을 만든 것으로 여겨진다.
이때 축성되고 보수된 성들은 고-당 전쟁에서 적을 막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평화와 준비의 이중 정책
631년부터 639년까지 고구려와 당나라 사이에 사신 왕래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고구려가 천리장성을 건설하며 당장 당나라와 적대적 관계로 돌아선 것은 아니었다.
634년 고구려 승려가 당나라에 입국하는 등 양국의 외교 관계는 지속되었다.
한편 당나라는 팽창을 계속했다.
- 638년: 토번과 싸워 승리
- 서돌궐을 무력으로 압도
- 서역의 여러 소국 제압
- 640년: 고창국 멸망
당나라의 팽창을 예의주시하던 영류왕은 639년 태자 환권을 당에 사신으로 보내고, 당나라 국학에 청년들을 보내 입학시키는 등 우호적 행동을 보였다.
640년 당나라에서 태자의 방문을 답례로 사신 진대덕을 보내왔다. 고창국의 멸망 소식을 알고 있던 영류왕은 당나라의 강성함을 크게 경계하고 충돌을 피하기 위해 먼저 사신을 보냈을 뿐 아니라, 당의 사신도 크게 우대했다.
영류왕의 전략은 명확했다. 한편으로는 천리장성을 쌓아 전쟁에 대비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외교로 전쟁을 피하려 했다.
당 태종의 야심
하지만 당나라는 고구려와의 전쟁을 각오하고 있었다.
641년 8월, 당 태종은 고구려를 방문하고 돌아온 진대덕의 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고구려를 육로와 해로로 나누어 공격하면 쉽게 멸망시킬 수 있으나, 지금은 산동지역이 아직 전쟁의 피해에서 벗어나지 못한 탓에 전쟁을 할 수 없다."
영류왕이 막고자 했던 당나라와의 전쟁은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당 태종의 야심과 당나라의 필요에 의해 발발할 가능성이 높았다.
642년 10월: 연개소문의 쿠데타
60세에 이른 영류왕은 자신의 재위 기간 동안 당나라와 전쟁을 막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소외된 연개소문에 의해 642년 10월 시해되고 말았다.
연개소문은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여러 대신들을 먼저 제거한 후, 곧장 궁중으로 달려가 영류왕을 시해하고 시신을 몇 토막으로 잘라서 구덩이에 버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연개소문이 영류왕에 대해 상당한 적개심을 가졌던 것은 분명하지만, 왜 그가 영류왕을 시해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다.
단지 당나라와의 대외 정책을 놓고 젊은 연개소문과 노회한 정치가 영류왕 사이에 갈등이 빚어진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주전파 vs 평화파?
영류왕과 연개소문의 갈등은 전통적으로 이렇게 해석되어 왔다.
영류왕: 평화파. 당나라와의 전쟁을 피하려 했다. 외교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연개소문: 주전파. 당나라와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강경책을 원했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화된 해석일 수 있다. 영류왕도 천리장성을 쌓으며 전쟁을 준비했다. 단지 시기와 방법에서 연개소문과 달랐을 뿐이다.
아마도 핵심은 이것이었을 것이다.
영류왕: "아직은 아니다. 더 준비해야 한다. 외교로 시간을 벌어야 한다."
연개소문: "지금이다. 당나라가 더 강해지기 전에 싸워야 한다."
누가 옳았을까?
역사의 아이러니
영류왕이 시해당한 642년. 그로부터 3년 후인 645년,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침공했다. 연개소문이 우려했던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하지만 고구려는 버텼다. 안시성 전투에서 양만춘이 당 태종을 격퇴했다. 천리장성의 네트워크 방어망이 효과를 발휘했다. 영류왕이 준비한 방어망이 고구려를 구한 것이다.
만약 영류왕이 살아있었다면 어땠을까? 외교로 시간을 더 벌고, 천리장성을 완성한 후 대응했다면? 아니면 연개소문의 강경책이 더 효과적이었을까?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영류왕이 무능한 평화주의자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엇갈리는 평가
영류왕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긍정적 평가
- 612년 고-수 전쟁의 영웅
- 25년간 큰 전쟁 없이 나라를 안정적으로 다스림
- 국제 정세 변화에 따라 대외 정책을 유연하게 조정
- 천리장성 축조로 전쟁 대비
- 외교로 시간을 벌어 국력을 회복할 기회 제공
부정적 평가
- 당나라에 지나치게 유화적
- 강경파 연개소문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함
- 결국 시해당해 나라를 혼란에 빠뜨림
어느 쪽이 맞을까?
마치며: 시대를 잘못 만난 현실주의자
영류왕은 전쟁 영웅이었다. 612년 수나라 대군을 격파한 용감한 장군이었다.
하지만 왕이 된 후 그는 현실주의자가 되었다. 전쟁의 참혹함을 알았기에 평화를 원했다. 하지만 평화만을 추구한 것은 아니었다. 천리장성을 쌓으며 전쟁을 준비했다.
평화를 원하되 전쟁에 대비하라(Si vis pacem, para bellum).
영류왕의 전략은 이것이었다. 외교로 시간을 벌고, 그 사이 방어망을 구축하는 것. 합리적인 전략이었다.
하지만 그는 시대를 잘못 만났다. 당 태종이라는 야심가가 있었고, 연개소문이라는 강경파가 있었다. 그 사이에서 영류왕은 고립되었고, 결국 시해당했다.
시신이 토막 나 구덩이에 버려진 것은 연개소문의 적개심을 보여준다. 단순한 정치적 갈등 이상의 무언가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확한 이유는 역사의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분명한 것은 영류왕이 612년 고-수 전쟁의 영웅이었으며, 국제 정세의 변화에 따라 대외 정책을 변화시키며 큰 전쟁 없이 나라를 안정적으로 다스리고자 했던 임금이라는 점이다.
그가 준비한 천리장성은 645년 당 태종의 침공을 막아냈다. 안시성 전투의 승리는 영류왕의 유산이기도 했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 하지만 만약 영류왕이 천수를 누리고 천리장성을 완성한 후 당나라와 대결했다면? 역사는 달라졌을까?
알 수 없다. 다만 전쟁 영웅이 평화를 추구하다가 강경파에게 시해당한 비극만은 분명하다.
612년 용감하게 적진에 돌진하던 30세의 고건무. 642년 시신이 토막 나 구덩이에 버려진 60세의 영류왕. 같은 사람의 시작과 끝이 이토록 대조적이다.
역사는 가혹하다. 영웅도 비참하게 죽을 수 있고, 현실주의자도 이상주의자로 오해받을 수 있다. 영류왕의 이야기는 그 사실을 보여준다.
1,38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영류왕을 어떻게 기억해야 할까? 무능한 평화주의자? 아니면 현실을 직시한 전략가?
답은 후자에 가깝다. 그는 전쟁의 참혹함을 알았기에 평화를 추구했고, 평화가 불가능함을 알았기에 전쟁을 준비했다. 그리고 그가 준비한 방어망은 실제로 고구려를 구했다.
연개소문에게 시해당하는 비극적 최후를 맞았지만, 영류왕은 고-수 전쟁의 영웅이자, 25년간 나라를 안정적으로 다스린 유능한 군주였다. 그렇게 기억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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