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마땅히 고난을 주었지만, 너는 마땅히 태평을 주라."
1746년(영조 22년) 12월 27일, 영조가 세조의 훈사를 읽으며 세 번이나 감탄했다. "아! 황보인·김종서 등의 일을 가리키는 것인가? 마치 귀를 잡고 직접 명령하시는 것 같다."
그날은 김종서(1383~1453)와 황보인 등 계유정난 때 화를 당한 이들이 신원되는 날이었다. 죽은 지 293년 만의 복권이었다.
하지만 정작 영조는 주저했다. 이들을 복권한다는 것은 자신의 선조인 세조의 찬탈을 자인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김종서. 그는 16세에 문과에 급제한 천재였고, 6진을 개척한 용맹한 장수였으며, 『고려사절요』를 편찬한 뛰어난 문신이었다. 하지만 1453년 계유정난 때 수양대군에게 살해당했고, 293년간 역적으로 낙인찍혔다.
왜 이런 비극이 일어났을까?
16세 문과 급제: 조선의 신동
현재 우리는 '김종서' 하면 6진 개척을 떠올리고 그를 무신으로 안다. 사실 그의 부친이 무과 출신이었으니 그의 집안으로만 본다면 틀린 말도 아니다.
하지만 김종서는 문과를 통해 관직에 진출한 엄연한 문신이었다.
더욱 그는 조선에서도 드물게 이직과 함께 16세에 과거에 급제한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였다. 우리가 잘 아는 정인지가 19세에, 이덕형이 20세에 급제한 것과 비교해도 상당히 빠른 시기였다.
16세 급제. 오늘날로 치면 고등학교 1학년 나이에 국가 최고 시험에 합격한 것이다. 천재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나는 내 재주를 자부한다"
김종서는 자신의 능력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던 것 같다. 후일 정치적 입장을 달리했던 신숙주는 김종서의 추천으로 한때 그의 휘하에서 관직 생활을 한 적이 있었다.
신숙주 역시 재기가 넘치는 인물이었다. 하루는 김종서가 두만강 일대의 개척과 관련한 조정의 논의가 자신과 다르자, 자신의 뜻을 전달하는 글을 국왕에게 올렸다.
김종서가 올린 글은 수만 자에 달했다고 한다. 이때 김종서는 신숙주에게 쓰게 하고 자신은 구술했다.
그런데 글을 써 내려가는 신숙주의 품새가 마치 평소 자신이 지어 놓은 글과 같이 줄줄 써내려 가면서도 하나도 틀린 글자가 없었다.
김종서는 탄복했다.
"나는 본래부터 내 재주를 자부하고 있지만, 자네도 드물게 보는 큰 재주일세."
자신의 재주를 자부하는 김종서조차 신숙주의 능력에 감탄한 것이다. 이렇게 서로의 재주를 알고 지내던 김종서와 신숙주.
하지만 그들은 결국 계유정난 때 서로 반대의 정치적 방향에 서게 되었다. 역사의 무상함을 느끼게 한다.
6진 개척: 큰 호랑이(大虎)
김종서 하면 무엇보다 먼저 떠오르는 것은 아마도 6진 개척을 주도한 사실일 것이다.
훗날 허균은 이를 높이 평가하면서, 이와 관련해서 김종서가 올린 상소를 "세상의 보통 사람이나 어린 아이의 적은 지혜와 얕은 꾀로 입만 가지고 때워 국가의 일을 망친 자들이 기가 막혀 주둥이를 감히 벌리지 못하게" 한 것이라 하였다.
6진이란 두만강 하류에 위치한 종성·온성·회령·경원·경흥·부령의 여섯 진을 말한다. 이곳은 조선 왕조의 입장에서 왕조 건설의 모태가 되었던 이른바 '흥왕(興王)의 땅'으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지역이었다.
조선으로서는 버릴 수 없는 땅이었다. 특히 세종의 회복 의지는 강했다.
김종서가 이곳과 관련을 맺게 된 것은 1433년 12월 함길도 도관찰사에 제수되면서부터였다. 당시 여진족의 일파인 우디거족이 알목하(지금의 하령) 지방의 오도리족을 습격해 그 추장인 건주좌위도독 동맹가티무르 부자를 죽이고 달아난 사건이 일어났다.
세종은 여진족의 내분을 이용해 북방 개척에 착수했고, 그 책임자로 김종서를 임명한 것이었다.
함길도에서 생활하던 김종서는:
- 화살이 책상에 날아왔으나 안색도 변하지 않았다
- 음식을 만드는 사람이 누차 독약을 넣었으나 죽지 않았다
큰 호랑이(大虎) 그 자체였다.
김종서의 주도로 이곳에 진을 설치하는 한편 남방 지역의 백성을 이주시켜 정착 생활을 하도록 했다. 6진의 설치는 우리나라 북쪽 경계가 두만강 연안에까지 미치게 되는 계기가 된 중요한 사건이었다.
『고려사절요』 편찬: 문무를 겸비하다
김종서는 또한 문종 대에는 『고려사절요』의 편찬을 주도했다.
조선 건국 이후 이전 왕조의 역사를 정리하는 작업은 태조 대부터 시작되어 1451년 『고려사』로 완성되었다. 이때 김종서는 『고려사』가 주제별로 편찬되어 열람에 불편하니 일자별로 기록한 사서를 편찬하자고 건의했다.
그리고 5개월 만에 『고려사절요』 35권을 완성해 올렸다.
고려 왕조 역대의 역사에서 정치에 귀감되는 내용을 중심으로 편찬한 『고려사절요』는 후대 임금들이 정치에 참고하기 위해 편찬한 것이므로 상당히 교훈적인 역사책이다.
아울러 편찬 주체가 『고려사』는 국왕이 중심이 된 데 비해 『고려사절요』는 신하들이 중심이 되었으므로 신하 중심의 사서라고 평해지기도 한다.
이처럼 김종서는 6진을 개척한 용맹한 장수이면서, 동시에 『고려사절요』를 편찬한 뛰어난 문신이었다. 문무를 겸비한 인물이었다.
문종의 고명대신
문종은 승하 직전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는 정부를 개편했다.
- 영의정: 황보인
- 좌의정: 김종서
- 우의정: 정분
그리고 승하에 임박해서는 이들을 비롯해 육조 판서 등을 불러놓고 세자를 앞에 세운 뒤 말했다.
"내 해놓은 일 없이 가거니와 잊지 못하는 것이 이 어린 세자요. 나는 이제 경들에게 간절히 부탁하노니, 부디 저버리지 말고 힘써 보호하여 주기 바라오."
이 자리에 참석했던 어느 누가 부왕의 세자에 대한 애틋한 심정을 모르겠는가? 이 순간 모두 세자에 대한 충성을 다짐했으리라.
그렇게 문종이 덧없이 승하하고 그 뒤를 열두 살의 어린 단종이 왕위에 올랐다.
1453년 10월: 계유정난
이런 순간에 수양대군은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 전국에서 책략가와 한량들을 모았다. 한명회·권람·홍윤성 등 내로라하는 인물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여러 모사와 수많은 장정을 불러 모아 인적 자원을 확보하게 된 수양대군은 서서히 그 야심의 날개를 펼쳤다.
이러한 수양대군에게도 만만치 않은 존재가 있었으니, 그것은 단종을 보필하고 있는 고명을 받은 대신들, 그중에서도 좌의정 지위에 있는 김종서였다.
그는 수양대군이 대사를 추진해 나가는 데 있어서 가장 장애가 되는, 실로 수양대군에게 가시와 같은 존재인 동시에, 또한 제일 먼저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될 인물이었다.
그를 살려두고는 대사를 도모하기 불가능함을 깨달은 수양대군은, 마침내 치밀한 타도의 계획을 세운 다음, 친히 양정, 유숙을 비롯한 몇 사람의 장사를 대동하고, 새문 밖 김종서의 사저로 향하여 거사에 성공함으로써 걸림돌을 제거했다.
이렇게 한순간에 두만강의 벌판을 호령했던 큰 호랑이 김종서는 역사 속에 묻혀버렸다.
293년간의 역적
김종서는 죽었고, 수양대군은 세조가 되었다. 그리고 김종서는 역적이 되었다.
16세에 문과에 급제한 천재. 6진을 개척한 용맹한 장수. 『고려사절요』를 편찬한 뛰어난 문신. 문종의 고명을 받은 충신.
하지만 293년간 그는 역적이었다. 역사책에서 지워졌고, 후손들은 관직에 나갈 수 없었으며, 그의 이름은 금기어가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를 추천했던 신숙주는 수양대군의 편에 섰다. 김종서가 감탄했던 그 재주로, 신숙주는 세조를 섬겼고 정난공신이 되었다.
"나는 본래부터 내 재주를 자부하고 있지만, 자네도 드물게 보는 큰 재주일세."
김종서의 이 말이 허공에 맴돈다. 재주를 인정받던 두 사람이 결국 적이 되어버린 역사의 무상함.
1746년 12월 27일: 300년 만의 복권
영조 22년 12월 27일은 김종서와 황보인 등 계유정난 때 화를 당한 이들과 그 후손들에게 잊을 수 없는 날이었다.
이 날은 국왕과 신하들이 경연에서 당태종이 태자를 위해 지었다고 하는 『제범』을 강하는 날이었다. 마침 황보인과 김종서의 후손들이 신원을 청원하기 위해 올린 글이 있었는데, 이때 이 글이 논란되었다.
국왕은 처음에는 이들의 복권을 주저했다. 이들을 복권한다는 것은 자신의 선조인 세조의 찬탈을 자인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하들의 입장은 영조와 달랐다. 영의정 김재로는 김종서를 복권하는 것은 태종이 즉위 직후 정몽주를 복관한 사실과 같다고 하면서 신원을 요청했다.
더하여 세조도 아들인 예종에게 "나는 고난을 주었지만 너는 태평을 주라"고 하였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주저하는 영조를 압박했다.
마침 홍문관에 소장되어 있던 『제범』에 세조의 훈사가 첨부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영조는 즉시 책을 가지고 오도록 한 뒤 앞의 구절을 말하면서 이들의 신원을 명령했다.
"아! 황보인·김종서 등의 일을 가리키는 것인가? 마치 귀를 잡고 직접 명령하시는 것 같다."
실로 이들 사후 293년 만의 일로, 영조에 앞서 숙종 대에 이미 단종과 사육신이 복권되면서 이들 후손들이 관직에 등용된 적은 있었으나 정작 자신들의 복권은 이때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로써 김종서 등은 사육신과 마찬가지로 충의(忠義)의 상징적인 인물이 되었다.
물론 이는 당시 신료에게 군주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려는 국왕의 의도가 반영된 것이기는 하지만, 개인적인 입장에서는 역적에서 충의의 상징으로 전환되는 순간이었다.
역사의 아이러니
김종서의 이야기는 역사의 아이러니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16세 급제한 천재가 역적이 되었다. 조선에서도 드물게 16세에 문과에 급제한 인물. 하지만 그 재주가 오히려 수양대군의 견제를 받는 이유가 되었다.
6진을 개척한 장수가 자기 집에서 죽었다. 두만강 벌판을 호령하던 큰 호랑이. 화살이 날아와도 안색을 변하지 않고, 독약을 먹여도 죽지 않던 그 사람이 자기 집에서 수양대군 일당에게 살해당했다.
문무를 겸비한 인물이 293년간 역적이었다. 『고려사절요』를 5개월 만에 편찬한 뛰어난 문신. 하지만 293년간 역사에서 지워졌다.
신숙주를 추천한 사람과 추천받은 사람이 적이 되었다. "나는 본래부터 내 재주를 자부하고 있지만, 자네도 드물게 보는 큰 재주일세." 서로를 인정했던 두 사람이 계유정난에서 반대편에 섰다.
문종의 고명을 받은 충신이 역적으로 죽었다. "부디 저버리지 말고 힘써 보호하여 주기 바라오." 문종의 간절한 부탁을 받았지만, 단종을 지키려다 죽었고, 293년간 역적으로 불렸다.
역사는 누가 쓰는가
김종서의 이야기는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을 증명한다.
수양대군이 승리했기에:
- 김종서는 역적이 되었다
- 신숙주는 공신이 되었다
- 한명회는 영웅이 되었다
- 계유정난은 정당화되었다
하지만 293년 후 역사는 다시 쓰였다:
- 김종서는 충신이 되었다
- 단종은 복위되었다
- 사육신은 추모되었다
- 계유정난은 찬탈로 규정되었다
역사는 변한다. 승자의 기록도 영원하지 않다. 진실은 결국 드러난다. 다만 시간이 걸릴 뿐이다.
김종서는 293년을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결국 명예를 회복했다.
마치며: "나는 고난을, 너는 태평을"
"나는 마땅히 고난을 주었지만, 너는 마땅히 태평을 주라."
세조가 예종에게 남긴 말이다. 자신은 찬탈로 왕위에 올랐지만, 아들은 그 피해자들을 구제하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예종은 그것을 실행하지 못했다. 재위 1년 2개월 만에 승하했기 때문이다.
성종도, 연산군도, 중종도, 인종도, 명종도, 선조도, 광해군도, 인조도, 효종도, 현종도, 숙종도 실행하지 못했다.
293년이 지나서야 영조가 세조의 유언을 실행했다.
김종서는 1453년 죽었고, 1746년 복권되었다. 293년. 거의 300년의 세월이다.
하지만 진실은 드러났다. 16세에 문과에 급제한 천재, 6진을 개척한 용맹한 장수, 『고려사절요』를 편찬한 뛰어난 문신, 문종의 고명을 받은 충신.
그는 역적이 아니었다. 충신이었다.
역사의 교훈은 명확하다.
첫째, 승자의 기록도 영원하지 않다. 세조는 역사를 자기 방식대로 썼지만, 결국 다시 쓰였다.
둘째, 진실은 결국 드러난다. 시간이 걸릴 뿐, 진실은 언젠가 밝혀진다.
셋째, 재주만으로는 부족하다. 김종서와 신숙주 모두 재주가 뛰어났지만, 선택이 달랐고 운명도 달랐다.
넷째, 권력 앞에서 충성은 위험하다. 단종을 지키려던 충성이 293년간 역적으로 만들었다.
다섯째, 역사는 반복된다. 정몽주도, 김종서도, 사육신도 같은 이유로 죽었고 복권되었다.
40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김종서를 어떻게 기억하는가?
16세 급제한 천재? 6진을 개척한 장수? 고려사절요를 편찬한 문신? 계유정난의 희생자? 293년 만에 복권된 충신?
모두 맞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그는 충성을 지키다 죽었고, 300년 후에야 명예를 회복한 비운의 인물이다.
"나는 본래부터 내 재주를 자부하고 있지만, 자네도 드물게 보는 큰 재주일세."
김종서가 신숙주에게 한 말이 허공에 맴돈다. 재주를 인정하던 두 사람이 적이 되고, 한 사람은 293년간 역적으로 불리고, 한 사람은 공신이 되었다.
역사는 가혹하다. 하지만 역사는 정의롭기도 하다. 293년이 걸렸지만, 결국 진실이 드러났다.
김종서는 이제 충의의 상징이다. 두만강의 큰 호랑이는 293년 만에 명예를 되찾았다.
역사는 느리지만 정의롭다. 그것이 김종서의 이야기가 주는 위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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