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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이야기

조선 최초의 폭탄 테러, 민승호 암살 사건의 미스터리

by 정보정보열매 2026. 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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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4년 겨울, 조선의 정치는 격변기를 맞고 있었습니다. 10년간 절대 권력을 휘둘렀던 흥선대원군이 물러나고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었으며, 명성황후와 그 일가인 여흥 민씨 세력이 새롭게 조정을 장악해 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 한 인물이 있었습니다. 명성황후의 양오빠이자 민씨 척족의 수장, 병조판서 민승호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권력의 정점에 오른 지 불과 한 달 만에 한국 역사상 전례 없는 방식으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바로 폭탄 테러였습니다.

운명의 날, 1874년 음력 11월 28일

그날 민승호는 자택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당시 그는 양어머니의 상을 치르는 중이었는데, 마침 조용한 곳에서 아들을 위해 기도를 올리려 승려를 불러들인 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신원을 알 수 없는 한 승려가 선물이라며 상자 하나를 전해왔습니다.

민승호와 그의 가족들은 의심 없이 상자를 받아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상자를 열려는 순간, 굉음과 함께 화염이 치솟았습니다. 상자 안에 장치되어 있던 폭탄이 터진 것입니다. 민승호는 물론, 그의 아들과 양어머니인 감고당 한산이씨까지 3대가 한순간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민승호는 전신이 시커멓게 타들어가는 와중에도 말을 하지 못한 채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두세 번 가리켰다고 합니다. 그가 가리킨 곳은 다름 아닌 운현궁, 흥선대원군의 거처였습니다.

사건의 배경, 권력 다툼의 중심에서

이 사건을 이해하려면 당시의 정치 상황을 먼저 살펴봐야 합니다.

민승호는 본래 민치구의 둘째 아들로, 그의 누나가 바로 흥선대원군의 부인인 여흥부대부인이었습니다. 처남과 매부 사이였던 셈입니다. 그런데 민승호는 명성황후의 생부인 민치록의 양자로 입적되면서 명성황후의 양오빠가 되었습니다. 왕실의 핵심 인물이 된 것입니다.

문제는 1873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10년간 조선을 실질적으로 통치해온 흥선대원군이 최익현의 탄핵과 고종의 친정 선포로 권좌에서 밀려났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를 민승호를 중심으로 한 민씨 세력이 차지했습니다. 대원군의 입장에서 처남인 민승호는 자신을 배신한 인물이었습니다. 더욱이 그 배후에 며느리인 명성황후가 있다는 것을 대원군은 알고 있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민승호 폭사 사건이 일어나기 전, 이미 여러 차례 수상한 일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1874년 봄 경복궁에 원인 모를 화재가 발생했고, 같은 시기 민승호의 집에도 불이 났습니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에는 대원군의 형인 흥인군 이최응의 저택에서도 방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 모든 사건의 배후로 대원군이 의심받았지만 구체적인 증거는 없었습니다.

누가 폭탄을 보냈는가

사건 발생 후 조정은 대대적인 수사에 나섰습니다. 첫 번째로 잡힌 인물은 장씨라는 성을 가진 남자였습니다. 그는 신철균이라는 인물의 문객이었습니다.

신철균은 흥미로운 이력의 소유자였습니다. 1866년 인천 영종도 첨사로 재직할 당시 프랑스 해군 수백 명을 살해한 공로로 진주병마사로 특진한 무장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이상한 소문이 따라다녔습니다. 그의 장모가 "모월 모시에 흥인군의 집에 화재가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했는데, 실제로 그 예언이 들어맞았다는 것입니다.

이 소문이 퍼지면서 장모가 체포되어 국문을 당했고, 신철균 역시 연루자로 끌려왔습니다. 결국 신철균은 민승호 폭사 사건과 흥인군 저택 방화 사건의 주모자로 지목되어 참형에 처해졌습니다. 그의 재산은 몰수되고 가족은 노비로 전락했습니다.

그러나 과연 신철균이 진범이었을까요? 역사 기록들은 이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황현의 매천야록에는 신철균이 엄한 형문에 못 이겨 거짓 자백을 했다고 기술되어 있습니다. 대동기년이라는 기록에서도 그가 무고하게 죄를 뒤집어썼다고 전합니다.

진짜 배후는 누구였는가

역사학자들은 여러 정황을 근거로 흥선대원군을 실제 배후로 추정합니다.

첫째, 당시 조선에서 이 정도의 고성능 폭탄을 제조할 수 있는 세력은 대원군 정도밖에 없었다는 점입니다. 1874년은 아직 본격적인 개항 이전이었으므로 외국에서 폭탄을 들여오기도 어려웠습니다. 국내에서 이런 폭발물을 만들고 동원하려면 상당한 배경과 자원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둘째, 민승호가 죽으면서 운현궁을 가리켰다는 증언입니다. 물론 이것이 법적 증거가 될 수는 없지만, 당사자가 마지막 순간에 남긴 지목은 가볍게 볼 수 없습니다.

셋째, 동기의 문제입니다. 대원군에게 민승호는 처남이자 동시에 배신자였습니다. 자신의 처남이면서 자신을 몰아내는 데 앞장선 인물, 게다가 그 뒤에 며느리인 명성황후가 있다고 여겼으니 원한이 깊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반론도 있습니다. 민승호와 흥인군을 제거한다고 해서 대원군이 곧바로 권좌에 복귀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의심을 받아 더 궁지에 몰릴 수도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대원군 본인이 직접 지시한 것이 아니라 그의 추종 세력이 대원군의 실각에 분노해 자발적으로 테러를 모의하고 실행한 것이 아니냐는 추측도 있습니다.

그 후의 이야기

고종과 명성황후는 이 사건으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민승호에게는 충정이라는 시호가 내려졌고, 대를 잇기 위해 민태호의 아들 민영익이 양자로 입적되었습니다. 훗날 민영익은 갑신정변 당시 칼에 찔리는 부상을 입고 미국 의사 알렌에게 치료받아 목숨을 건진 인물로 유명합니다.

명성황후는 이 사건의 배후가 대원군이라고 확신했지만 직접 복수하지는 못했습니다. 대원군 추종 세력의 반란을 우려했기 때문으로 분석됩니다. 대신 고종은 대원군의 측근인 신철균을 처형함으로써 대원군에게 경고 메시지를 보냈다는 해석이 있습니다.

그로부터 18년 후인 1892년, 운현궁에서 방화로 추정되는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이것이 민승호의 죽음에 대한 명성황후의 보복이었다고 추측합니다. 진실은 알 수 없지만, 두 사건이 묘한 대칭을 이루고 있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150년이 지난 오늘날의 의문

민승호 암살 사건은 기록상 한반도 역사상 최초의 폭탄 테러로 인한 암살 사건입니다. 현대의 우편폭탄과 유사한 방식이지만 우정총국이 생기기도 전이어서 전근대적인 방법인 인편으로 배달되었다는 점이 특이합니다.

이 사건이 특히 흥미로운 이유는 조선 역사를 통틀어 고관대작이, 그것도 가족과 함께 테러로 암살당한 사례가 거의 없다는 점입니다. 현대 한국으로 치면 기획재정부 장관급 인물이 가족과 함께 폭탄 테러로 사망한 것과 비슷한 대형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진상은 끝내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후일담이 하나 있습니다. 을사조약 이후 대종교 측에서 을사오적을 암살하고자 폭탄을 소포로 보낸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을사오적들은 민승호가 이런 방식으로 죽은 것을 기억하고 있어서 폭탄이 든 상자를 열지 않았고, 암살은 실패했습니다. 150년 전의 사건이 역사의 흐름에 영향을 미친 것입니다.

권력을 둘러싼 다툼 속에서 벌어진 이 비극적인 사건은 여전히 많은 의문을 남기고 있습니다. 누가 폭탄을 만들었는지, 누가 진짜 배후였는지, 신철균은 정말 억울하게 죽은 것인지. 이 모든 것은 15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역사의 미스터리로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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