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6년 태종 6년 3월, 제생원 지사 허도가 임금에게 상소 하나를 올립니다. 그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부인들이 병이 나도 남자 의원에게 진찰받기를 부끄러워하여 자신의 병을 보여주지 않고, 결국 치료도 받지 못한 채 죽음에 이르는 일이 종종 있다는 것입니다. 허도는 해결책으로 어린 여자아이들을 선발하여 의술을 가르친 뒤 부인들을 치료하게 하자고 건의했습니다.
태종은 이 건의를 받아들였고, 이렇게 해서 조선의 의녀 제도가 시작됩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제도가 세계 최초로 여성 의료인을 국가 차원에서 양성한 제도였다는 점입니다. 서양에서 여성이 정식으로 의학 교육을 받고 의사가 된 것은 19세기 중반의 일인데, 조선은 그보다 400년 이상 앞서 여성 의료인 제도를 만든 것입니다.
왜 하필 천민이었을까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생깁니다.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중요한 일을 맡는 의녀가 왜 천민 출신이어야 했을까요.
당시 조선은 성리학이 지배하는 사회였습니다. 남녀유별이라는 원칙이 엄격해서 양반가 여성들은 남자 의원이 자신의 몸에 손을 대는 것 자체를 수치로 여겼습니다. 문제는 이 원칙이 의녀에게도 적용되었다는 겁니다. 양반가나 중인 집안의 여성이 의녀가 되려면 남자 의원에게 의술을 배워야 하는데, 이것 자체가 유교 윤리에 어긋난다고 여겨졌습니다.
결국 해결책은 천민에게서 나왔습니다. 관비, 즉 관청에 소속된 여종들은 신분이 낮았기 때문에 남자 의원에게 의술을 배우는 데 문제가 없었습니다. 또한 국가 소속이어서 마음대로 선발이 가능했고, 어디든 파견할 수 있었습니다. 역설적이게도 천민이기 때문에 전문직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엄격했던 의녀 교육
의녀가 된다고 해서 바로 환자를 치료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의녀들은 상당히 체계적인 교육을 받아야 했습니다.
처음에는 맥경과 침구법을 배웠고, 나중에는 조제법과 산서도 교과 과정에 추가되었습니다. 세종 때는 매달 시험을 치렀고, 성종 때에 이르러서는 의녀를 세 등급으로 나누었습니다. 내의는 대궐에 출입하며 의원으로 활동하는 가장 실력 있는 의녀였고, 간병의는 공부하면서 치료도 겸하는 중급 의녀였으며, 초학의는 교육받은 지 얼마 안 된 초보였습니다. 3년 이상 공부해야 했고, 40세가 되도록 한 가지 처방도 익히지 못하면 원래 하던 일로 돌려보냈습니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3년에 한 번 150명을 뽑았는데, 실력이 출중한 70명은 내의원에 배치되고 나머지는 지방 의원에 소속되었습니다. 내의원 의녀 중에서도 특별히 뛰어난 소수만이 궁궐에서 근무했습니다.
의녀가 맡았던 다양한 역할
의녀의 주된 임무는 물론 의료 활동이었습니다. 진맥을 통해 환자의 상태를 파악하고, 침을 놓고, 출산을 돕고, 환자를 간호했습니다. 특히 부인과와 산부인과 분야에서는 남자 의원이 할 수 없는 영역을 담당했기 때문에 전문가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의녀의 역할은 의료 분야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범죄자의 성별을 감식하거나, 양가 부녀자를 심문할 때 참여하거나, 폭행당한 여성의 상처를 조사하는 일도 의녀의 몫이었습니다. 혼인할 때 신부 집에 가서 혼수품을 검사하거나 부정 유무를 조사하는 일도 했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의사, 간호사, 산파, 법의학자, 조사관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한 셈입니다.
왕비나 후궁의 능을 조성할 때 무덤을 지키는 것도, 후궁이 죽으면 제문을 읽는 것도 의녀가 해야 했습니다. 남자가 할 수 없는 일은 무엇이든 의녀에게 떠맡겨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약방기생이 된 의녀들
안타깝게도 의녀 제도는 연산군 시절에 크게 변질됩니다. 연산군은 혜민서 의녀들을 연회에 동원하여 기생처럼 술을 따르고 음악을 연주하게 했습니다. 의녀들에게 가무와 악기 연주까지 가르쳤고, 기녀와 함께 어전 섬돌 위에 앉게 했습니다.
중종반정 이후 이런 관행을 금지하는 법이 여러 차례 만들어졌지만, 한번 흐려진 풍조는 쉽게 바로잡히지 않았습니다. 의녀는 의기라 불리며 약방기생이라는 멸칭까지 얻게 됩니다. 영조실록에도 이를 지적하는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로 이런 관행은 조선 후기까지 이어졌습니다.
내의원 의녀는 흑단 가리마를 쓰고, 혜민서 의녀는 약방기생이라 불리며 관기 중에서도 제일품에 속했습니다. 의술을 익힌 전문 의료인이면서 동시에 연회에서 흥을 돋우는 기생 역할까지 해야 했던 것입니다.
대장금, 실록에 기록된 의녀
드라마 대장금으로 유명해진 장금이라는 의녀가 실제로 존재했습니다. 중종실록에 장금이라는 이름이 10회 정도 등장하는데, 중종의 총애를 받은 뛰어난 의녀였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장금이 처음 실록에 등장한 것은 1515년 중종 10년입니다.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가 원자인종을 낳고 엿새 만에 숨을 거두자, 출산을 도왔던 의녀들에게 책임을 묻자는 논의가 일어났습니다. 그때 중종은 장금이 출산을 도와 공이 있으므로 상을 주지는 못할지언정 형장을 가할 수는 없다며 단호하게 신하들의 청을 거부합니다.
이후 장금은 대장금이라는 칭호를 받게 되는데, 이것이 특별한 존칭인지 아니면 동명이인 의녀와 구분하기 위한 호칭인지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다만 중종이 종기를 앓았을 때 장금이 약을 써서 상태가 호전되었고, 이에 중종이 쌀 15석을 하사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천민 신분의 의녀로서 수많은 남자 의관을 제치고 왕의 주치의 역할을 했다는 것은 당시 남성 위주의 엄격한 관료제 아래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만큼 장금의 의술이 뛰어났고, 중종의 신뢰가 각별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천민이면서 전문가였던 여성들
의녀 제도는 모순 그 자체였습니다.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고귀한 일을 하면서도 신분은 천민이었습니다. 전문 의료인으로 활동하면서도 연회에서 기생 노릇을 해야 했습니다. 의술에 대한 전문 지식과 경험을 쌓아도 남자 의관과 같은 사회적 지위는 끝내 얻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의녀 제도의 창설과 이들의 활동은 폐쇄적이었던 조선 사회에서 여성이 전문 기술을 익히고 사회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연 획기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비록 천민이라는 굴레를 벗지는 못했지만, 의녀들은 자신들만이 할 수 있는 영역을 개척하며 나름의 전문성과 권위를 확보해 나갔습니다.
400년 전, 신분의 벽과 성별의 한계 속에서도 환자를 치료하고 생명을 살렸던 이름 모를 의녀들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여성 의료인들이 활발하게 활동할 수 있는 것은 그 먼 시작점이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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