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옛날이야기

조선시대 사람들은 영하 40도 추위를 어떻게 버텼을까

by 정보정보열매 2026. 1. 25.
반응형

17세기 조선, 그때 그 시절 겨울은 지금과 달랐습니다. 기상학자들은 이 시기를 소빙하기라고 부릅니다. 지구 전체가 유난히 추웠던 때입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현대인이 상상하기 어려운 극한의 추위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1643년 12월의 기록을 보면 한양에서도 사람들이 얼어 죽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시베리아 발원지의 기온이 영하 40도 이하까지 내려가던 시절, 그 차가운 공기가 한반도를 덮쳤을 때 조선 사람들은 과연 어떻게 살아남았을까요.

온돌, 조선을 구한 난방 혁명

놀랍게도 조선 초기까지 온돌은 귀한 것이었습니다. 태종 17년인 1417년 성균관 기록을 보면, 병을 앓는 유생들을 위해 온돌방 하나를 만들도록 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는 당시 성균관 전체에 온돌방이 단 하나뿐이었다는 뜻입니다. 세종 7년에는 이를 5간으로 늘렸고, 16세기가 되어서야 성균관 전체가 온돌방이 되었습니다.

더 흥미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영조 때까지도 궁궐에 온돌이 많지 않았습니다. 왕의 편전인 창덕궁 희정당마저 온돌방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나인이나 내관들이 추위를 견디다 못해 몰래 건물을 온돌식으로 개조했는데, 그로 인해 땔감을 공급하는 백성들이 곤란을 겪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온돌은 언제 전국으로 퍼졌을까요. 바로 그 17세기입니다. 임진왜란, 인조반정, 이괄의 난, 병자호란으로 건물이 파괴되면서 복구하는 과정에서 온돌이 대거 설치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에 소빙하기의 혹독한 추위가 겹치면서 난방은 생존의 문제가 되었고, 그때부터 상류층까지 온돌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겁니다.

온돌의 과학, 한국인만의 지혜

온돌의 원리는 생각보다 정교합니다. 아궁이에서 불을 때면 뜨거운 공기가 방바닥 아래에 만들어진 통로인 고래를 지나면서 구들장을 덥힙니다. 달궈진 구들장은 열을 서서히 방출하고, 따뜻한 공기는 위로 올라가면서 방 전체를 데웁니다. 전도, 복사, 대류라는 열전달의 세 가지 원리를 모두 활용한 난방 방식입니다.

미국의 유명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한국의 온돌을 직접 체험한 후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국인의 방은 인류가 발명한 최고의 난방 방식이다, 발을 따스하게 해주는 방식이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난방이다. 그는 1937년 이 경험을 바탕으로 현대식 바닥 난방 시스템을 설계했고, 이것이 전 세계로 퍼져나갔습니다.

온돌의 또 다른 장점은 취사와 난방을 동시에 해결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부엌의 아궁이 위에 솥을 걸어 밥을 짓고, 그 열기가 고래를 타고 지나가면서 옆방을 덥혔습니다. 연료 하나로 두 가지 일을 해결한 셈입니다.

온돌 없이 겨울을 나야 했던 사람들

그런데 모든 조선 사람이 온돌방에서 살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온돌은 만드는 데 품이 많이 들었고, 무엇보다 땔감이 엄청나게 필요했습니다. 가난한 백성들은 어떻게 겨울을 버텼을까요.

옷을 껴입는 것이 첫 번째 방법이었습니다. 문익점이 목화씨를 들여와 목화 재배에 성공하기 전까지 하층민의 겨울은 매우 혹독했습니다. 풀솜은 누에고치로 만들어 워낙 비쌌기 때문입니다. 목화솜이 보급된 후에야 일반 백성들도 솜옷과 솜이불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상류층은 갖옷을 입었습니다. 갖옷은 쥐, 양, 여우, 표범, 담비 등 각종 모피로 만든 옷으로, 털 부분이 바깥으로 나오도록 지었습니다. 임금이 신하에게 초피로 만든 갖옷을 하사하는 것이 최고의 애정 표현으로 여겨질 정도였습니다.

종이옷도 있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종이 공예가 매우 발달해서 대야, 요강, 식기까지 종이로 만들었습니다. 옷에 쓰고 남은 종이인 낙복지 속에 솜을 넣고 꿰매 옷을 만들었는데, 솜이 뭉치지 않고 보온성도 좋았습니다. 정묘호란 때 인조가 서북 지방 군사들에게 솜옷과 함께 낙복지 400장을 보내 종이옷을 만들어 입으라고 명한 기록이 있습니다.

추위를 막는 작은 지혜들

집 안에서는 무렴자라는 것을 사용했습니다. 무렴자는 쉽게 말해 조선시대 커튼입니다. 한지로 바른 창호는 외풍을 완전히 막을 수 없었기에, 두꺼운 천으로 만든 무렴자를 문과 창문에 달아 바람을 막았습니다. 최근 온라인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 단아하면서도 기품 있는 모양새가 현대인의 눈에도 아름답게 보였던 것 같습니다.

방장이라는 것도 있었습니다. 칸막이 겸 벽 장식으로 사용하던 것인데, 마름모 형태로 누빈 후 박쥐 문양 등을 덧붙여 장식했습니다. 실용성과 아름다움을 함께 갖춘 물건이었습니다.

손과 발을 따뜻하게 하는 용품도 다양했습니다. 벙거지, 아얌, 조바위, 남바위 같은 방한 모자가 있었습니다. 아얌은 기본적인 방한 모자이고, 조바위는 귀까지 덮을 정도로 조금 더 길었으며, 남바위는 어깨까지 내려오는 긴 형태였습니다. 손에는 토시를 끼고, 발에는 솜버선을 신었습니다.

양반들의 겨울나기, 난로회

양반사대부들만의 독특한 겨울 풍속도 있었습니다. 난로회라는 모임입니다. 음력 10월 초하루에 시작해서 겨울 동안 화로를 둘러싸고 소고기를 구워 먹었습니다. 동국세시기에는 한양에서 화로에 숯불을 활활 피워 번철을 올려놓은 다음 소고기를 기름, 간장, 달걀, 파, 마늘, 고춧가루에 조리하여 구우면서 화롯가에 둘러앉아 먹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농경사회에서 소는 농사에 필수적인 귀한 존재였는데, 이를 잡아먹는 모임이 있었다니 아이러니합니다. 김홍도와 김준근의 풍속화에는 털방석에 앉아 고기를 구워 먹는 양반들의 호기로운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궁에서도 난로회를 열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온돌의 그림자, 민둥산이 된 조선

그러나 온돌에는 어두운 면도 있었습니다. 17세기 이후 온돌이 전국적으로 퍼지면서 땔감 부족이 심각해졌습니다. 조선 후기에는 산림 파괴가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고, 곳곳이 민둥산이 되어 산사태가 일어나기 쉬워졌습니다.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청나라의 벽돌 건축을 찬양하며 한국식 온돌의 단점을 비판했습니다. 황토와 돌로 만들면 온도가 균일하지 않고 열이 새어나가지만, 벽돌로 만들면 수수깡 몇 줌으로도 집 전체를 달굴 수 있다고 했습니다. 성대중은 청성잡기에서 무리한 벌목으로 산림이 파괴되고 젊은이들이 온돌 때문에 게을러진다고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온돌의 보급은 건축 양식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바닥 아래에 큰 구조물을 설치해야 하는 온돌은 다층 건물에 적용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조선시대에 온돌이 퍼지면서 다층 건물이 점차 사라지고 단층 건물이 늘어났습니다. 이러한 경향은 현대에도 이어져서, 각 세대가 한 층을 쓰는 아파트를 선호하는 이유가 되었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지금도 이어지는 온돌의 지혜

전통 온돌은 이제 거의 사라졌지만, 바닥을 데우는 난방 방식은 현대에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온수 보일러를 이용한 바닥 난방은 한국 주택의 표준이 되었습니다. 단독주택이든 아파트든 어지간한 한국 주택에는 바닥 난방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일본 연예인이 한국에 와서 바닥 난방에 놀랐다는 이야기가 화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바닥을 데우는 난방 기구가 고급 주택이나 최신 주택에서나 볼 수 있는 형식이라고 합니다. 웬만한 중산층도 엄두를 못 내는 난방 방식이 한국에서는 당연한 일상인 셈입니다.

2018년에는 온돌문화가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습니다. 기후 환경에 지혜롭게 적응해 온 한국인의 창의성이 발현된 독특한 문화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추위를 이겨낸 조상들의 힘

17세기 소빙하기의 혹독한 추위 속에서 조선 사람들은 살아남았습니다. 온돌이라는 혁명적 난방 기술을 전국에 퍼뜨렸고, 목화솜으로 옷과 이불을 만들었으며, 종이까지 방한에 활용했습니다. 무렴자로 외풍을 막고, 화로를 둘러싸고 고기를 구워 먹으며 추위를 견뎠습니다.

요즘 난방비가 오르면서 걱정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단열 필름이나 뽁뽁이가 다시 유행하고 있다고 합니다. 문틈과 창문 틈을 막고, 두꺼운 커튼을 다는 것은 조선시대 무렴자의 지혜와 다르지 않습니다. 롱패딩이나 히트텍이 있는 지금이 종이옷을 만들어 입던 시절보다는 분명 나은 세상입니다. 조상들이 영하 40도의 추위를 버텨냈듯이, 우리도 이 겨울을 무사히 넘길 수 있을 겁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