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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이야기

1895년 10월 8일 새벽, 경복궁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by 정보정보열매 2026. 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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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10월 8일, 음력으로는 8월 20일이었습니다. 이날 새벽 경복궁 건청궁에서는 세계 외교사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든 끔찍한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한 나라의 국모가 외국 군대와 자객들에 의해 참혹하게 살해되고, 그 시신마저 불태워진 것입니다. 을미사변, 혹은 명성황후 시해 사건으로 불리는 이 비극의 전말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사건의 배경,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서

이야기는 1894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급격히 확대해 나갔습니다. 그러나 러시아, 프랑스, 독일이 나서서 일본이 차지한 랴오둥 반도를 청나라에 돌려주라고 압박했습니다. 이른바 삼국간섭이었습니다.

이 사건을 지켜본 명성황후는 생각했습니다. 일본도 서양 열강 앞에서는 힘을 쓰지 못하는구나. 그렇다면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견제하면 되지 않겠는가. 명성황후는 러시아 공사 베베르와 접촉하며 친러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일본 세력을 조선에서 몰아내기 위한 외교적 시도였습니다.

일본 입장에서 명성황후는 눈엣가시였습니다. 조선을 대륙 진출의 발판으로 삼으려던 일본에게, 러시아와 손잡으려는 조선 왕비는 반드시 제거해야 할 대상이었습니다.

"여우사냥"이라 불린 암살 계획

1895년 9월 1일, 육군 중장 출신 미우라 고로가 새 주한 일본 공사로 부임했습니다. 서울에 도착한 미우라는 두문불출하며 불경을 외우고 지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염불 공사"라 불렀고, 수도승 같다는 평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경계심을 풀기 위한 위장술이었습니다.

미우라는 은밀히 암살 계획을 준비했습니다. 그는 이 작전을 "여우사냥"이라 불렀습니다. 왕비를 여우에 비유한 것입니다. 10월 3일, 일본공사관 밀실에서 미우라를 비롯한 핵심 인물들이 구체적인 계획을 확정했습니다.

동원된 인원은 다양했습니다. 서울 주둔 일본군 수비대, 일본공사관원, 영사경찰, 그리고 규슈 지방에서 건너온 낭인(뜻없이 떠도는 무사)들이었습니다. 특히 구마모토와 후쿠오카 출신 낭인 30여 명이 칼을 들고 참여했습니다. 한성신보 기자들도 가담했습니다. 언론인이 암살에 참여한 것입니다.

흥선대원군도 이 계획에 끌어들여졌습니다. 일본은 사건을 조선 내부의 권력 다툼으로 위장하기 위해 대원군을 앞세웠습니다.

1895년 10월 8일 새벽, 그날의 기록

원래 거사일은 10월 10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조선 정부가 훈련대 해산을 명령하자 계획이 앞당겨졌습니다. 훈련대는 일본군 장교가 훈련시킨 조선 군대로, 이들을 동원하려던 계획에 차질이 생긴 것입니다.

10월 8일 새벽 3시, 흥선대원군이 공덕리 별장을 출발했습니다. 새벽 5시가 넘어 경복궁에 도착했습니다. 일본군 수비대와 낭인들은 광화문을 돌파하고 궁궐 안으로 난입했습니다.

당시 궁궐에는 외국인 목격자들이 있었습니다. 러시아 건축가 세레딘 사바틴과 미군 다이 대령이 현장을 목격했습니다. 이들의 증언이 없었다면 일본은 사건을 완전히 은폐했을지도 모릅니다.

새벽 6시경, 일본인 장교와 낭인들이 건청궁 곤녕합과 옥호루 일대에서 명성황후를 발견했습니다. 칼을 든 자객들은 왕비를 무참히 살해했습니다. 궁내부 대신 이경직은 왕비를 지키려다 칼에 맞아 숨졌고, 왕비와 닮은 궁녀들도 함께 희생되었습니다.

가장 충격적인 것은 그 이후였습니다. 자객들은 왕비의 시신을 근처 숲으로 옮겨 장작더미 위에 올려놓고 석유를 부어 불태웠습니다.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범인은 누구였나

오랫동안 명성황후를 직접 살해한 범인이 누구인지 명확하지 않았습니다. 일본은 조선인 훈련대원 우범선 등이 왕비를 죽였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조작이었습니다.

당시 건청궁 안에 진입한 것은 일본군 장교와 낭인들이었습니다. 조선인 협력자들은 광화문 돌파 후 흥선대원군을 호위하며 대기했을 뿐, 살해 현장인 건청궁 내부에는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2000년대 들어 연구가 진행되면서 직접적인 시해범이 밝혀졌습니다. 동양대 이종각 교수는 당시 일본군 경성수비대 소위 미야모토 다케타로가 명성황후를 칼로 찔러 죽였다고 주장했습니다. 주한영사 우치다 사다쓰치가 본국 외무차관에게 보낸 보고서가 결정적 단서였습니다.

2021년에는 을미사변에 가담한 일본 외교관 호리구치 구마이치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가 발견되었습니다. 그는 사건 다음날 쓴 편지에서 자신이 벌인 행동들을 자세히 기술하며 "(황후 시해가) 생각보다 간단해서 매우 놀랐다"고 적었습니다. 현직 외교관이 왕비 살해에 직접 관여했다고 밝힌 것입니다.

일본의 은폐와 무죄 판결

사건 직후 일본은 철저히 진실을 은폐하려 했습니다. 미우라 공사는 대원군이 사건을 주모했으며, 왕비 살해는 조선군 훈련대가 저지른 것이라고 위증했습니다.

그러나 외국인 목격자들의 증언과 각국 공사관의 조사로 일본의 만행이 드러났습니다. 러시아 대리공사 베베르는 서울 주재 외교 대표단 회합을 주선하고, 일본 공사가 시해사건의 주모자임을 밝히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국제적 비난이 쏟아지자 일본은 관련자들을 본국으로 소환해 재판에 넘겼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예견된 것이었습니다. 미우라 고로 공사를 비롯한 56명 전원이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사건 발생 3개월여 만이었습니다. 세계 역사에서 유례없는 만행을 저지르고도 단 한 명도 처벌받지 않은 것입니다.

사건이 남긴 것들

을미사변 소식이 알려지자 조선 백성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습니다. 전국에서 을미의병이 일어났습니다. 국모 시해와 이어진 단발령에 항거하여 조직적인 의병운동이 본격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고종은 경복궁에서 사실상 감금 상태로 지내야 했습니다. 결국 1896년 2월,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탈출했습니다. 아관파천이었습니다. 일국의 왕이 외국 공사관으로 피신해야 할 만큼 상황은 절박했습니다.

한편 2005년, 명성황후 살해 가담자 48명 중 21명의 출신지인 일본 규슈 구마모토현에서 전·현직 교사들이 "명성황후를 생각하는 모임"을 결성했습니다. 이 모임은 을미사변의 진실을 파헤치고 일본인들에게 알리는 활동을 해오고 있습니다. 가담자 중 한 명인 구니토모 시게아키의 후손이 홍릉을 찾아 사죄하기도 했습니다. 110년이 지나서야 후손들이 고개를 숙인 것입니다.

역사가 기억해야 할 것

을미사변은 단순히 한 사람의 죽음이 아닙니다. 타국의 군대와 자객들이 한 나라의 정궁을 습격해 왕비를 살해하고 시신까지 불태운 사건입니다. 외교 관례를 완전히 무시한 야만적 행위였습니다.

명성황후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다양합니다. 외척 정치를 했다는 비판도 있고,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에 맞섰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과 별개로, 을미사변 자체가 국제법과 인륜을 짓밟은 만행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1895년 10월 8일 새벽,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의 지휘 아래 일본군과 낭인들이 경복궁을 습격해 명성황후를 살해했습니다. 일본은 사건을 은폐하려 했으나 외국인 목격자들의 증언으로 진실이 드러났습니다. 그럼에도 범인들은 전원 무죄로 풀려났습니다. 130년이 지난 지금도 새로운 자료가 발굴되며 그날의 진실이 하나씩 밝혀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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