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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이야기

집현전 학자들이 한글 창제를 도왔다? 사실은 정반대였습니다

by 정보정보열매 2026. 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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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들이 함께 한글을 만들었다." 학교에서 이렇게 배운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실제 역사 기록을 확인해보면 사실과 다릅니다. 집현전 학자들은 한글 창제에 참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격렬하게 반대했습니다. 세종대왕이 반대하는 신하들을 의금부에 투옥하고 한 명은 파직까지 했을 정도였습니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록을 통해 확인해보겠습니다.

한글은 누가 만들었나, 기록이 말하는 진실

조선왕조실록 세종 25년 12월조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달에 임금께서 친히 언문 28자를 만드시니(是月上親製諺文二十八字)." 여기서 "친제(親製)"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왕이 직접 만들었다는 뜻입니다.

1446년 반포된 훈민정음 해례본 끝머리의 정인지 서문에도 명확하게 나옵니다. "1443년 겨울에 우리 전하께서 친히 정음 스물여덟 자를 창제해, 간략하게 예와 뜻을 보여주시며 그 이름을 훈민정음이라 하셨다."

월인석보에 수록된 훈민정음 언해본의 표제는 "세종어제훈민정음(世宗御製訓民正音)"입니다. "어제(御製)"는 왕이 직접 지었다는 의미로, 왕이 시를 짓거나 책을 쓸 때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그렇다면 집현전 학자들은 무슨 역할을 했을까요? 세종이 한글을 창제한 후 그 원리와 사용법을 설명하는 해설서 집필에 참여했습니다. 즉, 문자 자체를 만든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 문자의 설명서를 쓴 것입니다.

왜 비밀리에 만들어야 했나

세종실록에는 훈민정음 창제 과정에 집현전이 관여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최근 학계의 정설에 따르면, 한글은 세종대왕이 문종을 비롯한 소수의 직계 가족 도움만 받아 직접 창제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왜 비밀리에 진행해야 했을까요? 당시 조선은 중국 중심의 사대 질서 안에 있었고, 한자를 사용하는 것이 문명국의 상징이었습니다. 독자적인 문자를 만든다는 것은 그 질서에서 이탈하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기득권 문제였습니다. 한자와 성리학을 바탕으로 학문과 지식을 독점하고 있던 양반 사대부들에게,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는 새 문자는 위협이었습니다. 세종은 이런 반발을 예상하고 창제 과정을 철저히 비밀에 부쳤습니다.

1444년 2월, 집현전의 반란

세종이 훈민정음을 세상에 발표한 것은 1443년 12월이었습니다. 그로부터 석 달도 지나지 않은 1444년 2월 20일,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를 비롯한 학자들이 반대 상소를 올렸습니다.

상소에 이름을 올린 사람은 최만리, 신석조, 김문, 하위지, 정창손, 송처검, 조근 등이었습니다. 당시 최만리는 집현전 상근자 중 가장 높은 직책인 부제학으로, 집현전이 설립될 때부터 20년 이상 근무한 핵심 인물이었습니다.

이들이 제시한 반대 이유는 크게 여섯 가지였습니다.

첫째, 중국과 다른 문자를 만드는 것은 사대모화에 어긋난다는 것이었습니다. 둘째, 스스로 오랑캐가 되려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주장했습니다. 몽골, 서하, 여진, 일본 등 별도의 문자를 쓰는 나라는 모두 오랑캐라는 논리였습니다. 셋째, 이두는 한자를 배우는 데 도움이 되지만 언문은 그렇지 못해 유익함이 없다고 했습니다. 넷째, 널리 의견을 묻지 않고 갑자기 만들었다는 점을 문제 삼았습니다. 다섯째, 이배(하급 관리) 10여 명에게 언문을 가르쳐 운서를 고치려는 것은 신중하지 못하다고 비판했습니다. 여섯째, 동궁(세자)이 문서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세종의 반박, 핵심은 "백성을 위함"

세종은 이 상소에 직접 반박했습니다. 세종실록에 기록된 세종의 말을 확인해보면, 핵심 논리가 명확합니다.

"이두를 제작한 뜻이 백성을 편리하게 하려 함이라면, 지금의 언문도 백성을 편리하게 하려 하는 것이다."

세종은 한글을 사용하면 백성들이 법률 문서를 스스로 읽고 쓸 수 있어 법적으로 억울한 일을 피할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또한 한글로 번역된 삼강행실도를 읽으면 더 많은 충신, 효자, 열녀가 나올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세종의 논리는 최만리를 비롯한 신하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진정으로 걱정한 것은 사대 질서가 아니었습니다. 배우기 쉬운 문자가 보급되면 학문과 지식에 대한 독점이 깨지고, 양반 중심의 지배 질서가 흔들릴 수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세종의 분노, 의금부 투옥

세종은 격노했습니다. 반대 상소를 올린 집현전 학자들을 모두 의금부에 투옥하라고 명했습니다.

특히 세종은 김문과 정창손에게 더 엄한 벌을 내렸습니다. 김문은 처음에 한글 창제에 찬성했다가 반대로 말을 바꾼 점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정창손은 반대 과정에서 선비답지 못한 태도를 보였다는 이유였습니다.

이 사건은 대부분의 학자가 석방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일을 주도한 최만리는 결국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여생을 마쳤습니다. 청백리로 이름 높았던 그였지만, 훈민정음 반대의 대표 인물로 역사에 남게 되었습니다.

반대한 학자들, 한글을 사용했을까

흥미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훈민정음 해례본 집필에 참여한 집현전 학자는 정인지, 최항, 박팽년, 신숙주, 이선로, 이개, 강희안 등입니다. 이들 중 단 한 사람도 개인적으로 한글을 사용한 기록이 없습니다.

만약 이들이 한글 창제의 공동 저작권자라면, 솔선수범해서 한글을 사용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습니다. 해례본 집필은 세종의 명령에 따른 공무였을 뿐, 그들 스스로 새 문자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참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한글이 공문서에 처음 등장한 것은 1894년 갑오개혁 때입니다. 홍범 14조가 한글로 작성되었는데, 이는 한글 반포 후 무려 450년이 지난 후의 일입니다. 그만큼 양반 사대부 중심의 한자 문화가 오래 지속되었습니다.

교과서는 왜 잘못 가르쳤나

현재 일부 교과서에는 "훈민정음은 세종과 집현전 학자들이 직접 만들어 반포하였다"고 기재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세종은 집현전 학자들을 독려하여 훈민정음을 창제했다"고 소개하는 교과서도 있습니다.

이는 명백히 사실과 다릅니다. 세종실록, 훈민정음 해례본, 동국정운, 홍무정운역훈 등 어느 기록을 보아도 한글은 세종이 단독으로 창제했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가장 결정적인 증거는 역설적이게도 반대파의 증언입니다. 최만리의 상소문 자체가 세종이 한글을 만들었음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정치적 반대자의 기록이야말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증거입니다.

세종은 왜 눈병을 무릅쓰고 한글을 만들었나

세종대왕은 평생 질병에 시달렸습니다. 세종실록에는 "한 가지 병이 겨우 나으면 한 가지 병이 또 생기매 쇠로함이 심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다리 통증, 등 종기, 피부병, 당뇨병을 앓았고, 특히 오랜 독서와 당뇨 합병증으로 안질이 심했습니다.

44세쯤에는 어두운 곳에서 지팡이 없이 걷기 힘들 정도였습니다. 훈민정음이 반포된 세종 28년은 세종이 돌아가시기 불과 4년 전이었습니다. 한글 창제는 온갖 질병을 앓던 투병 상황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세종이 그토록 고통을 감수하며 새 문자를 만든 이유는 단 하나였습니다. 훈민정음 서문에 직접 밝힌 대로,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끝내 제 뜻을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으니 내 이를 딱하게 여겨" 쉬운 문자를 만들고자 한 것입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한글은 세종대왕이 단독으로 창제했습니다. 집현전 학자들은 창제에 참여한 것이 아니라, 창제 후 해설서 집필에 동원되었습니다. 오히려 핵심 학자들은 한글 사용에 격렬하게 반대했고, 세종은 이들을 의금부에 투옥하기까지 했습니다. 반대의 핵심 이유는 사대 질서보다 기득권 유지에 있었습니다. 세종은 백성을 위한다는 확고한 신념으로 모든 반대를 무릅쓰고 한글을 반포했습니다. 전 세계 역사를 통틀어 지배자가 피지배자를 위해 만든 유일무이한 문자, 그것이 바로 한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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