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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이야기

조선시대 과거시험 커닝, 상상 초월이었습니다

by 정보정보열매 2026. 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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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닝페이퍼를 콧구멍에 숨기고, 팀을 꾸려서 시험장에 들어가고, 아예 다른 사람을 대신 보내기도 했습니다. 요즘 시험 부정행위가 아닙니다. 500년 전 조선시대 과거시험 이야기입니다. 시험이라는 게 존재했을 때부터 부정행위도 함께 있었다는 말이 있는데, 실제로 조선시대 과거시험의 부정행위 수법을 보면 정말 그 말이 틀리지 않았구나 싶습니다.

10만 명이 몰린 시험장, 목숨을 건 경쟁

과거시험이 왜 그렇게 치열했는지부터 이해해야 합니다. 조선시대에 출세하려면 과거 합격이 거의 유일한 방법이었습니다. 3년에 한 번 치르는 정기 문과 시험 합격자는 고작 33명. 그런데 지원자는 수만 명이었습니다. 정조 24년에 실시한 과거시험에는 무려 10만 3579명이 참가했고, 제출된 답안지만 3만 2664장이었다고 합니다.

경쟁이 이 정도니 시험장 분위기도 말이 아니었습니다. 숙종 때 성균관에서 과거를 치를 때는 서로 밀치다가 6, 7명이 짓밟혀 죽는 일도 있었습니다. 연암 박지원이 과거에 급제한 친구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당시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만에 하나가 되겠다고 시험장에 들어갔다가 밟히고 넘어져 죽거나 다친 사람이 부지기수라, 합격을 축하하기보다 살아서 나온 것을 축하한다는 내용입니다.

콧구멍 속 커닝페이퍼, 의영고

이게 핵심이거든요. 조선시대 커닝페이퍼를 의영고라고 불렀습니다. 의영고는 원래 궁중에서 기름, 꿀, 과일 등을 관장하는 관청 이름인데, 콧구멍 안에 커닝 종이를 숨기는 행위를 이렇게 불렀습니다. 답안 작성에 필요한 모든 자료가 코 안에 들어 있다는 뜻으로 풍자한 것이죠.

과거시험은 사서삼경 같은 유교 경전만 인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시험 준비란 결국 이 방대한 내용을 외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쥐수염으로 만든 아주 가는 붓으로 깨알같이 작은 글씨를 써서 숨기는 방법이 발달했습니다. 중국 명청 시대에는 조끼 안쪽에 사서삼경 전체 내용을 빼곡히 적어 넣기도 했다고 합니다.

시험관이 찍는 도장 열 개

조선 정부도 손 놓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과거시험장에는 금란관이라는 시험 감독관이 있었는데, 부정행위 유형별로 열 개의 도장을 준비하고 있다가 적발하면 해당 도장을 답안지에 찍었습니다.

고반은 고개를 돌려 남의 답안지를 훔쳐보는 행위입니다. 눈동자를 굴리거나 고개를 심하게 움직이면 이 도장이 찍혔습니다. 음아는 입속에서 우물우물 중얼거리는 행위로, 특히 시의 운율을 잡을 때 옆사람에게 힌트를 줄 수 있어서 단속 대상이었습니다. 낙지는 답안지나 초고지를 일부러 땅에 떨어뜨려 남에게 보여주는 행위입니다. 설화는 옆사람과 은밀히 말을 나누는 것이고, 환관은 감독관 눈을 피해 시험지를 바꾸는 행위입니다.

처벌도 꽤 무거웠습니다. 다른 사람의 답안지를 몰래 베끼다 걸리면 곤장 100대에 3년간 강제 노역이었습니다. 책을 들고 시험장에 들어가다 걸리면 3년에서 6년간 과거 응시 자격이 박탈됐습니다.

팀을 꾸려 시험장에 들어가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부정행위가 조직화됩니다. 혼자 시험을 보는 게 아니라 접이라는 팀을 꾸려서 들어가는 겁니다. 이 팀은 보통 서너 명으로 구성됐습니다.

먼저 선접꾼이라 불리는 건장한 행동대원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과거 시험 전날부터 시험장 입구에 진을 치고 있다가, 시험 당일 새벽에 뛰어들어가 문제가 걸리는 현제판 주위의 좋은 자리를 선점했습니다. 자리다툼에서 힘을 쓴 대가로 돈을 받거나, 아예 시험장에 눌러앉아 답안을 대신 써주기도 했습니다.

그 다음은 족집게 선생 역할입니다. 미리 시험 문제를 알아내서 답안을 준비해두거나, 시험장에서 실시간으로 답안을 작성해서 넘겨주는 역할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사진이 없었으니 본인 확인이 어려웠고, 결국 이런 조직적인 부정행위가 가능했던 것입니다.

돈 주고 산 생원, 상가상사

대리시험도 공공연히 행해졌습니다. 1566년 명종 때, 글자도 잘 모르는 심진, 심자, 심전 세 사람이 대리시험으로 생원진사시에 합격한 일이 있었습니다. 성균관 유생들이 이들을 상가상사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돈 주고 산 생원, 진사라는 뜻입니다.

대필이라는 권력형 커닝도 있었습니다. 권력층에 있는 사람이 시험 문제를 미리 알아내서 명문장가에게 답안을 짓게 한 뒤, 그걸 외워서 시험장에 가는 방식입니다. 조선 말기 세도가 자제들이 이 방법으로 적지 않게 합격했다고 합니다.

과거시험장의 아수라장

한양가라는 노래에 과거시험장 풍경이 나옵니다. 현제판 밑에 설포장을 치고, 말뚝 박고 우산 치고, 휘장 두르고 등불 꽂고, 수종군이 늘어서서... 시험장이라기보다는 전쟁터에 가깝습니다.

수종은 응시생을 보좌하는 사람들인데, 이들이 함부로 시험장에 들어가서 부정행위를 도왔습니다. 심지어 비둘기의 귀소본능을 이용한 방법도 있었다고 합니다. 비둘기에게 시험 문제를 적어 날려 보내면 밖에서 답안을 적어 다시 날려보내는 식이었습니다. 여기에도 쥐수염 붓으로 아주 작은 글씨를 썼다고 하니, 정말 온갖 방법이 동원됐던 셈입니다.

숙종 때 터진 대형 스캔들

숙종 때에는 과거 부정행위로 대규모 옥사가 두 차례나 발생했습니다. 이를 과옥이라고 불렀는데, 조정이 발칵 뒤집힐 정도로 심각한 사건이었습니다. 과거의 핵심 가치는 공정성인데, 이것이 무너지면 나라 전체의 신뢰가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상황은 더 심각해졌습니다. 뇌물과 정실, 문벌의 높고 낮음, 당파 소속에 따라 합격과 불합격이 결정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고종 때에는 수십 명이 과거 부정행위로 제주도에 유배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뒤로는 뇌물로 무마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1894년 갑오경장 때 과거제도 자체가 폐지됩니다. 공정하게 인재를 선발하겠다는 본래 취지가 완전히 퇴색해버린 것이 폐지의 한 원인이었습니다.

정리하자면, 조선시대 과거시험 부정행위는 콧구멍에 커닝페이퍼를 숨기는 의영고부터 팀을 꾸려 자리다툼을 벌이는 선접꾼, 대리시험, 비둘기를 이용한 통신까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습니다. 10개의 도장으로 부정행위를 분류하고 곤장 100대에 3년 노역까지 엄벌로 다스렸지만, 출세에 대한 욕망 앞에서는 별 소용이 없었던 모양입니다. 시험이 있는 곳에 부정행위가 있다는 말, 500년 전에도 똑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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