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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이야기

조선시대에도 이혼이 있었을까? 칠거지악과 삼불거의 진실

by 정보정보열매 2025. 1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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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도 이혼이 있었을까? 칠거지악과 삼불거의 진실

 

 

요즘 이혼율이 높다고들 하죠. 그런데 조선시대에는 어땠을까요? 유교 국가였던 조선에서 이혼이라는 게 과연 존재했을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조선시대에도 이혼이 있었습니다. 다만 지금과는 전혀 다른 방식이었죠.


🔹 이혼을 뜻하는 조선시대 용어들

오늘날에는 '이혼'이라는 단어 하나로 통일해서 쓰지만, 조선시대에는 상황에 따라 다양한 용어가 사용되었어요. '이이(離異)'는 합법적인 이혼을 지칭하는 것으로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이혼을 강제하거나 허락할 경우에 주로 사용되었고, '출처(出妻)', '기별(棄別)', '기처(棄妻)' 등은 공식적이든 비공식적이든 처와의 혼인관계가 사실상 파기된 상태를 나타낼 때 주로 사용되었어요.

이 용어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기별'이나 '기처' 또는 '출처'와 같이 아내를 버리거나 내쫓는다는 의미의 용어가 많이 사용되었는데, 이는 남편에 의해 일방적으로 결정되는 이혼이 주류를 이루었던 당시 사회의 실상을 반영한 것 이에요. 즉, 조선시대 이혼은 대부분 남편이 아내를 내보내는 형태였다는 거죠.


🔹 아내를 내쫓는 7가지 이유, 칠거지악

조선시대에 남편이 아내에게 이혼을 요구할 수 있는 법적 사유가 있었어요. 바로 칠거지악(七去之惡), 또는 칠출(七出)이라고 불리는 7가지 죄목이었죠.

'칠거지악'은 불순부모(시부모에게 순종하지 않음), 무자(아들이 없음), 음란, 질투, 악질(심한 병), 다언(말이 많음), 절도(도둑질)를 내용으로 하는 것으로, 부계혈통을 존숭하는 가부장적 질서와 직결되는 것이었어요.

칠거지악의미

불순구고(不順舅姑) 시부모에게 순종하지 않음
무자(無子) 아들을 낳지 못함
음행(淫行) 간통 또는 음란한 행실
질투(嫉妬) 시기와 질투
악질(惡疾) 심한 병에 걸림
다언(多言) 말이 많음
절도(竊盜) 도둑질

코에 걸면 코걸이식의 칠거지악 규정은 말하자면 이혼을 위한 구실이었어요. 얼마든지 부인이 마음에 안 들면 칠거지악으로 트집을 잡아 내쫓을 수 있었죠. 반면 부인에게는 남편을 내쫓을 자유와 권리는 없었어요.


🔹 그래도 내쫓을 수 없는 3가지, 삼불거

칠거지악이 너무 가혹하다 보니, 이를 견제하는 제도도 있었어요. 바로 삼불거(三不去)예요. 칠거지악을 범한 부인이라도 삼불거라는 강력한 예외 조항이 있어서 다음 세 가지 경우에는 이혼을 할 수 없었어요.

첫째, 시부모의 삼년상을 함께 치렀을 때. 둘째, 가난할 때 장가를 든 조강지처인 경우. 셋째, 아내가 돌아갈 친정이 없는 경우예요.

특히 두 번째 사유인 '시부모의 삼년상을 함께 치렀을 때'는 매우 중요시했는데, 이 사유가 있는데 칠거지악으로 내친다고 할 경우 간통이나 절도를 저지르지 않는 이상 시부모와 남편이 오히려 벌을 받았어요.

실제로 세종 때 문신 이미(李湄)라는 자는 아내 최씨가 아들을 낳지 못하자 칠거지악을 이유로 최씨를 쫓아내고 새로 강씨를 아내로 삼았어요. 그러나 조정에서는 시부모 3년 상을 치렀으므로 삼불거에 따라 이혼의 효력이 없다는 판결을 내렸죠.


🔹 양반과 서민, 이혼도 신분에 따라 달랐다

흥미로운 건 양반과 서민의 이혼 방식이 완전히 달랐다는 점이에요.

양반들은 아내와 이혼하려면 먼저 왕의 허락을 받아내야 했기 때문에 이혼이 쉽지 않았어요. 칠거지악의 사유가 있다 하더라도 이혼의 증가를 염려하여 되도록이면 이혼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인 분위기였죠.

반면 서민들은 자율적인 합의 이혼이 가능했어요. 서민층에서도 이혼 사유는 대개 칠거지악이었는데, 절차상 '사정파의(事情罷議)'라는 부부 간의 합의이혼을 거쳐 헤어졌어요.

그리고 여기서 중요한 문서가 등장해요. 남편이 부인에게 이혼 증서로서 '할급휴서(割給休書)'라는 것을 주기도 했는데, 말하자면 재혼허가증이었어요. 이 문서가 있어야 여성이 다시 시집갈 수 있었던 거죠.


🔹 이혼하면 처벌받는 남편들

조선 조정은 이혼을 최대한 억제하려 했어요. 실제로 이혼한 남편이 처벌받은 사례들이 기록에 남아 있죠.

태종 때 장진이라는 사람은 부인 김씨가 악질에 걸렸다고 하여 다른 여자에게 새장가를 들었다가 처벌받았어요. 세종은 아들도 못 낳는다며 처를 내쫓은 대신 이맹균을 파직시켜 귀양 보내기도 했죠. 더구나 태종 때 김봉종은 5촌 시숙과 간통한 부인을 내쫓았는데 도리어 장 80대를 맞았어요.

간통한 아내를 내쫓았는데 오히려 남편이 벌을 받다니, 지금 시각으로 보면 의아하죠? 이는 조선에서 이혼을 억제한 배경이 치국(治國)의 근간이 되는 가정을 보호하기 위해서였기 때문이에요. 유교에서 남녀 간의 결합을 모든 인간 관계의 뿌리로 여겨 국가의 토대를 이루는 최소 단위인 가정을 보호한 것이죠.


🔹 과부의 재혼은 왜 금지되었을까?

조선시대 여성에게 가장 가혹했던 건 재혼 금지였어요. 1477년(성종 8) 성종은 재가(再嫁)한 여성의 자손을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게 하도록 명했어요. 여러 대신과 대간들이 의탁할 곳이 없는 과부의 재가까지 규제하는 것은 지나치다며 반대했지만, 성종은 '굶주려 죽는 것은 작은 일이고, 절개를 잃는 것은 큰 일'이라며 이 명을 철회하지 않았죠.

이 법 때문에 양반 과부들은 재혼하면 자녀의 출세길이 막혀버렸어요. 그래서 양반 부녀자들은 재혼이 힘들고, 더구나 결혼은 가문 간의 약속이기 때문에 애정에 문제가 있어도 결혼생활을 유지해야 했어요.


🔹 보쌈, 과부 재혼의 비공식적 탈출구

재혼이 금지되자 이를 우회하는 풍습이 생겨났어요. 바로 보쌈이에요.

과부보쌈은 유교적 영향으로 불경이부라는 유교적 질서가 고착되면서 여성의 경우 비록 남편을 사별하였다고 해도 재혼하지 말고 수절할 것을 강요당한 결과 파생된 풍습이에요.

과부보쌈에는 과부 본인이나 과부의 부모들과 내약 끝에 보쌈해가는 방식이 있는가 하면 합의 없이 보쌈하여 약탈해가는 방식도 있었어요. 전자의 경우는 은밀히 과부와 정을 통해오다가 혼인을 하기 위하여 보쌈의 형식을 빌려 주변의 이목을 속이면서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었죠.

보쌈이라 함은 당사자 간 또는 행위자와 여자의 부모 간에 상호동의가 명시적 또는 묵시적으로 이루어진 상태에서 행하는 짜고 치는 고스톱이었던 거예요. 그리고 지역 사법권의 주체인 사또 역시 "그럴 수도 있다"라며 눈 감아주는 편이었어요.


🔹 400년 만에 폐지된 재가 금지법

이 불합리한 법은 언제 폐지되었을까요?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때 과부 재가는 귀천을 논하지 말고 자신의 의사대로 하도록 함으로써 조선 성종대 이후 4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여성의 재가를 죄악시했던 법이 비로소 폐지되었어요.


🔹 마무리하며

조선시대 이혼 제도를 보면, 당시 사회가 얼마나 남성 중심이었는지 알 수 있어요. 남편은 칠거지악을 이유로 아내를 내보낼 수 있었지만, 아내는 아무리 남편이 잘못해도 이혼을 요구할 권리가 없었죠. 그나마 삼불거라는 예외 조항이 일부 여성들을 보호했고, 조정에서도 함부로 이혼하는 남편들을 처벌하며 가정을 지키려 했어요.

지금은 당연하게 여기는 이혼의 자유와 재혼의 권리가 불과 130년 전까지만 해도 없었다는 사실, 새삼 놀랍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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