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혹시 조선시대 과거시험이 얼마나 치열했는지 아시나요? 1800년 3월, 세자 책봉을 기념하는 특별시험에 무려 21만 5,417명이 응시했다고 해요. 그런데 최종 합격자는 고작 33명. 이건 경쟁률이 약 6,500대 1이라는 소리예요. 현대의 어떤 시험과 비교해도 말도 안 되는 경쟁률이죠.
이렇게 극심한 경쟁 속에서 조선왕조는 어떻게 공정성을 지키려 했을까요? 그리고 그 노력은 성공했을까요? 오늘은 조선시대 과거시험을 둘러싼 부정행위와의 치열한 싸움을 들여다보려고 해요.
과거시험, 왜 목숨을 걸었을까?
조선시대 양반가의 남성이라면 누구나 과거 합격을 꿈꿨어요. 하지만 그 꿈을 이루기란 하늘의 별따기였죠. 정기 시험인 식년시는 3년에 한 번만 열렸고, 합격자는 겨우 33명. 한 번 떨어지면 최소 3년을 기다려야 했으니 응시자들의 절박함이 어땠을지 짐작이 가시나요?
실제로 문과 합격자의 평균 연령이 36.4세였다고 해요. 당시로서는 적지 않은 나이였죠. 어떤 사람은 70년 동안 과거를 준비하기도 했고요. 연암 박지원은 과거에 합격한 친구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어요. "만에 하나가 되겠다고 시험장에 들어갔다가 밟히고 넘어져 죽은 사람이 부지기수다. 열에 아홉은 저승 문턱을 다녀온다."
이렇게 목숨을 건 시험이니, 부정행위의 유혹도 그만큼 컸겠죠.
상상을 초월하는 부정행위의 세계
조선시대 과거시험의 부정행위는 현대인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다양하고 치밀했어요. 숙종 시기에는 이런 부정행위를 통틀어 '과거 팔폐(科擧八弊)'라고 부를 정도였죠.
가장 기본적인 것은 '고반(顧盼)', 그러니까 고개를 돌려 옆 사람 답안을 훔쳐보는 거예요. 요즘으로 치면 커닝이죠. '낙지(落地)'는 답안지를 일부러 땅에 떨어뜨려 다른 사람이 보게 하는 수법이었고요.
더 대담한 방법도 있었어요. '수종협책(隨從挾冊)'은 커닝페이퍼를 몰래 가지고 들어가는 건데, 작은 책을 만들어 옷 속에 숨기거나 심지어 코 속에 넣고 들어간 사람도 있었대요. 상상이 가시나요?
'대리시험'도 횡행했어요. 실력 있는 사람을 돈으로 매수해서 자신 대신 시험을 보게 하는 거죠. 시험관과 짜고 문제를 미리 알아내거나, 답안지에 암표를 남겨 누구 것인지 알게 하는 수법도 있었고요.
가장 황당한 건 1705년에 발각된 '노끈 부정행위'예요. 누군가 긴 노끈을 이은 대나무 통을 땅에 묻고 비늘처럼 죽 이어 구멍을 통하게 한 뒤, 다시 기와를 덮어 은폐했대요. 시험장 밖에서 답을 전달하려던 거죠. 결국 범인은 잡히지 않았지만, 그 치밀함에 당시 사람들도 혀를 내둘렀다고 해요.
국가의 반격, 공정성을 지키기 위한 노력
이런 부정행위에 조선왕조가 가만히 있었을 리 없죠. 세종 29년(1447년)에는 부정행위 처벌 규정을 법으로 만들었어요.
처벌은 매우 가혹했어요. 부정행위가 적발되면 곤장 100대에 도형 3년을 선고받았어요. 시험관이 문제를 누설하거나 답안지를 엿본 경우에는 영구히 관리로 임용될 수 없었죠. 이미 합격자 발표가 끝났어도 추후 부정이 적발되면 '삭과(削科)'라고 해서 급제를 취소했고요.
부정행위가 너무 심각하면 아예 시험 전체를 무효화하는 '파방(罷榜)' 조치도 단행했어요. 전체 시험을 무르는 거죠. 상상해보세요. 몇 년을 준비해서 합격했는데 다른 사람의 부정행위 때문에 합격이 취소된다면? 그만큼 공정성을 중요하게 여겼다는 증거예요.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한 세심한 장치들도 많았어요. 초장 시험에서 경전을 암송할 때는 처음엔 시관과 등을 돌리고 외우게 했다가, 나중에는 아예 장막을 쳐서 시관의 얼굴을 가렸어요.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부정행위를 하는 걸 막기 위해서죠.
영조는 수권관의 허락이 떨어질 때까지 답안지를 내지 못하게 했고, 정조는 시험문제가 발표된 뒤 3시간 이후에야 답안지를 제출하게 했어요. 너무 빨리 내면 미리 준비해온 답을 적은 게 아닌가 의심했던 거죠.
그럼에도 사라지지 않은 부정의 그림자
이렇게 엄격한 처벌과 방지 장치가 있었는데도, 부정행위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어요. 특히 권력층과 결탁한 부정행위는 더 큰 문제였죠.
1610년 광해군 때는 정권의 실세인 이이첨의 친인척들이 대부분 합격해서, 당시 사람들이 합격자 명단을 '아들, 사위, 동생, 조카, 사돈의 방목'이라고 비꼬았어요. 숙종 때는 과거 부정행위로 대규모 옥사인 '과옥(科獄)'이 두 차례나 발생했고요.
조선 말기로 갈수록 상황은 더 악화됐어요. 1894년 고종 때는 초시를 돈으로 매매했는데, 처음엔 200~300냥이던 가격이 나중엔 1,000냥을 넘어갔대요. 뇌물과 정실, 당파 싸움이 뒤엉켜 과거제도는 극도로 문란해졌죠.
윤치호, 이승만, 김구 같은 인물들도 이런 부정행위 때문에 과거에 낙방했어요. 중견 관료의 아들이었던 윤치호는 음서 제도로 관직에 진출했지만, 가난했던 이승만과 김구는 좌절해서 각각 기독교와 동학에 투신하게 됐죠.
역사가 우리에게 남긴 질문
936년간 이어진 과거제도는 1894년 갑오개혁으로 폐지됐어요. 하지만 이 이야기가 그저 옛날 이야기일까요?
오늘날에도 입시 부정, 채용 비리, 시험 문제 유출 사건이 끊이지 않잖아요. 조선시대나 지금이나, 치열한 경쟁 속에서 공정성을 지키는 건 여전히 어려운 과제인 것 같아요.
조선왕조는 500년 동안 부정행위와 싸웠지만 끝내 이기지 못했어요.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노력했다는 점은 의미가 있죠. 장막을 치고, 처벌을 강화하고, 제도를 개선하면서 말이에요.
공정한 사회를 만드는 건 하루아침에 이뤄지는 게 아니에요. 조선왕조처럼 끊임없이 노력하고, 실패해도 다시 일어서는 그 과정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닐까요? 역사는 그렇게 우리에게 묻고 있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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