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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이야기

조선시대에도 컨닝이 있었을까? 과거시험장의 놀라운 비밀

by 정보정보열매 2025. 1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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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도 컨닝이 있었을까? 과거시험장의 놀라운 비밀

 

수능이나 공무원 시험 보실 때 부정행위 적발 이야기 들어보셨죠?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지?"싶을 만큼 기발한 컨닝 수법들이 뉴스에 나오곤 해요. 그런데 이런 일이 비단 현대에만 있었던 건 아니에요. 조선시대 과거시험장에서도 상상을 초월하는 부정행위가 횡행했거든요. 심지어 코 속에 답안지를 숨기는 사람도 있었다는데, 과연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요?

과거시험, 정말 그렇게 중요했을까요?

조선시대 양반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것이 과거 급제였어요. 과거시험은 고려 광종 때 처음 도입되어 958년부터 1894년 갑오개혁까지 무려 936년이나 이어진 제도였죠. 조선에서는 문과, 무과, 잡과로 나뉘었는데, 특히 문과 합격은 출세의 지름길이었어요.

문과는 3년에 한 번씩 치러지는 정기 시험인 식년시와, 국가 경사가 있을 때 치르는 비정기 시험으로 나뉘었어요. 하지만 경쟁률이 어마어마했죠. 1800년 3월에 있었던 특별시험에는 무려 21만 5,417명이 응시했다는 기록이 있어요. 그런데 정기 문과에서 뽑는 인원은 단 33명뿐이었답니다. 최고 5만 대 1의 경쟁률이었던 거죠.

과거 합격자의 평균 나이는 30대였지만, 70~80대에 급제하는 경우도 있었어요. 실제로 1890년에는 85세의 정순교가 문과에 합격했고, 최연소 합격자는 13세의 이건창이었어요. 이 정도면 정순교 할아버지는 70년 넘게 과거 공부를 한 셈이네요.

코 속에 숨긴 답안지? 기발한 컨닝 수법들

이렇게 경쟁이 치열하다 보니 온갖 부정행위가 등장했어요. 조선시대에는 이런 부정행위를 과거 팔폐라고 불렀는데, 대표적인 수법들을 살펴볼게요.

가장 기본적인 건 '고반'이에요. 고개를 돌려 옆사람 답안지를 훔쳐보는 거죠. 오늘날과 똑같죠? '설화'는 옆사람과 소곤소곤 의논하며 답을 작성하는 거였어요. 시험장에서 중얼거리면 감독관이 '음아'라는 도장을 답안지에 찍었답니다.

더 교묘한 방법도 있었어요. '의영고'는 콧구멍 속에 작은 커닝 페이퍼를 숨기는 거였고, '협서'는 붓대 끝에 작은 종이를 감춰두는 거였어요.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는지 신기하죠?

'낙지'라는 수법도 있었는데, 이건 답안지를 일부러 땅에 떨어뜨려서 다른 사람이 보게 하는 거예요. 응시자끼리 짜고 하기도 했고, 매수된 시험관이 의도적으로 하기도 했답니다.

가장 대범한 건 대리시험이었어요. 1566년에는 글자도 제대로 모르는 심진, 심자, 심전 세 형제가 대리시험으로 생원·진사시에 합격했어요. 이 사실이 알려지자 성균관에서는 그들을 '상가상사', 즉 돈 주고 산 생원·진사라고 비아냥거렸죠.

부정행위 감시 시스템도 정교했어요

국가에서도 이런 부정행위를 그냥 놔두지 않았어요. 과거시험장에는 '금란관'이라는 특별 감독관이 있었는데, 이들은 열 개의 도장을 준비해뒀다가 부정행위 유형별로 다른 도장을 답안지에 찍었어요.

예를 들어 심하게 눈을 굴리거나 고개를 움직이면 '고반' 도장, 감독관 몰래 답안지를 바꾸면 '환관' 도장, 초고지를 통해 부정을 저지르려다 들키면 '낙지' 도장이 찍혔죠. 채점할 때 이 도장들을 참고해서 불이익을 주는 시스템이었어요.

시험장에는 응시생과 종사자 외에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었어요. 양반 자제들이 평소에 종을 데리고 다녔지만, 시험장만큼은 예외였죠. 만약 잡인이 시험장에 들어간 게 발각되면 즉시 체포해서 수군으로 보냈어요.

답안지 작성 시에는 6자(약 1.8m) 간격으로 앉혔고, 곳곳에 감독관을 배치했어요. 사서오경을 암송하는 시험에서는 아예 장막을 쳐서 시험관 얼굴을 가리고 시험을 봤답니다. 오늘날 실기시험에서 블라인드 평가하는 것과 비슷하죠.

처벌도 무시무시했어요

법으로 정해진 처벌은 정말 엄격했어요. 다른 사람 답안지를 베끼다 걸리면 곤장 100대에 3년간 막노동형이었어요. 책이나 커닝 페이퍼를 갖고 들어가다 걸리면 3~6년간 과거 응시 자격이 박탈됐고요.

명나라와 청나라에서는 부정행위가 적발되면 사형에 처하기도 했다고 해요. 조선에서도 고종 대에 수십 명을 과거 부정행위로 제주도에 유배 보냈다는 기록이 있어요.

영조는 감독관이 허락할 때까지 답안지를 못 내게 했고, 정조는 문제가 발표된 후 3시간이 지나야 제출할 수 있게 했어요. 초장 답안을 빨리 내는 '조정'이라는 부정행위를 막기 위해서였죠.

더 문제는 권력형 부정이었어요

사실 개인이 저지르는 부정행위보다 더 심각한 건 조직적인 부정이었어요. '혁제'라고 해서 시험관과 응시자가 결탁하는 경우가 많았거든요. 시험관이 미리 문제를 알려주거나, 답안지에 암표를 남겨서 누구 것인지 알게 해주는 식이었죠.

1610년 광해군 때 있었던 별시 문과는 아예 '자서제질차돈방'이라는 별명이 붙었어요. 아들, 사위, 동생, 조카, 사돈의 방목이라는 뜻이에요. 당시 실권자였던 이이첨의 친인척들이 대부분 합격했거든요.

'절과'라는 수법도 있었는데, 이건 다른 합격자의 답안지에 자기 이름을 바꿔 붙이는 거예요. 가장 악질적인 방법이라고 할 수 있죠. 뇌물과 정실, 문벌과 당파에 따라 합격과 낙제가 결정되면서 과거제도는 점점 문란해졌어요.

실학자 이익은 "과거장에서 직접 글을 짓는 사람은 응시자의 10분의 1밖에 안 된다"고 한탄했어요. 과거시험장에는 '접'이라는 부정행위 전문 집단까지 있었다고 하니, 얼마나 심각했는지 알 수 있죠.

역사는 반복된다?

연암 박지원은 과거에 급제한 지인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어요. "'만에 하나'가 되겠다고 시험장에 들어갔다가 서로 밟고 넘어져 죽고 다친 사람이 부지기수니, '열에 아홉'은 저승 문턱에 갔다 온 위험한 시험장에 더 이상 들어가지 않아도 된 걸 축하한다."

극심한 경쟁, 평생을 걸어야 하는 시험, 그리고 이를 악용한 온갖 부정행위. 500년 전 이야기지만 어쩐지 낯설지 않죠? 오늘날에도 시험 문제 유출, 부정입학, 채용 비리 같은 사건이 끊이지 않고 있으니까요.

결국 과거제도는 1894년 갑오개혁 때 폐지되었어요. 부정행위가 만연하고 권위가 땅에 떨어졌기 때문이죠. 하지만 공정한 시험을 통해 인재를 선발한다는 이상은 사라지지 않았어요. 다만 그 이상을 지키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감시와 엄정한 처벌, 그리고 무엇보다 응시자들의 양심이 필요하다는 교훈을 남겼답니다.

코 속에 커닝 페이퍼를 숨기던 시대나, 초소형 무선 이어폰을 쓰는 시대나, 결국 사람 사는 세상은 비슷한가 봐요. 중요한 건 부정한 방법이 아니라 정정당당한 실력으로 승부하는 거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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