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코로나19 이후 '방역'이라는 단어가 일상이 되었죠? 그런데 의학 기술도, 백신도 없었던 조선시대에는 전염병을 어떻게 막았을까요? 놀랍게도 조선은 꽤 체계적인 방역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어요. 왕조차 피해 갈 수 없었던 무서운 역병, 그리고 이를 극복하려 했던 선조들의 지혜를 함께 살펴볼게요.
왕도 무릎 꿇게 만든 '마마'의 공포
천연두는 왕족, 천민을 가리지 않고 죽이는 데다 전염성도 높은 매우 무서운 병이었어요. 그래서 사람들은 이 병을 왕에게나 붙일 수 있는 존칭인 '마마'로 불렀죠. 마마라는 칭호는 0품 대군이나 빈도 받을 수 없었고, 함부로 썼다간 역모로 몰리기 딱 좋은 왕통직계 전용이었는데도 천연두를 마마로 부르는 게 용인되었을 정도니 그 위상을 알 수 있어요.
조선 후기 천연두와 악연을 맺은 대표적인 왕이 숙종이에요. 1680년 숙종의 왕비인 인경왕후가 두창에 걸렸고, 결국 사망했어요. 1683년에는 숙종 자신도 두창에 걸렸지만 다행히 회복되었어요. 숙종은 두 명의 왕비와 두 아들(경종, 영조)까지 모두 천연두에 걸리는 아픔을 당했죠.
감염자들 중 20~60%가 사망했으며, 살아남더라도 약 80%는 곰보가 되었어요. 조선시대 관리들의 초상화를 보면 얼굴에 곰보 자국이 선명한 인물들이 많이 보이는데, 이게 바로 천연두를 앓은 흔적이에요.
"범이 살점을 뜯어낸다" – 호열자(콜레라)의 습격
1821년, 조선에 처음 보는 괴질이 나타났어요. "평양성 안팎에서 갑자기 괴질이 돌아 사람들이 설사구토를 하고 근육이 비틀리다가 순식간에 죽어버렸습니다. 열흘 만에 1000여 명이 죽었으나 치료할 약과 방책이 없습니다."
병자는 몸의 근육이 경련으로 부르르 떨고 쉴새 없이 설사를 했어요. 그래서 이 병은 '범이 살점을 뜯어 벤다는 뜻'의 호열자로 불리게 되었죠.
『순조실록』에 따르면 서울을 합하여 15만 명의 사망자를 냈으며,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전국적으로 수십만 명이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어요. 발병하면 사망률이 50%가 넘었고, 남녀노소 부귀빈천을 가리지 않고 희생의 제물로 삼았어요.
조선의 방역 시스템 – 생각보다 체계적이었다
조선은 전염병에 그냥 당하고만 있지 않았어요. 나름의 방역 체계를 갖추고 있었죠.
1. 격리 시설 '활인서'
역병이 유행하면 환자나 시체를 도성 밖으로 추방하는 조치를 일단 취했어요. 성 밖에서 역병 환자를 전담하던 곳은 활인원(후에 활인서)이었어요. 활인서의 주요 기능은 전염병 환자의 치료였지만, 실상은 전염병이 한양으로 확대되지 않도록 격리의 역할을 담당한 것이었어요.
세종 때 서울에서는 전염병 환자 가운데 80~90%가 치료를 통해 살아났지만, 외방에서는 사망한 사람이 4,000명이나 되었는데, 그 결정적인 차이가 활인서에 있다고 말해질 정도였어요.
2. 의서 편찬과 배포
세종은 전염병에 대응하기 위해 1433년 『향약집성방』을 만들게 하고, 1455년에는 동양의 의학 지식을 집대성한 『의방유취』를 완성했어요. 온역의 대처를 위해 『신찬벽온방』(1613)과 같이 왕의 명으로 새로운 의서를 편찬하거나, 효과적인 의서를 전국에 배포했어요.
3. 정조의 선제적 방역 – K-방역의 원조?
1786년 4월 한양에 홍역이 유행할 조짐이 보였을 때 정조의 대응이 눈에 띄어요. 정조는 전의감·혜민서에 홍역 대응책을 상세히 서술한 운영절목, 즉 운영세칙을 만들라고 지시했어요.
이에 따라 두 의료기관은 10개 조항으로 된 '진역구료절목'을 마련했어요. 약은 반드시 가난한 사람에게만 지급하도록 했고, 왕진과 약의 지급은 반드시 문서에 기록하도록 했어요.
더 나아가 이런 정부 정책을 한문과 한글로 번역해 한성부 곳곳에 붙이도록 했으며, 백성 중 단 한 사람이라도 이를 인지하지 못한 사례가 적발되면 담당 관리를 논죄하는 조항도 두었어요. 오늘날 재난문자 같은 역할이죠!
미신일까, 경험의 지혜일까?
조선 사람들은 천연두의 원인을 '마마신'이라는 역병신의 소행으로 여겼어요. 그래서 굿을 하거나 제사를 지내고, 부적을 붙이는 등 미신적인 행위를 했죠.
'마마신은 질투가 많아 자기 말고 다른 귀신이 들어오는 것을 싫어하기에, 마마 환자가 있는 집안에서는 제사도 지내면 안 된다'는 미신이 있었어요.
얼핏 미신처럼 보이지만, 이건 방역으로서는 적절한 대책이었어요. 한국의 전통적인 제사는 집안 공동체가 모두 모이는 큰 행사인 만큼, 전염병 환자가 있는 집에서 제사한다고 사람들이 모였다간 모두 감염되어 가문이 풍비박산이 날 수 있기 때문이에요.
콜레라가 유행할 때는 집에 고양이 그림을 붙여 놓는 풍습도 있었어요. 콜레라와 경련이 쥐가 물어서 그렇게 된다고 믿었기에, 쥐가 무서워할 고양이 그림을 붙인 거였죠.
종두법의 도입 – 근대 의학의 시작
정약용이 쓴 '종두설'에 의하면 1799년에 박제가가 중국에서 서책을 입수하여 정약용이 이를 『마과회통』에 실었으며, 1800년 박제가는 북경에만 있다는 '두종'을 직접 만들어내는 데에 성공했어요.
지석영은 1880년 김홍집이 수신사로 일본에 갈 때 수행원 자격으로 동행해서 우두술과 관련된 모든 지식과 기술을 습득해 왔어요. 귀국 후에는 서울에 종두장을 차렸고, 본격적으로 우두접종사업을 시작했죠. 이것이 근대적 예방접종의 시작이었어요.
역사가 주는 교훈
조선왕조실록에는 전염병에 대해 총 1,455건의 기록이 있어요. 조선왕조의 역사가 518년이니 평균적으로 1년에 2~3건의 전염병 기록이 있는 셈이에요.
전염병은 개인의 문제가 아닌 모두가 풀어내야 할 공동의 문제로, 정부와 백성 모두가 마음과 힘을 모아 대처했던 것이에요.
"전염병이 돌면 농사를 서로 돌아가면서 지어 준다든지, 약재를 공동으로 구입해 치료해 준다든지 하는 것을 지역민들이 하나의 지역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덕목으로 제도를 만들어놓은 거죠. 이런 공동체의 역할이 덧붙여지지 않으면 방역은 국가 힘만으로는 되지 않거든요."
의학 기술이 발달한 지금도 전염병은 여전히 우리 곁에 있어요. 하지만 선조들이 그랬듯이, 함께 힘을 모으면 이겨낼 수 있다는 게 역사가 주는 교훈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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