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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이야기

조선시대에도 이혼이 있었을까? 칠거지악과 삼불거의 비밀

by 정보정보열매 2025. 1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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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도 이혼이 있었을까? 칠거지악과 삼불거의 비밀

 

요즘 이혼율이 높아졌다고들 하죠? 그런데 혹시 유교 국가였던 조선시대에도 이혼이 있었을까요? "한번 결혼하면 죽을 때까지"라는 고정관념과 달리, 조선에도 엄연히 이혼 제도가 존재했어요. 다만 오늘날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이었답니다.

조선시대 이혼, 생각보다 복잡했어요

조선시대 이혼을 이해하려면 먼저 신분 차이를 알아야 해요. 조선시대 인구의 10~20%를 차지하던 양반의 경우에는 이혼의 유형이 세 가지가 있었어요. 첫째 합의이혼, 둘째 국가에 의한 강제이혼, 셋째 재판상 이혼이에요. 특히 양반들은 이혼하려면 왕의 허락까지 받아야 했어요.

재미있는 건 조선의 법률인 경국대전 등에 '이혼'을 명확하게 규정하는 조문이 없었다 는 점이에요. 마음만 먹으면 처첩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을 것 같은 조선시대에 정작 이혼법이 없었다니, 신기하죠?

칠거지악 - 아내를 내쫓는 7가지 이유

조선시대 이혼의 핵심은 바로 '칠거지악(七去之惡)'이에요. 칠출(七出) 또는 칠거라고도 하며, 중국의 고대로부터 발전한 유교적인 예교로서, 고려 말 이후 조선시대 이혼제도의 근간을 이루게 되었어요. 

칠거지악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시어머니에게 순종하지 않는 경우, 아들이 없는 경우, 간통하는 경우, 질투하는 경우, 심한 병이 있는 경우, 말을 함부로 하는 경우, 도둑질하는 경우 가 해당됐어요.

하지만 코에 걸면 코걸이식의 칠거지악 규정은 말하자면 이혼을 위한 구실이었어요. 얼마든지 부인이 마음에 안 들면 칠거지악으로 트집을 잡아 내쫓을 수 있었지만, 반면 부인에게는 남편을 내쫓을 자유와 권리는 없었어요. 

삼불거 - 그래도 내쫓지 못하는 3가지 경우

칠거지악이 악법 중의 악법이었지만, 다행히 구제책도 있었어요. 삼불거란 시부모를 위해 삼년상을 치른 경우, 혼인 당시 가난하고 천한 지위에 있었으나 후에 부귀를 얻은 경우, 이혼한 뒤에 돌아갈 만한 친정이 없는 경우는 도의상 그런 아내를 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에요. 

실제 사례도 있어요. 조선 세종 때 문신 '이미'라는 자는 아내 '최 씨'가 아들을 낳지 못하자 칠거지악을 이유로 '최 씨'를 쫓아내고 새로 '강 씨'를 아내로 삼았어요. 그러나 조정에서는 시부모 3년 상을 치렀으므로 삼불거에 따라 이혼의 효력이 없다는 판결을 내렸어요. 

서민들의 이혼 - 휴서와 사정파의

양반과 달리 서민들은 훨씬 자유로웠어요. 조선시대 인구의 80~90%를 차지했던 평민, 천민의 경우에는 '사정파의(事情罷議)'라고 하여 말로 합의하면 쉽게 이혼을 할 수 있었어요. 다만 재혼을 할 때 간통이나 중혼의 문제를 방지하기 위하여 옷의 앞섶을 서로 잘라주는 '수세'를 이혼의 증표로 삼았어요. 

한문을 배우지 못한 자나 하천인들은 문자로 된 이혼장을 쓸 수가 없었기 때문에 남자가 그의 옷고름이나 겉저고리의 앞섶을 삼각형으로 떼어서 여자에게 주어 이혼의 증거로 하였으며, 이러한 행위를 일컬어 '수세 베어 준다'고 하였어요.  이 삼각형 천 조각이 바로 재혼할 수 있는 허가증 역할을 한 거예요.

왕실도 예외는 아니었다 - 문종의 두 번 이혼

심지어 왕실에서도 이혼이 있었어요. 세종의 아들 문종은 첫 번째 세자빈 휘빈 김씨가 세자빈으로 적당치 못하다고 생각하여 궁에서 내쫓기로 하였어요. 이리하여 문종의 첫 결혼생활은 채 2년을 채우지 못하고 끝나고 말았어요. 

두 번째 세자빈 봉씨도 마찬가지였어요. 1436년 세종은 며느리인 세자빈 봉씨를 폐출시켰어요. 이유는 봉씨가 궁녀와 사랑을 나누었기 때문이에요. 봉씨는 음주, 폭력, 상상임신 거짓말, 동성애 등 여러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요.

조선 초기에 이혼을 한 대군은 세종의 아들인 임영대군과 영응대군, 그리고 예종의 아들인 제안대군이에요. 그런데 영응대군과 제안대군은 이혼한 전처와 재결합하기 위해 재혼한 후처와 다시 이혼함으로써 각기 두 번의 이혼을 하였어요.

조선시대 이혼이 주는 교훈

결국 조선시대 이혼 제도는 철저히 남성 중심이었어요. 남편은 아내를 때려도 되지만, 아내가 남편을 때리면 이혼이었어요. 조선시대에는 남편의 폭력으로 인한 법적 이혼은 성립하지 않았던 반면, 아내가 남편을 구타하면 장 100대를 맞고, 남편이 이혼하겠다고 하면 이혼당할 수 있었어요.

그러나 동시에 칠거지악으로 부인이 쫓겨난 경우는 거의 찾아볼 수 없어요. 칠거지악이 애초에 발생하지 않도록 여성을 철저히 교육했을 뿐만 아니라 자식을 낳지 못하면 양자 제도 같은 대안을 두어 문제를 해결했기 때문이에요.

조선시대 이혼 제도를 보면,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양성평등한 이혼 제도가 얼마나 소중한지 새삼 깨닫게 됩니다. 법 앞에 남녀가 평등하게 이혼할 권리를 갖게 된 건 1960년 민법 제정 이후의 일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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