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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이야기

조선시대 과거시험에서 부정행위 들키면 어떻게 될까? 21만명이 몰린 시험장의 진실

by 정보정보열매 2025. 1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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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과거시험에서 부정행위 들키면 어떻게 될까? 21만명이 몰린 시험장의 진실

 

여러분, 요즘 입시 부정이나 채용비리 뉴스 많이 보시죠? 그런데 이런 일이 비단 현대만의 문제일까요? 오늘은 조선시대 과거시험의 놀라운 이야기를 들려드릴게요. 부정행위의 창의성(?)은 정말 상상을 초월했답니다!

21만명이 몰린 시험장, 상상이 되시나요?

1800년 3월 창경궁 춘당대에서 왕세자 책봉을 기념하는 특별시험이 열렸는데, 이틀간 응시한 수험생이 자그만치 21만5417명이었어요. 21만명이요! 지금으로 치면 수능 응시생이 한곳에 모인 거나 마찬가지예요.

그런데 정기 과거시험은 더 치열했어요. 3년마다 실시되는 정기 과거에서는 4차례의 시험을 거쳐 최종적으로 단 33명만 선발됐거든요. 경쟁률이 수천 대 1은 기본이었죠.

정기과거의 경우 한번 떨어지면 최소 3년을 기다려야 했으니 합격에 목숨을 걸 수밖에 없었어요. 연암 박지원은 과거에 급제한 친구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고 해요. "만에 하나가 되겠다고 시험장에 들어갔다가 서로를 밟고 넘어져 죽고 부상한 자가 부지기수로 열에 아홉은 저승 문턱에 갔다 오게 되니"라고요.

땅 속으로 답안지가 왔다 갔다?

가장 유명한 부정행위 사건을 소개할게요. 1705년 2월 18일, 성균관 앞마을의 한 아낙이 나물을 캐다가 노끈이 땅에 묻힌 것을 발견하고 잡아 당겼는데 대나무 통이 묻혀 있었어요. 대나무 통은 땅속을 통해 과거시험이 열리는 성균관 반수당까지 연결돼 있었죠.

어떻게 사용했냐고요? 부정행위자는 대나무 통 속에 노끈을 넣어 과장에서 시험문제를 노끈에 매달아 보내고, 밖에 있는 사람이 이 답안지를 작성해 노끈에 묶어 보낸 거예요. 지금 봐도 놀라운 기술력 아닌가요?

그런데 더 놀라운 건, 당국이 조사를 했으나 범인은 잡을 수 없었다는 거예요. 결국 미제 사건으로 남았답니다.

온갖 부정행위의 향연

조선시대 과거시험의 부정행위는 정말 다양했어요.

응시자가 이름을 속이거나, 다른 사람이 지은 글을 빌리거나, 다른 사람을 대신해 시험을 응시하거나, 요약집을 작게 만들어 베끼는 행위, 활을 대신 쏴주는 행위 등 가지각색이었어요.

심지어 1566년에는 글자도 잘 모르는 심진, 심자, 심전 세 사람이 대리시험으로 생원·진사시에 합격했어요. 그러자 성균관에서 그들을 돈 주고 산 생원·진사라는 뜻의 '상가상사'라고 비아냥거렸다고 해요.

예상 답안지를 미리 만들어 가는 것, 시험지를 바꾸는 것, 채점자와 짜고 후한 점수를 주는 것, 합격자의 이름을 바꿔치기 하는 것까지, 정말 없는 게 없었죠.

더 가관인 건, 세도가의 자제는 천자문을 몰라도 합격했고, 임금이 직접 주관한 과장에서도 술판, 싸움판이 벌어지기 일쑤였다고 해요.

처벌은 엄격했지만...

그럼 적발되면 어떻게 됐을까요? 세종 29년 3월 부정행위에 대한 처벌 규정이 마련됐는데, 곤장 100대와 도형 3년을 집행하고 시관 가운데 응시자에게 문제를 누설하거나 봉미를 엿본 사람들도 관리에 항구히 임용하지 못하게 했어요.

합격자 발표가 이미 끝나서 급제자 명단에 들어갔더라도 추후 부정이 적발되면 삭과라 해서 해당자의 과거 급제를 취소했어요. 부정행위가 심각하여 시험 전체의 공정성에 문제가 있으면 파방이라 하여 시험 전체를 무효화하는 조치가 단행되기도 했죠.

하지만 조선 후기에 이르러 과거의 폐단이 날로 갈수록 심해져 까막눈이어도 뒤를 봐줄 사람이 있다면 장원을 차지하는 일이 심해졌으며, 세도정치기가 되자 과거의 폐해가 더 심해졌어요.

과거제도의 종말

결국 1894년 갑오개혁으로 과거제가 폐지됐어요. 958년 고려 광종 때 시작되어 936년 동안 존속해온 과거제가 역사 속으로 사라진 거죠.

정약용은 이렇게 한탄했다고 해요. "천거 없이 과거시험으로만 인재를 뽑아 1000가지 병통과 100가지 폐단이 일어난다"고요.

마무리하며

조선시대 과거시험 이야기, 어떠셨나요? 3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시험 부정행위는 큰 문제였네요. 땅속에 대나무 통을 묻고, 대리시험을 보고, 답안지를 바꿔치기하는 등 그 창의성(?)만큼은 정말 대단하죠?

하지만 결국 부정은 부정일 뿐이에요. 조선시대에도 엄격한 처벌이 있었지만 막지 못했고, 그 폐단이 쌓이고 쌓여 결국 제도 자체가 무너졌잖아요.

요즘도 입시 부정, 채용 비리가 문제가 되고 있는데요. 역사는 반복된다고 하지만, 이런 건 반복되지 말아야 하는 게 아닐까요? 조선시대 과거시험의 교훈을 되새겨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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