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즘 수능이나 공무원 시험에서 부정행위가 적발되면 큰 뉴스가 되잖아요. 그런데 조선시대 과거시험에도 커닝이 있었다는 사실, 알고 계셨나요? 그것도 현대인이 상상하기 힘든 기발한 방법들로요. 오늘은 조선시대 선비들의 창의적인(?) 부정행위와 이를 막으려 했던 조정의 노력을 소개해 드릴게요.
과거시험, 조선판 SKY캐슬이었다
조선시대 과거시험은 지금의 수능이나 고시보다 더한 경쟁이었어요. 30대가 과거 합격 평균연령인데다 심하면 70세를 넘어 과거에 급제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할 정도로 급제 열풍은 대단했어요.
얼마나 치열했냐면, 1800년 정조 때 열린 특별시험에는 단 이틀 동안 무려 21만 5천 명이 몰렸다고 해요. 당시 왕세자(순조)의 책봉을 기념하는 특별시험이 창경궁 춘당대에서 열렸는데, 이 이틀간의 시험에 응시한 수험생이 자그만치 21만 5,417명이었어요.
경쟁이 이 정도니 부정행위가 없었을 리 없겠죠?
기상천외한 커닝 수법들
조선시대 과거장에서는 정말 다양한 부정행위가 벌어졌어요. 지금 봐도 깜짝 놀랄 만한 방법들이 있었답니다.
콧구멍에 커닝페이퍼 숨기기 (의영고)
의영고(義盈庫)라고 해서 콧구멍 속에 커닝 종이를 숨기는 행위가 있었어요. 작은 종이에 깨알 같은 글씨로 핵심 내용을 적어 콧속에 숨겼다가 몰래 꺼내 보는 방식이었죠. 지금 생각하면 위생적으로 참 걱정되는 방법이네요.
붓대 속에 쪽지 넣기 (협서)
협서(挾書)는 붓대 끝에 작은 종이 커닝페이퍼를 숨기는 방식이었어요. 필기구에 답안을 숨기는 건 예나 지금이나 비슷한 것 같아요.
땅속 터널로 답안지 주고받기
가장 놀라운 건 땅굴을 파서 부정행위를 한 사례예요. 숙종대왕실록에 따르면, 성균관 앞마을의 한 아낙이 나물을 캐다가 노끈이 땅에 묻힌 것을 발견하고 잡아당겼는데 대나무 통이 묻혀 있었어요. 이 대나무 통은 땅속을 통해 과거시험이 열리는 성균관 반수당까지 연결돼 있었죠.
부정행위자는 대나무 통 속에 노끈을 넣어 과장에서 시험문제를 노끈에 매달아 보내고, 밖에 있는 사람이 답안지를 작성해 노끈에 묶어 보냈다고 해요. 수사를 했지만 끝내 범인은 잡지 못했답니다.
6인조 부정행위 조직까지 있었다
개인이 아니라 아예 조직적으로 부정행위를 하는 경우도 흔했어요. '접'이라고 불리는 6인조 팀이 역할을 나눠 부정을 저질렀는데요.
선접과 수종, 노유라는 인물들이 새벽에 궐문이 열리면 좋은 자리 확보를 위해 몸싸움을 벌였어요. 우산대와 말뚝, 막대기를 휘두르며 자리를 잡았죠.
거벽은 실제로 문제를 푸는 사람으로, 문장이 뛰어난 사람이 맡았어요. 머리가 엄청 좋은 노비를 구해다가 시킨 뒤 급제하면 면천과 양자 입적을 상으로 내리기도 했어요.
그리고 '사수'라는 글씨 담당자가 깔끔하게 답안지를 작성하고, 최종적으로 응시자 이름만 적어 제출하는 '거자'가 있었어요. 완전히 분업화된 시스템이었던 거죠.
돈 주고 합격증 사는 세상
더 심한 경우도 있었어요. 아예 대리시험을 보게 하거나 합격증을 사고파는 일이 벌어졌죠.
1566년(명종 21년)에 글자도 잘 모르는 심진, 심자, 심전 세 사람이 대리시험으로 생원·진사시에 합격했어요. 그러자 성균관에서 그들을 돈 주고 산 생원, 진사라는 뜻의 '상가상사(償價上舍)'라고 비아냥거렸다고 해요.
조선 말기에는 세도가의 자제는 천자문을 몰라도 합격했고, 임금이 직접 주관한 과장에서도 술판, 싸움판이 벌어지기 일쑤였어요.
부정행위 적발하면 어떻게 됐을까?
조정에서도 이런 부정행위를 막으려고 다양한 제도를 만들었어요.
과거시험장에서는 금란관이라는 시험관이 부정행위 유형별로 열 개의 도장을 준비했다가 커닝이 발생하면 그 수법에 따라 각기 다른 도장을 시험지에 찍었어요.
예를 들어 남의 것을 훔쳐보려고 심하게 눈을 굴리거나 고개를 움직이면 '고반(顧盼)'이라는 도장을 찍고, 옆사람이 듣게끔 중얼거리면 '음아', 감독관의 눈을 피해 시험지를 바꾸면 '환관'이란 도장이 찍혔어요.
처벌도 만만치 않았어요. 응시생이 다른 사람의 답안지를 베껴서 쓸 경우에는 곤장 100대에 3년간 막노동을 강제당했고, 미리 책을 들고 올 경우에도 과거응시자격이 3년간 박탈됐어요.
합격자 발표가 이미 끝나서 급제자 명단에 들어갔더라도 추후 부정이 적발되면 삭과라 해서 과거 급제를 취소했어요. 부정행위가 심각하면 파방이라 하여 시험 전체를 무효화하는 조치가 단행되기도 했어요.
왜 이렇게까지 했을까?
조선시대 선비들이 목숨 걸고 부정행위까지 하며 과거에 매달린 이유는 뭘까요?
과거는 입신양명을 위한 필수코스였기 때문이에요. 관직에 올라 가문을 일으키기 위해 과거시험 준비에 고군분투했어요.
연암 박지원은 과거에 급제한 지인에게 이렇게 편지를 보냈다고 해요. "'만에 하나'가 되겠다고 시험장에 들어갔다가 서로를 밟고 넘어져 죽고 부상한 자가 부지기수로 '열에 아홉'은 저승 문턱에 갔다 오게 되니, 그대에게 '만에 하나'의 영광을 축하할 마음은 없지만, '열에 아홉'은 저승에 갈 위험한 시험장에 더 이상 들어가지 않아도 된 것만은 축하한다."
시험장에서 죽는 사람까지 있었다니, 정말 목숨을 건 시험이었네요.
역사는 반복된다
예나 지금이나 시험이 있는 곳엔 부정행위가 있었어요. 커닝페이퍼를 콧구멍에 넣든, 스마트폰을 화장실에 숨기든, 공정한 경쟁을 무너뜨리려는 시도는 계속되어 왔죠.
조선 후기로 갈수록 뇌물과 정실, 문벌의 고하, 당파의 소속에 따라 급제와 낙제가 결정되니, 과거제도는 극도로 문란해질 수밖에 없었어요. 결국 1894년 갑오개혁 때 과거제도는 폐지됐어요.
공정한 시험 제도가 무너지면 사회 전체가 흔들린다는 걸, 조선의 역사가 보여주고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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