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월 22일은 동지예요. 일 년 중 밤이 가장 길고 낮이 가장 짧은 날이죠. 어릴 때 할머니가 이날만 되면 꼭 팥죽을 쑤셨던 기억이 나요. 대문에도 뿌리고, 장독대에도 놓아두시면서 "귀신 쫓는 거야"라고 하셨거든요. 그때는 무슨 말인지 잘 몰랐는데, 알고 보니 천 년도 넘은 이야기가 숨어 있더라고요.
공공씨의 망나니 아들 이야기
동지에 팥죽을 먹는 풍습의 유래는 중국 고대 기록인 형초세시기에 전해져요.
옛날 중국에 공공씨라는 사람이 살았어요. 그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평소 말썽만 피우던 망나니였죠. 공공씨는 이 아들 때문에 하루도 마음 편한 날이 없었어요.
그런데 어느 동짓날, 이 아들이 갑자기 병을 얻어 죽고 말았습니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어요. 죽은 아들이 역귀가 되어버린 거예요. 역귀란 전염병을 퍼뜨리고 다니는 무서운 귀신이에요. 사람들은 공포에 떨었죠.
그런데 누군가 이 역귀가 생전에 팥을 무척 두려워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어요. 그래서 동짓날이 되자 붉은 팥으로 죽을 쑤어 집 안팎에 뿌렸더니, 정말로 역귀가 물러났다는 거예요. 이후 사람들은 해마다 동짓날이면 팥죽을 쑤어 귀신을 쫓았고, 이 풍습이 우리나라까지 전해진 거죠.
고려 시대부터 이어진 우리 전통
이 풍습이 한반도에 언제 들어왔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어요. 다만 고려 말 학자 이색의 문집에 "동지가 되면 시골 풍속에 팥죽을 진하게 쑨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요. 적어도 고려 시대에는 동지 팥죽이 이미 우리 풍습으로 자리 잡았던 거예요.
조선 시대에는 동지를 아예 작은설이라고 불렀어요. 낮이 가장 짧았다가 다시 길어지기 시작하는 날이니까, 태양이 다시 살아나는 날로 여긴 거죠. 그래서 궁궐에서도 동지제를 지냈고, 민간에서도 설날 못지않게 중요한 명절로 챙겼습니다.
붉은색이 귀신을 쫓는다
팥죽을 쑤는 데는 과학적 이유보다 민간신앙적 의미가 컸어요. 우리 조상들은 붉은색이 양기를 품고 있어서 음기와 귀신을 물리친다고 믿었거든요. 그래서 혼례복이나 돌잔치 아이 옷, 부적, 문설주 장식에도 붉은색이 많이 쓰였죠.
동짓날은 밤이 가장 긴 날이에요. 어둠이 가장 짙은 만큼 잡귀들도 가장 활발하게 움직인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이날 붉은 팥죽을 끓여 사당에 먼저 올리고, 대문, 마루, 부엌, 장독대, 헛간까지 집안 곳곳에 뿌렸습니다. 팥죽이 일종의 부적 역할을 한 셈이에요.
새알심에 담긴 의미
동지 팥죽에는 찹쌀로 만든 새알심이 빠지지 않아요. 새알처럼 동그랗게 빚어서 새알심이라 불렀는데, 옛날에는 자기 나이 수만큼 새알심을 넣어 먹었대요.
그래서 "동지 팥죽을 먹어야 한 살 더 먹는다"는 말이 생겼어요. 요즘 나이 계산으로 따지면 재미있는 풍습이죠. 설날에 떡국 먹고 나이 먹는 것처럼, 동지에는 팥죽으로 나이를 더한 거예요.
애동지에는 팥죽 대신 팥떡
재미있는 건 동지가 음력으로 언제 드느냐에 따라 풍습이 달라졌다는 점이에요.
동지가 음력 11월 초순에 들면 애동지, 중순이면 중동지, 하순이면 노동지라고 불렀어요. 애동지에는 팥죽을 쑤지 않고 대신 팥떡을 해먹었습니다. 어린아이에게 해가 될 수 있다는 속설 때문이었는데, 사실 떡이 죽보다 귀한 음식이었으니 아이를 위해 더 좋은 것을 차려주고 싶은 마음이었던 것 같아요.
지금도 이어지는 팥의 의미
요즘도 이사하거나 가게를 열면 팥떡으로 고사를 지내고 이웃과 나눠 먹잖아요. 이게 다 동지 팥죽에서 이어진 풍습이에요. 붉은 팥이 나쁜 기운을 막고 좋은 일을 불러온다는 믿음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 거죠.
올해 동지는 12월 22일이에요. 따뜻한 팥죽 한 그릇 드시면서, 천 년 전 우리 조상들이 어둠 속에서 빛을 기다리던 마음을 한번 떠올려보시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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