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즘도 입동이 지나면 김장 이야기가 오가지만, 예전에는 사정이 달랐습니다. 김치냉장고도 마트도 없던 시절, 김장은 한 가정의 겨울 생존이 걸린 문제였거든요. 조선시대 사람들에게 김장은 어떤 의미였을까요? 그리고 지금과는 어떻게 달랐을까요?
겨울의 반양식, 김장을 담그다
조선 후기 학자 홍석모가 쓴 『동국세시기』에는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봄의 장 담그기와 겨울의 김장 담그기는 가정의 중요한 일년 계획이다." 그만큼 김장은 집안의 큰일이었습니다. 실제로 '김장은 겨울의 반양식'이라는 말이 있었어요. 긴 겨울 동안 채소를 구하기 어려우니, 김장 없이는 겨울을 날 수 없었던 것이죠.
정학유의 『농가월령가』 시월령에는 그 풍경이 생생하게 담겨 있습니다. "무 배추 캐어 들여 김장을 하오리다. 앞 냇물에 깨끗이 씻어 소금 간 맞게 하소. 고추 마늘 생강 파에 젓국지 장아찌라. 독 옆에 중두리요 바탕이 항아리라. 양지에 움막 짓고 짚에 싸 깊이 묻고." 배추를 씻고, 양념을 버무리고, 독에 담아 땅에 묻는 과정이 그려집니다.
반년을 준비하는 대행사
김장은 하루 이틀 만에 끝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준비하는 데만 반년 이상이 걸렸어요. 봄에 젓갈을 담그고, 여름에 고추와 마늘을 말리고, 가을에 배추와 무를 재배해야 했거든요. 그러다 입동(11월 7일경)이 되면 본격적으로 김장철이 시작됩니다.
배추를 씻고 무를 채 썰고 양념을 버무리는 일만으로도 2~3일이 꼬박 걸렸습니다. 집집마다 몇십 포기, 많게는 몇백 포기씩 담가야 했으니까요. 그래서 혼자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었고, 자연스럽게 '품앗이'가 생겨났습니다. 오늘은 네 집, 내일은 내 집 하는 식으로 마을 사람들이 서로 도와가며 김장을 했던 것이죠.
김장날의 별미, 속대쌈
김장하는 집에서는 특별한 음식을 준비했습니다. 돼지고기를 두어 근 사다가 삶아놓고, 배추의 노란 속잎과 양념을 함께 내놓았어요. 일하러 온 사람들이 삶은 돼지고기와 배추 속잎을 함께 싸서 먹었는데, 이것을 '속대쌈'이라고 불렀습니다.
고된 노동 중에 먹는 속대쌈은 그 맛이 각별했다고 해요. 아삭한 배추 속잎에 따끈한 돼지고기 한 점, 갓 버무린 양념 한 숟갈을 올려 먹으면 피로가 싹 풀렸다고 합니다. 지금도 김장철이면 보쌈을 함께 먹는 풍습이 남아 있는데, 바로 이 속대쌈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김장이 끝나면 나눔이 시작된다
김장이 끝나면 절인 배추나 남은 소(속 양념)를 이웃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갓 담근 겉절이도 함께 나누었고요. 형편이 어려운 집 부인들은 남의 집 김장을 도와주고 얻은 배추와 양념으로 자기 집 김장을 대신하기도 했습니다. 김장은 단순한 음식 만들기가 아니라 이웃과 정을 나누는 행사이기도 했던 거예요.
2013년 유네스코에서 김장을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할 때도 이 점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김치'라는 음식이 아니라 '김장'이라는 문화, 즉 함께 담그고 나누는 행위 자체를 인정한 것이죠. 등재 명칭도 '김장, 한국의 김치를 담그고 나누는 문화'입니다.
지금의 배추김치는 사실 근대에 등장했다
재미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먹는 통배추 김치는 생각보다 역사가 짧아요. 속이 꽉 찬 결구배추가 중국에서 들어온 것이 1800년대 말이거든요. 그 전에는 무나 순무로 김치를 담갔습니다.
고려시대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는 "무를 소금에 절여 겨울을 대비한다"는 구절이 있어요. 고추가 들어온 것도 임진왜란 이후이니, 빨간 김치는 조선 후기에야 등장한 셈입니다. 그 전에는 소금에 절이거나 장에 담그는 방식이었죠. 지금 우리가 먹는 배추김치는 조선 말기부터 본격적으로 담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김치독, 아무 독이나 쓰면 안 된다
옛사람들은 김치를 담는 독에도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우수와 경칩을 지나 땅이 풀린 직후의 흙을 파서 처음 구운 독을 최고로 쳤어요. 이때 만든 독은 단단하고 액체가 새지 않으며 공기도 잘 통하지 않아서 김치를 오래 보관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김장을 마치면 독에 담아 양지바른 곳에 움막을 짓고 볏짚으로 싸서 깊이 묻었습니다. 땅속은 온도가 일정하게 유지되니까 김치가 얼지도, 상하지도 않고 겨우내 먹을 수 있었던 것이죠. 요즘 김치냉장고가 하는 역할을 땅이 대신했던 셈입니다.
서울에서 좋은 배추가 나던 곳은 방아다리(지금의 충신동), 느리골(효제동), 훈련원(동대문운동장 근처) 등이었다고 해요. 이곳 배추는 대부분 양반집으로 들어갔고, 보통 사람들은 녹번동이나 제기동, 마장동 배추를 사다 먹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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