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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이야기

냉장고 없던 조선시대, 한여름에도 얼음을 먹을 수 있었던 비결

by 정보정보열매 2025. 1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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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 없던 조선시대, 한여름에도 얼음을 먹을 수 있었던 비결

 

 

요즘 같은 겨울에는 강이나 호수에 얼음이 꽁꽁 얼죠. 그런데 혹시 이 얼음을 잘 보관해뒀다가 한여름에 꺼내 쓴다면 어떨까요? 황당한 소리 같지만, 우리 조상들은 실제로 그렇게 했어요. 냉장고도 에어컨도 없던 시절, 어떻게 한겨울 얼음을 여름까지 보관할 수 있었을까요?

1,500년 전부터 얼음을 저장했어요

얼음을 보관하는 창고를 '빙고'라고 해요. 우리나라에서 빙고를 사용한 기록은 놀랍게도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요.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 지증왕 6년(505년)에 왕명으로 얼음을 저장하게 했다는 기록이 있어요. 삼국유사에는 그보다 더 이전인 유리왕 때 이미 얼음 창고를 지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져요.

신라에는 '빙고전'이라는 관청이 따로 있어서 얼음 저장과 관리를 전담했어요. 국가에서 그만큼 중요하게 여겼다는 뜻이죠. 이 전통은 고려를 거쳐 조선까지 이어졌어요.

조선시대 한양에는 빙고가 네 곳이나 있었어요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나라를 세운 지 4년 만인 1396년에 한강 가에 빙고를 만들었어요. 둔지산 밑에 서빙고를, 두모포(지금의 옥수동)에 동빙고를 세웠죠. 지금도 서울에 '서빙고동'과 '동빙고동'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는 건 바로 이 때문이에요.

두 빙고의 용도는 달랐어요. 동빙고는 종묘와 사직의 제사에 쓸 신성한 얼음을 보관했고, 서빙고는 왕실과 고위 관리들에게 나눠줄 얼음을 저장했어요. 궁궐 안에는 왕실 전용 '내빙고'도 따로 있었고요.

얼음 공급은 경국대전에 규정이 있을 만큼 중요한 국가 행사였어요. 여름이 되면 왕이 신하들에게 얼음을 하사했는데, 벼슬 등급에 따라 받는 양이 달랐어요. 6월부터 7월 14일까지 지급했고, 심지어 활인서의 환자나 전옥서의 죄수에게도 얼음을 나눠줬어요.

한강에서 얼음을 자르는 대규모 작업

매년 음력 12월, 한강 물이 4치(약 12cm) 이상 두껍게 얼면 채빙 작업이 시작됐어요. 수천 명의 군인과 백성이 동원되는 대규모 작업이었죠.

아무 얼음이나 쓴 건 아니에요. 청계천처럼 더러운 물이 섞이는 곳을 피해서, 두모포와 저자도 사이의 깨끗한 강물이 언 얼음만 잘라냈어요. 작업자들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얼음 위에 칡줄기를 깔았고, 강가에는 장작불을 피우고 의약품을 준비해 동상이나 물에 빠지는 사고에 대비했어요.

잘라낸 얼음 한 덩이를 '정'이라고 했는데, 한 정의 무게가 약 18.75kg이었어요. 서빙고에만 무려 13만 4,974정, 동빙고에 1만 2,044정을 저장했다고 하니 엄청난 양이죠. 합치면 약 3,750톤에 달해요.

석빙고의 과학적 비밀

그렇다면 냉장고도 없이 어떻게 얼음을 여름까지 보관할 수 있었을까요? 비밀은 빙고의 과학적인 설계에 있어요.

첫째, 빙고는 반지하로 지었어요. 땅속은 외부 기온 변화의 영향을 덜 받거든요. 여기에 두꺼운 돌벽과 흙으로 덮어 외부 열을 차단했어요. 지붕 위에는 잔디를 심어 태양 복사열까지 막았고요.

둘째, 아치형 천장에 환기 구멍을 뚫어뒀어요. 더운 공기는 위로 올라가는 성질이 있잖아요. 출입문을 열 때 들어온 더운 공기가 천장의 빈 공간으로 모였다가 환기 구멍을 통해 빠져나가도록 설계한 거예요. 찬 공기는 아래에 그대로 머물고요.

셋째, 바닥을 약 5도 경사지게 만들어서 녹은 물이 바로바로 배수되게 했어요. 녹은 물이 고이면 주변 얼음이 더 빨리 녹거든요.

넷째, 얼음 사이사이에 왕겨와 볏짚을 채워 넣었어요. 단열재 역할을 하면서 얼음끼리 붙는 것도 방지했죠.

이런 복합적인 설계 덕분에 겨울에 저장한 얼음을 가을까지도 사용할 수 있었어요. 현재 남아있는 경주 석빙고에서 실험한 결과, 여름에도 내부 온도가 0도 안팎을 유지했다고 해요.

얼음을 캐다가 죽는 사람도 있었어요

하지만 이 얼음에는 백성들의 고통이 담겨 있었어요. 채빙 작업은 혹한 속에서 이뤄졌고, 얼음이 깨지면서 물에 빠지거나 동상에 걸리는 사람이 많았어요. 조선 후기 학자 김창협은 '착빙행'이라는 시에서 이런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했어요.

한강에서 얼음을 잘라 빙고까지 운반하는 과정도 고역이었어요. 녹기 전에 빨리 옮겨야 하니 밤낮없이 일해야 했죠. 백성들은 이 얼음을 '누빙', 즉 '눈물의 얼음'이라고 불렀다는 기록도 있어요.

정작 이 고생을 한 백성들은 여름에 얼음을 쓸 수 없었어요. 얼음은 왕실과 고위 관리들의 전유물이었거든요. 조선 후기에야 사설 빙고가 생기면서 돈 있는 사람들도 얼음을 살 수 있게 됐지만, 서민들에게는 여전히 그림의 떡이었어요.

정약용의 기발한 아이디어

실학자 정약용은 곡산부사로 있을 때 새로운 방법을 시험했어요. 한강에서 얼음을 채취해 나르는 대신, 겨울에 토굴 안에 물을 뿌려 직접 얼음을 만든 거예요. 토굴 안에서 얼린 얼음을 여름에 꺼내보니 도끼로 쳐야 겨우 깨질 정도로 단단했대요.

정약용은 이 방식이 인력과 비용을 크게 줄일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임금에게 건의해서 널리 시행하려 했지만, 정조가 세상을 떠나고 자신도 유배를 가면서 뜻을 이루지 못했죠.

19세기 서울, 세계 최고 수준의 얼음 소비량

조선 후기에는 민간 얼음 시장도 커졌어요. 한강변 곳곳에 사설 빙고가 들어섰고, 기록에 따르면 사빙고의 얼음 저장량이 관영 빙고의 15배에서 25배나 됐대요.

한 연구에 따르면 19세기 서울 인구 30만 명 중 1인당 70~100kg의 얼음을 소비했다고 해요. 당시 얼음 사용량이 문명 수준의 지표로 여겨졌는데, 이 기준으로 보면 서울은 세계 최고 수준이었던 셈이에요.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쓰는 냉장고와 에어컨이 없던 시절, 조상들은 자연의 원리를 이해하고 활용해서 한여름에도 얼음을 즐겼어요. 추운 겨울, 꽁꽁 언 한강을 바라보며 이런 역사를 떠올려보는 것도 재미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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